2009년 1월호

감탄할 일 많아질수록 더 행복해진다!

  • 김정운│명지대 교수·문화심리학 entebrust@naver.com│

    입력2009-01-06 1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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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사느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하는 시가 있다. 그건 시에서나 하는 이야기다. 그냥 웃을 일이 절대 아니다.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행복하려고 산다. 문제는 사람마다 행복의 내용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세상은 매번 그토록 복잡하고 난해한 것이다.
    감탄할 일 많아질수록 더 행복해진다!
    행복의 내용이 각기 다르다지만 행복하면 나타나는 사람들의 신체적 반응은 한결같다. “이야~”하며 감탄한다. 행복하고, 재미있고, 즐거우면 사람은 자동적으로 “이야~”하는 행복한 신음소리를 내게 되어 있다. 그럼 삶의 목적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우리는 행복하려고 산다. 행복하면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줄여서 말하면, 우리는 감탄하려고 산다. 감탄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어설픈 구라가 아니다. 인간 문명의 비밀은 바로 이 ‘감탄하기’에 있다.

    감탄은 인간만의 욕구다. 식욕, 성욕은 인간의 욕구가 아니다. 개나 소나 다 가지고 있는 동물의 욕구다. 인간과 원숭이의 차이에 관해 수많은 주장이 있다. 누구는 인간만 도구를 사용한다고 했다. 틀렸다. 원숭이도 도구를 사용한다. 원숭이는 땅 속 개미를 잡기 위해 낚싯대를 사용한다. 그것도 한번에 많은 개미를 끌어올리기 위해 혀와 이빨을 이용해 아주 정교한 낚싯대를 만든다. 그뿐만 아니다. 원숭이는 사물의 복잡한 인과관계도 아주 정확히 이해한다. 국내에서도 다큐멘터리로 소개된 적이 있는 독일 라이프치히대학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실험 결과를 보면 침팬지는 자신의 행위와 사물의 인과관계에 관한 아주 정밀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그 실험 내용이다.

    아주 좁고 가는 실험용 유리관 바닥에 땅콩을 넣고, 그 유리관을 벽에 고정시켜 놓은 방에 침팬지를 집어넣는다. 침팬지는 손가락으로 땅콩을 꺼내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내 쓸데없는 짓임을 알고 포기한다. 그러나 땅콩의 유혹을 어쩌지 못한다. 침팬지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곧 방 한쪽의 물통을 발견한다. 그러나 물을 마실 수 있는 컵은 없다. 침팬지는 그 물통의 물을 입에 한 가득 담는다. 유리관 앞으로 다시 온다. 그러고는 유리관으로 입 속의 물을 뱉는다. 유리관과 물통을 몇번 왔다갔다하며 유리관 속을 물로 가득 채운다. 땅콩이 물에 떠올라 손가락에 닿자, 아주 간단히 집어 올려 입에 넣고 의기양양하게 사라진다. 정말 놀라운 인지능력이다. 자신 행위의 가역성, 비가역성에 관한 통찰로부터, 사물의 인과관계에 관한 정확한 표상이 있어야만 가능한 능력이다.

    누구는 인간만 언어를 사용한다고도 했다. 아니다. 침팬지도 훈련시키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언어를 개발하기도 한다는 것을 수많은 유인원 관련 연구는 보고하고 있다. 일단 침팬지는 물건의 그림이 찍혀있는 카드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도록 훈련받는다. 조금 지나면 바나나 그림이 있는 카드를 이용해 ‘바나나를 달라’는 의사표현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카드를 통한 의사소통에서 자신의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된 침팬지는 자신이 어휘를 점점 늘려, ‘배고프다’와 같은 내면의 느낌까지 표현할 정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틀린 이야기다.

    모든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난다



    도구 사용, 언어 사용이 인간만의 능력이 아니라면 다른 포유류와 구별되는 인간문화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심리학자들은 어머니와 아기의 상호작용에서 원숭이를 비롯한 다른 포유류의 어미-새끼의 상호작용과는 구별되는 아주 중요한 메커니즘을 발견한다. 원숭이를 비롯한 모든 포유류의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몸을 스스로 가눈다. 태어나서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어미의 젖을 스스로 찾아 먹는다.

    그러나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난다. 꼼짝 못한다. 그저 목청 키워 울 따름이다. 인간이 다른 포유류와 같이 성숙된 상태로 태어나려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적어도 18개월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어머니 태내에 있다 보면 태어나지도 못하고 다 죽는다. 뇌가 커져서 바깥세상은 구경할 수도 없게 된다. 그래서 모든 어머니는 겨우 9개월을 꽉 채워 아기를 세상으로 밀어낸다. 모든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난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어미의 젖을 찾아 먹는 다른 포유류와는 달리, 인간의 아기는 꼼짝 못한다.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겨우 뜰 수 있을 따름이다. 이 미숙아를 인간의 어머니는 품에 안아 올려 젖을 먹인다. 그러나 그냥 먹이지 않는다. 끊임없이 말을 건다. 아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래도 어머니는 혼자 말을 걸고, 웃고, 만진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 아기가 웃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아기 사이에 둘만의 아주 독특한 놀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정말 단순하기 그지없는 놀이가 하루 종일, 몇 달이 되도록 반복된다. 하루에 수백번도 더 반복한다. 아기가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표현하고, 자신의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생후 9개월까지 이 단순한 놀이는 계속된다.

    어머니-아기의 상호작용에 관한 분석이 내 박사학위 논문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도대체 인간 문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의 거대한 주제를 나는 어머니-아기의 초기 상호작용에서 풀고자 했다. 15년 전, 베를린 자유대학의 지하 연구실에서 나는 단조롭기 그지없는 이 어머니-아기의 놀이 장면만 수천번도 더 봤다. 백인이 아기를 키우는 장면, 흑인이 아기를 키우는 장면, 한국사람이 아기를 키우는 장면을 비디오로 녹화해, 적어도 3년은 더 들여다봤던 것 같다. 미칠 것 같았다. 초단위로 나눠 분석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한국사람이나 모두 똑 같았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하루 종일 “그랬어?”“어이구”“까꿍”같은 말을 하며 어수룩한 표정놀이를 한도 끝도 없이 반복할 뿐이었다. 도대체 인간 문명의 기원은 어디인가?

    엄마는 거짓말쟁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기가 어머니의 말을 흉내 내며 언어가 발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머니가 아기를 훨씬 더 많이 흉내 낸다. 오히려 결정적 순간에 아기는 자신을 흉내 내는 어머니가 더 이상 자신의 이전 언어, 표정 등을 흉내 내는 것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내 비디오 자료의 어머니들은 하루 종일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를 흉내 내며 감탄을 연발할 뿐이었다.

    바로 그거였다. 감탄! 인간의 어머니는 하루 종일 아이의 세밀한 변화에 감탄할 뿐이다. 그러나 바로 이 감탄과 감탄으로 비롯되는 다양한 정서적 상호작용이 원숭이를 비롯한 다른 포유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엄마는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

    아기를 처음 키우는 모든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회사를 다녀오니 아기엄마는 흥분하며 “오늘 아기가 걸었다”고 한다. 그러면 아빠는 기대에 가득 차 아기의 손을 잡고 걸어보라고 한다. 이런, 아기는 전혀 걷질 못한다. 어제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어색해진 아기엄마는 머리를 긁적이며 “나하고 있었을 때는 분명히 걸었는데…” 한다.

    그 다음날 아기엄마는 아빠의 회사에 전화를 걸어 흥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 우리 아기가 “엄마”라고 분명한 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아기 목소리를 들려준다며 수화기를 아기 입에 댄다. 아빠는 “엄마 해봐, 엄마, 어엄~마! ”하며 애타게 아기의 ‘엄마’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그러나 수화기 건너에선 아기가 씩씩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러다 엄마가 “야, 빨아먹으면 안 돼”하며 갑자기 아기에게서 수화기를 뺏어 말한다. 그러고는 말한다. “어, 조금 전에는 분명히 했는데….”

    아기의 변화에 흥분한 엄마와 실망한 아빠의 툴툴거림은 첫아기를 가진 젊은 부부에게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엄마를 웃기는 거짓말쟁이로 만든 아기는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면 걷기 시작한다. 일주일이 지나면 “엄마, 엄마” 한다. 아기엄마는 그 변화의 시작을 본 것이다. 아기에게서 아주 섬세한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 엄마는 어쩔 줄 모르며 감탄한다. “어머, 얘 봐, 얘 봐! ”

    감탄할 일 많아질수록 더 행복해진다!

    원숭이 어미는 새끼를 보고 감탄할 수 있을까.

    나도 그랬다. 나도 첫아이를 내가 직접 기저귀 갈고, 아내가 젖을 짜 냉장고에 넣어둔 것을 먹이며 그 초짜 엄마들의 흥분을 직접 겪어봤다. 큰아이를 낳자마자, 아내는 베를린 필하모니 합창단의 연습지휘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 자리에서 일하려면 갓 태어난 우리 아기를 두고 밤마다 일하러 나가야 한다. 모든 연주회는 밤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도교수가 추천해준 최고의 일자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자리는 아무한테나 오지 않는 기회였다. 아무리 연습지휘자라지만, 베를린 필하모니 아닌가, 베를린 필하모니! 나는 아내에게 그 일자리를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아기는 내가 보겠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나는 남녀가 가사분담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아기 양육에 아빠도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땐’정말 그랬다!

    낮에는 내가 학교에서 공부할 동안 아내가 아기를 보고, 밤에는 아내가 베를린 필하모니로 출근하며 아기를 내게 ‘바통터치’했다. 그러나 함부로 갓난아이를 보겠다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아내가 없는 저녁 내내, 아기와 혼자 있는 일은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혹시라도 아기가 아프기라도 하면, 이건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아기를 달래는 일이라고는 팔로 안아 흔들어주는 것밖에 모르니, 저녁 내내 아기를 안고 흔들어댈 뿐이었다. 팔이 빠지는 것 같았다.

    나의 고통스러운 육아

    잠시라도 내려놓으면 아기는 울고 또 울었다. 그 아기를 달래다 지쳐 나도 울었다. 아기가 불쌍해서 운 게 아니다. 정말 팔이 빠지도록 힘들어서 울었다. 참다못해 아기에게 소리를 질렀다. 놀란 아기는 더 크게 울었다. 나중에 보니 토한 젖이 귀로 들어가 염증이 생겨 그렇게 운 것이었다. 아, 난 그 고통스러운 아기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 것이다. 그 갓난아이에게. 지금도 가끔 그 기억이 나면, 고등학교 다니는 내 큰아들 놈에게 속으로 참 많이 미안한 생각이 든다.

    젖은 또 왜 그렇게 자꾸 토하는지. 아기가 토한 젖을 바로 치우지 않으면 그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 냄새를 피하려면 트림을 제때, 제대로 시켜줘야 했다. 트림을 시켜준다며 아기의 등을 정말 열심히 두드려댔다. 나중에 아기 등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기도 했다. 놀란 아내에게 무지하게 혼났다. 그러나 지금 우리 큰놈이 수영을 잘하는 것은 그때 내가 등을 세게 두드려줬기 때문이다. 등 두드려주는 것과 폐활량이 무슨 상관이냐고 아내는 매번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난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라도 내 고통스러운 육아의 흔적을 확인하고픈 것이다.

    매일 꼭 그렇게 힘든 것만이 아니었다. 나만이 알게 되는 아기의 변화는 정말 엄청난 감동이었다. 나 이외에는 누구도 감지할 수 없는 아이의 작은 변화 하나하나가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아내가 집에 오는 시간이 어떻게나 기다려지든지. 아내가 오면, 다른 초짜 엄마들처럼 나도 흥분하여 신발도 채 벗지 않은 아내에게 그랬다. “아기가 오늘 걸었어, 걸었다고! ” 그러면서 현관문에 서 있는 아내 앞으로 아이를 세웠다. 아니, 이런. 세워놓은 아기는 이내 고꾸라졌다. 그리고 버둥대며 엄마 쪽으로 기어갈 뿐이었다. 제길, 나하고 있을 때는 분명히 걸었는데…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는 아기의 섬세한 변화를 눈치 채고 감탄해주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과 다른 포유류를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인간만의 상호작용이다. 인간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아기의 변화에 감탄하며 그 사소한 변화를 반복하게 만든다. 그래서 문화심리학자 비고츠키는 인간의 모든 발달은 상호작용에서 먼저 나타나고 내면화되어 개인의 변화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사람간(inter-individual)’에서 ‘사람내(inner-individual)’로의 전환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발달은 생물학적 발달이 아니라 ‘문화적 발달(cultural development)’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미국 심리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었던 제롬 브루너는 이러한 비고츠키의 이론을 건축물 옆에 세우는 ‘비계(scaffolding)’에 빗대어 ‘비계설정’이라는 교육학적 개념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원숭이 어미는 감탄하지 않는다

    진화의 과정이 조금만 달랐다면 원숭이도 얼마든지 인간의 인지능력 수준으로 발달할 수 있었다. 뒤늦은 인간의 조련으로도 인간 수준에 버금가는, 때에 따라서는 인간 수준을 훨씬 초월하는 인지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원숭이의 어미에게 빠져 있는 것이 있다. 감탄이다. 인간의 어머니는 아이가 작은 변화를 보일 때마다 끊임없이 감탄하며 그 변화를 반복하게 만든다. 이를 또 다른 교육학적 용어로는 ‘유도학습(guided learning)’, 혹은 ‘적극적 학습(active learning)’이라 한다. 이러한 학습의 과정은 인간에게만 존재한다.

    한마디로 아기는 ‘엄마의 감탄’을 먹고 자란다. 전쟁고아를 데려다가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혀도 이 아이들의 발달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늦다. 전세계적으로 이미 수없이 확증된 연구 결과다. 자신의 변화를 보고 감탄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는 자신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아기의 변화를 보며 수없이 감탄하며, 이를 확 끌어올려, 아기의 발달을 가능케 한다. 우리가 인간이 된 것은 엄마의 감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이 감탄해야만 한다. 죽을 때까지 누구로부터 감탄을 받아야만 한다. 식욕, 성욕이 인간의 본질적 욕구가 아니다. 감탄이 인간의 본질적 욕구다. 그래서 인간 문명이 생긴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 뒤에는 감탄의 욕구가 숨겨져 있다. 음악을 도대체 왜 작곡할까? 그림은 왜 그릴까? 먹고사는 것과 아무 상관없는 이런 종류의 다양한 인간의 놀이는 도대체 왜 시작하게 된 것일까? 간단하다. 감탄하기 위해서다. 왜 여행을 가는가? 에펠 탑을 보러 가는가? 아니다. 에펠 탑을 보는 순간 모두 “와~”하며 그 꼭대기를 올려다본다. 에펠 탑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에펠 탑을 보고 감탄하러 가는 것이다. 여름이면 다들 바닷가로 휴가를 떠난다. 왜 바닷가로 가는가? 바다 보러 가는가? 아니다. 바다가 보이는 순간 모두들 한결같이 반응한다. “우와~” 바다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바다 보고 감탄하러 간다는 말이다.

    한국남자들이 골프에 미치는 이유

    모두들 산에 열심히 올라간다. 도대체 왜 산꼭대기에 오르는가? 누군가는 폼 잡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고. 또라이다. 그건 자기가 왜 그렇게 산에 오르는지 자기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폼 잡고 이야기하는 거다. 산꼭대기까지 죽어라 오르는 이유는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건강하려고 산을 오른다면, 중간까지 왔다 갔다하면 되지 왜 꼭 산 정상에까지 가야 하는가? 우리가 산에 오르는 이유는 산이 거기 있기 때문도 아니고,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다. 감탄하기 위해서다. 산꼭대기에 올라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우와~” 하며 감탄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엄마가 날 보고 끝없이 반복해서 해준 그 감탄이 그리워서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아무도 나보고 감탄해주지 않는다. 감탄한 일도 없다. 그래서 한국남자들이 죽어라 골프장에 가는 것이다.

    감탄할 일 많아질수록 더 행복해진다!

    골프를 혼자 치는 것보다 여럿이 같이 치는게 재미있는 이유는 뭘까.

    전세계에서 한국남자들처럼 골프에 미친 사람들이 없다. 전날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연습하고 새벽 4시면 일어난다. 다른 때는 자명종이 날 깨우지만 골프장에 가는 날에는 내가 자명종을 깨운다. 자명종이 울기 꼭 3분 전에 귀신처럼 눈이 떠진다. 골프장에 가는 것처럼 한국남자들을 흥분시키는 일은 없다. 도대체 왜 그럴까? 왜 우리는 그토록 골프를 좋아하는 것일까? 골프장에 가면 감탄이 있기 때문이다. 드라이버 한번 치고 나면 모두들 외친다. “나이스 샷”“우와~” 바로 그 맛이다. 그 맛을 보고 싶어 몇 야드 더 나가는 드라이버가 나왔다면 바로 바꾼다. ‘나이스 샷’하는 그 감탄을 듣고 싶어서. 그러나 사람 참 좋은 한일시멘트의 허기호 사장은 드라이버만 치고 나면 매번 꼭 그런다. “뽀~올”. 놀란 캐디들까지 쫓아나가며 옆 홀 사람들에게 다급하게 외친다. “뽀~올, 뽀~올”.

    감탄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아무도 나보고 감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골프장에서는 감탄이 나온다. 그것도 4시간, 5시간 동안 계속된다. 그래서 골프에 그토록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양한 삶과 문화의 영역을 제쳐두고 오직 산비탈, 한구석에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감탄을 주고받는 이 땅의 사내들처럼 소외된 삶은 없다. 그래서 시간 나는 대로 음악회도 열심히 가야 하고, 미술관도 아내와 팔짱 끼고 가야하고, 축구장, 야구장에 아이들 손잡고 가려고 한다.

    여자들이 오래 사는 이유도 바로 이 ‘감탄’ 때문이다. 찜질방에 가보면 안다. 옆자리 아줌마들의 수다가 하도 시끄러워 도무지 들고 간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한번 잘 들어봤다. 그러나 하는 이야기 내용은 별로 없었다. 그저 “맞아, 맞아, 그래, 그래”만 반복해서 할 뿐이다. 서로 돌아가며 그 소리만 2박3일 한다. 바로 그래서 여자들이 오래 사는 것이다. 2박3일 동안 감탄만 한다는 이야기다. 이 집중적 감탄과정의 효과가 바로 수명 연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고등학교 동창들과 찜질방에 간다면 가능한 한 오래 놀다 오라고 한다. 유럽여행 가는 것보다 가격은 수십배 싸고, 그 심리적 효과는 수백배 크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경험되는 가장 중요한 정서적 경험을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숭고함’이라고 했다. 입이 쩍 벌어지게 하는 엄청난 자연의 풍광 앞에서, 폭풍우 치는 바다나 은하수 가득한 밤하늘을 보면서, 우리는 말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그 벅찬 느낌을 그저 숨 막히도록 감탄할 뿐이다. 칸트는 바로 이 숭고함, 혹은 장엄함의 경험이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궁극적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 숭고함이나 장엄함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초월하는 무한한 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적, 종교적 경험은 이 숭고함과 장엄함이라는 궁극적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경험’은 감탄

    칸트식 ‘숭고함의 미학(Aesthetik des Erhabenen)’에는 현대 심리학의 결정적 한계로 지적되는 ‘인지와 정서’, 혹은 ‘감정과 이성’의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인지적 능력으로는 개념화할 수 없는 이 초월적 영역은 숭고함이라는 미학적, 정서적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의 구체적 생활을 자극하고 변화시킨다. 숭고함의 경험을 통해 감정과 이성이 화해하게 된다는 것이 칸트 미학의 핵심이다.

    감탄은 이 숭고함과 장엄함의 구체적 반응이다. 말로 형언할 수 없고, 개념화할 수 없으나 우리 삶의 가장 궁극적 경험이 우리에게 와 닿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감탄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감탄으로 양육한다. 감탄이 사라지는 순간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의 사내들은 나이가 들수록 이 감탄의 욕구를 채우지 못해 어쩔 줄 모른다.

    아무도 자신을 보고 감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에 가면 감탄은커녕 책임만 늘어간다. 집에 오면 아내는 돈 이야기밖에 안 한다. 아이들은 클수록 내 곁에 오지 않는다. 아직 아이들이 어릴 때, 놀러 가자면 흥분해서 따라나서고, 내가 조금 늦기만 해도 전화를 해, “아빠, 지금 어디야?” 했다. 그런 그 애들이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함께 놀러 가기는커녕, 얼굴 보기도 힘들다. 어디서도 이 감탄의 욕구를 채울 방법이 없다.

    충족되지 않는 감탄의 욕구는 욕구좌절이 된다. 욕구좌절은 심리학적으로 뒤집혀 분노가 된다. 적개심이 되고 공격성이 된다. 모두들 어디 한번 건들기만 해봐라 하는 표정으로 거리를 헤맨다. 아, 그러나 이 아저씨들에게 감탄을 연발해주는 곳이 단 한 곳 있다. 룸살롱이다. 화려하게화장한 젊은 아가씨들은 밤마다 끝없이 외친다. “어머, 오빠! ”“오빠는 왜 이리 멋있어?” 이 싸구려 감탄에 환장한 사내들은 넥타이를 풀어헤친다. 지갑까지 열어젖힌다. 정말 슬픈 이야기 아닌가?

    한국 사회가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정치가 개판이라서가 아니다. 이 감탄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문화적, 예술적, 종교적 체험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감탄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은 ‘wonderful’이란 단어가 아예 입에 붙어있다. 가만히 살펴보라. 별일이 아니어도 ‘원더풀’을 끝없이 반복한다. 독일어로는 ‘wunderbar’다. 정서적으로 거칠고, 한없이 무뚝뚝해 보이는 이 독일인들도 매일 ‘분더바’를 연발한다.

    감탄사 안 쓰는 사회

    유학시절 식당에서 음식 나르는 일을 아르바이트로 한 적이 있다. 내가 음식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면 독일사람들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분더바”“수퍼”“아우스게짜이흐네트”등등. 자기 돈을 내고 받아먹는 음식조차 놀랍고 감동스럽다는 것이다. 일본사람들도 감탄을 아주 잘한다. ‘스고이’‘스바라시이’. 정말 별일 아닌데도 민망할 정도로 ‘스고이’를 연발한다. 세계 어디나, 누구나 빠지지 않고 매일 반복하는 이 감탄사가 한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wonderful’을 한국말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는가? 내가 억지로 번역해봤다. 이렇게 번역된다. “오, 놀라워라?”

    원래 우리나라에는 감탄사가 많았다. ‘지화자’‘니나노’‘얼쑤’등등. 10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인들의 입에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단어들이다. 간혹 들을 수 있는 민요에서 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많던 감탄사가 모두 사라졌다. 이젠 아무도 이런 감탄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감탄사가 욕으로 변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맘에 안 드는 사람이 맘에 안 드는 짓을 하면 그런다. “얼~씨구! ”

    우리 삶이 힘든 것은 감탄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간이라면 감탄사가 있어야 한다. 한국인에게도 감탄사가 있어야만 한다. 한참을 생각해봤다. 아, 한국인에게도 감탄사가 있긴 있다. 딱 하나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죽인다!’ 감탄사라고 기껏 하나 있는데, 그게 ‘죽인다!’다. 정말 죽이지 않는가?

    내가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의 기준은 아주 간단하다. 하루에 도대체 몇 번 감탄하는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지금의 사회적 지위와 부의 정도와 관계없다. 내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하루 종일 어떠한 감탄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내 인생이 아니다. 바로 그만두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 돈으로 매개된 감탄이 없다면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다. 일정 수준의 돈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어떤 한도를 지나치게 되면 돈은 내게 더 이상 감탄을 주지 않는다. 걱정과 불안의 원인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필요한 일정수준 이상의 재산을 모았다면 다양한 방식의 기부를 생각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감탄할 일 많아질수록 더 행복해진다!

    사람들은 작은 감탄을 맛보고 싶어 선물을 산다.

    내 회사가 지금 잘 돌아가는지, 안 돌아가는지의 기준 또한 감탄의 유무에 있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나와 일하는 직원들이 도대체 하루에 몇 번 사무실에서 감탄하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구체적 업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커피 자판기 앞에서, 혹은 점심식사 후, 식탁에 앉으며 “와~”“이야~”와 같은 감탄사를 연발한다면 그 회사는 성장할 수밖에 없다. 직원들의 정서적 자아실현이 이뤄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내 행복의 기초

    연봉이나 인센티브가 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감탄을 가능케 하지 않는다. 아무리 월급을 많이 줘도 감탄은커녕 한탄만 나온다면 그 회사는 5년 내에 망하게 되어 있다. 자발적 노동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창의성은 자발적 노동에서 나온다.

    내 가족이 행복한지 아닌지의 기준도 마찬가지다. 내 아내, 남편, 우리 아이들이 나와 있을 때 도대체 몇 번 감탄하는지가 행복의 척도다. “아빠, 으와~”“이야~”와 같은 감탄사가 우리 아이들의 입에서 끊이지 않고 나온다면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한 가족이다.

    얼마 전,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올 때의 일이다. 아이들의 선물의 사느라 하루 종일 진눈깨비를 맞고 다녔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저녁에 호텔에 돌아오니 열이 나고, 기침이 나고,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침대 속에서 끙끙거리며 생각했다. 이토록 아이들의 선물에 집착하는 내 심리적 동기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감탄 때문이었다. 내가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사다주면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주위를 맴돌며 그런다. “아빠, 으와~”“이야~”

    큰놈 것으로는 캐나다 단풍잎이 새겨져 있는 빨간 점퍼를 샀다. 작은놈에게 줄 선물로 새로 나온, 쥐똥만한 포켓몬스터 자동차를 샀다. 아니나 다를까. 큰놈은 “아빠, 으와”를 연발하며 거울 앞을 왔다갔다한다. 오늘 아침에도 그 점퍼를 입고 나가며 으스대며 내 어깨를 툭 친다. “아빠, 죽이지! ” 저녁에 돌아오면, 작은놈은 그 포켓몬스터 자동차를 가지고 놀며 계속 내 주위를 맴돈다. 내가 담요 깔아놓

    감탄할 일 많아질수록 더 행복해진다!
    김정운

    1962년 서울 출생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독일 베를린대 박사(심리학)

    베를린대 심리학과 전임강사

    現 명지대 여가경영학과 교수

    저서 : ‘휴테크 성공학’ ‘노는 만큼 성공한다’ ‘일본 열광’ 등


    고 골프 퍼팅연습이라도 할라치면, 골프 공 사이로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계속 방해한다. 그래도 하나도 싫지 않다. 계속 “아빠, 이야~”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정말 행복하다. 이 작은 감탄을 맛보고 싶어, 나는 몸이 욱신거리는 것을 참으며 퀘벡의 진눈깨비 내리는 거리를 헤맸던 것이다.

    우리가 결혼하고, 애를 낳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감탄하고 싶어서다. 살을 부대끼는 관계 속에서 그 작은 감탄을 얻고 싶어 가족을 꾸리는 것이다. 아닌가? 누가 나보다 더 분명하게 우리의 삶의 목적을 설명할 수 있다면 나와보라! 우리는 감탄하려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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