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2’<br>정재영 지음/ 풀빛/ 각권 250쪽 내외/ 각권 1만 3000원
“이 세상에서 최고의 이데아는 ‘좋음’의 이데아다”라는 플라톤의 정연한 명제에서부터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잘 알려진 단언을 거쳐, “세계사는 자유에 대한 의식의 발전의 역사다”라는 헤겔의 역사철학이나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명제는 우리에게 거의 퀴즈 해답같이 알려져 있다. 흔히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이런 명제들은 객관식 수능 문제의 답이 될 것에 대비해 상투적으로 암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왜 하며, 그런 말을 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하도록 교육받은 성인은 한국에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세기 1970, 80년대에 대학에 들어가 교양 필수로 철학개론을 수강한 적이 있는 현재 40~50대 연령층의 시민들은 저마다 대학 에 진학해서도 이런 철학적 진술들의 의의와 의미를 제대로 알기가 쉽지 않아 진저리쳤던 기억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철학자는 인간인가
사실 삶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들의 고전보다 문학 작품이나 역사서를 읽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거기에는 몸짓과 표정을 갖춘 구체적 개인이 각자 개성을 갖고 움직이면서 서사(敍事)와 사건(事件)을 보여주고 최소한 줄거리와 사실을 알려준다. 문학 작품의 내용과 역사적 정보는 우리에게 인간, 나아가 그 작가나 역사학자의 개성을 짐작하게 해줌으로써 우리가 인간의 일을 겪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히 전해준다.
그런데 철학적 작품들은 그것을 쓴 철학자가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엄청나게 추상도가 높은 개념들과 체계성의 틀 안에서 작동하는 언설은 같은 인문학이라도 문학이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언어체험을 강요한다. 무엇보다 철학적 명제나 논술들은 인간이 썼다고 믿기가 쉽지 않다. 한국 현대 철학 1세대가 막 수입한 서양 철학을 가르칠 당시에는 전문적인 철학 교수라도 철학적인 글에서 철학자의 인간적 체취를 감지할 능력을 제대로 시연해주지 못해 후학들을 애먹였다고 한다.
나는 정재영 동학의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주간지의 신간 소개란에서 접하면서 내가 철학을 선택한 이래 한국 현대철학의 맥락 안에서 개인적으로 꼭 하고 싶었던 과제 하나가 해결되기 시작하는 단계가 종료될 것 같다는 상쾌한 예감을 가졌다. 그의 책은 일종의 여행안내서다. “현대철학의 지도 새로 그리기”로 그 첫 장을 시작하기는 하지만, 그 장의 첫 쪽인 20쪽서부터 이 책의 첫 번째 철학적 화제거리인 빈 서클의 철학자들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36쪽까지는 철학의 ‘ㅊ’자도 언급되지 않는다. 현대철학의 지도를 새로 그린다면서 실제로는 빈 벨베데레 궁전 앞에 있는 반인반수의 혼합체인 스핑크스 조각상서부터 여행이 시작된다.
저자가 가는 곳은 빈 서클의 철학이 아니라, 빈 대학의 철학과가 아니라, 20세기 초반 기울어져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위 안에서 모든 이질적인 요소들이 모인 미술관이다. 거기 카페에서 그는 빈 커피의 일종인 ‘멜랑주’의 미각을 통해 스핑크스로 상징되는 빈 문화의 하이브리드적인 특성, 즉 “서로 다른 것을 섞어서 하나로 만드는 빈 사람들의 실험정신”을 실제로 맛보게 해준다. 벨베데레 궁전 앞의 스핑크스상을 통해 빈 문화를 시각적으로 보게 만들고 빈 미술관의 커피를 통해 그것을 미각적으로 음미한 연후에 정재영은 1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막 멎은 빈의 과거 풍경으로 끌고 간다. 그가 상기시키는 것은 “왕정이 사라진 곳에 공화정이 들어서서” 이제 인민이 자유를 만끽해도 될 것 같은 희망과 아울러 마치 나치가 저지를 전쟁 범죄의 서곡과 같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빈, 즉 희망의 첨병과 절망의 끝자락이 한꺼번에 뒤섞인 ‘광기’의 여명이다. 빈 서클의 논리실증주의는 바로 이 광기의 여명에 대해 그 도시가 필사적으로 살리고자 했던 ‘계몽’의 프로젝트다.
철학은 삶에서 하는 그 어떤 ‘활동’
이 철학 여행자는, 철학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아주 확고하고 안정된 철학관을 단지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철학을 한 모든 사람이 그들이 살았던 도시 안에서 철학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네들이 거쳐갔을 삶의 우회로, 그 도시의 문화를 그대로 복기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여정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철학은 그 어떤 특정 분야의 ‘과학’처럼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문제를 놓고 그것을 투시하고, 얘기하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가 다짐할 것을 스스로 깨달아가는 일종의 ‘퍼포먼스’라는 것, 즉 ‘철학은 삶에서 하는 그 어떤 활동’이라는 것이다.
정재영 동학의 이 책은 일단은 철학 여행기로서 성공적이다. 관광 회사의 천편일률적인 패키지 상품에 질린 사람은 유럽 현대의 사상적 맥박을 참으로 정확하게 짚고 있는 이 책이 제시한 순서에 따르거나 아니면 그 반대 순서에 따르거나 이 책의 안내대로 빈, 파리, 피렌체, 암스테르담, 에든버러, 쾨니히스베르크, 베를린, 런던, 바젤, 로마, 아테네를 차례로 방문하면 단지 물리적 관광뿐만 아니라 철학이라는 입지점을 통해 유럽의 역사와 그 정신적 맥박을 가장 심층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여기에서 철학은 분명히 철학함의 지정학적 산물로서 이해된다.
서양 철학에서 절대 제외될 수 없는 철학자들을 그 활동 도시와 이렇게 정확하게 연관시킨 저술 기획은 그 자체가 고차원적인 관광기획으로서 아주 성공적이다. 특히 영국 경험론 또는 계몽주의 원조로 에든버러를 짚어내고,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감싸안은 도시로 암스테르담을 부각시킨 안목은 감탄할 만하다. 다만 이런 철학 여행 또는 시대철학 순례로서의 이 기획에서 아주 유감스러운 것은 서양 현대철학에서 ‘신’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변화하는 임계점으로서 종교개혁의 문제의식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은 것이다. 그 때문에 ‘현대 정신’의 도래에 가장 혁명적인 추동력을 부여한 루터와 칼벵의 두 도시, 즉 비텐베르크와 제네바가 빠진 것은 옥의 티다. 이 두 도시는 피렌체 못지않게, 아니 일반 민중에게는 피렌체를 능가하는 정신적 개벽의 진원지였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철학을 철학하는 사람들의 일상으로 끌고 온 이 철학 여행서는 단지 철학 교양서적만은 아니다. 각 시대의 철학에 대한 정재영 동학의 철학 여행기적 접근은 기실, 특정 철학자의 철학을 단지 그의 개인사에서 이해하는 전기적 접근법(biographical approach)의 한계를 넘어 철학이 특정 문화적 공간 안에서, 여기서는 도시의 공기 안에서 그 도시의 문화를 섭취하면서, 획득해낸 것임을 보여주는 사회문화적 접근법(socio-cultural approach)의 본격적 실험으로도 읽힌다.
사회문화적 접근
이 책을 사용함으로써 나는 철학의 학문 후속세대에게 철학과 관련된 아주 진지한 일상 생활의 모습과 그 환경을 다같이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철학을 그 철학함의 생활과 문화로 복기함으로써 정재영 동학은 참으로 재미없을 것 같은 철학자들의 일생도 하나의 문화적 사실로서, 나아가 좀 더 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문화재화로서 가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실연시켰다. 바로 이 점에서 문화로서의 철학(philosophy as culture)이라는 기획 하나가 아주 성공적으로 시작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그러나 그 어떤 어려운 성공은 더 나은 또 다른 성공을 욕심내는 투정 많은 호사가들의 비판적 표적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철학 여행서로서 정재영 동학의 이번 책이 정말 상찬할 만한 많은 장점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 동행자로서 나는 그 어떤 철학을 상대적으로 국지적 성격을 면치 못하는 특정 도시문화의 지평 안에서 해명하는 데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철학하는 이들의 철학적 사고가 결코 자기가 지금 당장 살고 있는 도시의 광장이나 골목길 또는 카페에 묶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가 어쩔 수 없이 속해 있는 그 국가의 정치문화에 대해서조차 구속을 거부하는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철학하는 정신의 형성은 분명히 특정 문화 안에서 배태되지만 그 위대한 발전은 어떤 경우에도 특정 문화를 초월하고자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철학은 어쩔 수 없이 세속인의 활동으로서 세계종교와 겨루고, 비판가로서 최고권력과 경쟁한다. 철학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한계를 벗어나면서도 끝까지 인간으로 남고자 할 때 나타나는 처절한 자기 긍정이다.
그런데 정재영 동학이 도시문화의 가장 안온한 향수자로서 그려놓은 서양 철학의 영웅들에게는 정재영 동학조차 긍정할 바로 이런 처절성이 보이지 않는다. 단지 대학의 따분한 교수로서가 아니라 시대마다 정신적 순교자의 역할을 했던 철학자들의 이런 철학함이 없었으면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학문이기를 그쳐본 적이 없는, 가장 오래된 학문으로서 철학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런 철학의 자기신조는 어디까지나 정재영 동학과 같은 교량자가 있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진리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정재영 동학이 저술한 책의 수혜자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