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 지시로 시작된 한국산악회의 독도 조사
- 평화선 설치로 핫이슈가 된 독도 영유권 문제
- 예고 없이 4년 만에 독도를 다시 폭격한 미군
- 해상 담판 위해 순시선 타고 나온 일본 국회의원
- 대나무 폴을 들고 암벽을 탄 한국산악회원들
- 리앙쿠르 때문에 독도 표석 철거한 경북도
- 독도에는 포퓰리즘을 상륙시키지 마라
1953년 10월14일 독도에 상륙한 한국산악회가 인부들을 시켜 뽑아내는 일본 영토 표주(標柱).
이러한 사실은 당시 독도에 갔던 박병주(朴炳柱·83, 홍익대 공대 명예교수, 도시계획 전공) 선생이 2008년 7월 국회 독도자료실에 기증한 자료와 그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패망한 일본이 미군정을 받다 1952년 4월28일 독립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국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식민지로 삼았던 한국을 상대로 국교를 회복하기 위한 회담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다케시마(竹島)는 그들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일본을 상대로 군정을 펼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1946년 6월22일, 지령 제1033호로 일본 어민과 일본 어선의 조업한계선을 설정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이름을 따서 ‘맥아더 라인’으로 불린 이 선 안에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지령 제3항에는 ‘일본 선박과 승무원은 다케시마 12해리 이내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돼 있었으므로 일본인들은 독도에 접근할 수 없었다.
박병주 홍익대 공대 명예교수<br>한양대 건축학과 졸업, 홍익대 명예공학박사<br>부산공고 토목과 교사, 홍익대 도시계획학과 교수, 홍익대 공대 학장, 홍익공업전문대학장, 홍익대 대학원장 역임<br>중앙도시계획위원, 측량협회회장, 국토개발연구원 이사장 역임
이런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체제를 끝내고 평화체제로 들어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 발효일인 1952년 4월28일 미국은 일본에 대한 군정을 끝내니 이로써 맥아더 라인의 효력도 상실된다. 일본인들은 독도에 상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이 대응책을 마련했다.
일본 독립 3개월 전인 1952년 1월28일 일본 어선이 절대로 넘어와서는 안 되는 ‘평화선(일명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고, 이 선 안에 독도를 집어넣은 것이다. 그로 인해 한일회담이 열리면 독도는 대일(對日)청구권 등과 함께 뜨거운 감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독도를 갖고 입씨름을 하려면 독도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부산으로 수도를 옮겨놓고 6·25전쟁을 치르느라 독도 정보가 전무했다.
최초로 영토 표지 설치
미군정을 받던 시절 한국은, 당대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던 조선산악회를 통해 독도 영유권을 밝힌 적이 있었다. 조선산악회 회원 63명이 조선해안경비대에서 제공한 군함 ‘대전호(大田號)’를 타고 1947년 8월20일 독도에 상륙해, 한자로 ‘조선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독도’라고 쓴 나무말뚝을 박아놓고 돌아온 것이다.
1년 후 한국은 독립 정부를 세우고 그로부터 3년 후 6·25라는 큰 전쟁을 맞았다. 전쟁 초기 서울을 뺏긴 한국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되찾아 9월28일 환도(還都)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1951년 1월4일 서울을 내주고 다시 부산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 3개월 뒤인 3월15일 한국 육군 1사단이 서울을 재수복했으나 인근 지역에서 공방전이 계속돼, 1953년 7월27일 휴전할 때까지 계속 부산을 수도로 사용했다. 서울로 수도를 다시 옮긴 것은 1953년 8월15일이었다.
부산을 수도 삼아 전쟁을 치르던 때 독립 일본은 한국의‘뒤통수’를 때렸다. 1952년 6월 일본은 수산청과 해상보안청 공무원을 독도에 상륙시켜 조업 중이던 우리 어민들을 내쫓고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표주(標柱·말뚝)를 박아놓고 돌아간 것이다. 그로 인해 울릉도가 발칵 뒤집혔다. 어민들은 일본의 영토 표주를 뽑아, 당시 울릉도에서 가장 큰 정부기관이던 울릉경찰서 앞에 갖다놓고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었다.
독도에 상륙해 최초 측량을 했던 1953년 10월의 조사를 위해 그해 7월에 작성한 계획서. ‘비(秘)’자가 쓰여 있고 외무부·국방부 등이 후원했다고 적혀 있다.
이러한 사실이 보고되자 평화선을 선포했던 정부는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기에, 1947년 독도를 조사했던 조선산악회의 후신 한국산악회에 그 일을 맡기기로 했다. 한국산악회에 독도 영유권을 분명히 하는 조치를 취하고 한일회담에 대비해 독도를 조사해달라고 한 것이다. 한국산악회는 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독도와 함께 울릉도도 조사하기로 하고,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을 꾸렸다.
박 선생이 보관해온 자료 중에는 이 조사에 들어간 예산을 밝힌 것도 포함돼 있다. 한국산악회는 정부 예산 2957만9000원에 한국산악회 회비 300만원을 더한 3257만9000원으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를 준비했다. 정부에서는 문교부와 외무부 국방부 상공부 공보처가 후원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한국산악회는 각 분야 최고 전문가를 투입하려고 했다.
지질·광물·지형·측지·동물·식물·수산·해양·농학·임학·의학·역사·지리·고고(考古)·방언(方言)·민속·사회경제·보도(報道)·문인(文人) 등으로 조사반을 만들고, 여기에 한국산악회 회원으로 있는 그 분야 전문가를 넣으려고 한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독도의 실체를 보여줄 ‘측지(測地· 측량)반’이었다.
1952년은 전시인지라 서울에 있던 대학교는 전부 부산에 내려와 있었다. 한국산악회는 훗날 건축가로 이름을 날린 서울대 김중업 교수(건축과, 작고)와 한양대 박학재(토목과, 작고) 교수를 측지반으로 선발했다. 그러나 실제 측량에는 서툴렀던 두 교수는 부산공고 토목과장 겸 교사인 박병주씨를 데려가자고 했다.
측량전문가로 독도 조사단 참여
그리하여 박 선생은 한국산악회에 가입해 회원이 되고, 가장 중요한 독도 측량을 맡게 되었다. 박 선생은 일본에서 측량기술을 배웠다. 1925년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 있던 누나의 주선으로 1941년 도일(渡日)해, 관립 고베(神戶)공업전문학교 야간부 토목과를 다니면서 낮에는 측량설계회사에서 일했다. 1945년 귀국해서는 철도국에 근무하며 측량·설계 업무를 수행하다 1948년 부산공고 토목과 교사가 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은 국제연합한국부흥단(UNCRA)을 만들어 다양한 지원을 했다. 이때 UNCRA로부터 최신 측량장비를 지원받은 곳은 제대로 된 학교시설을 갖고 있던 부산공고였다(부산공고는 그 후 부산공업전문학교를 거쳐 부산공업대학이 됐다가 1996년 부산수산대학과 합병해 부경대학교가 됐다).
박 교사와 두 교수는 우연한 일을 계기로 서로 알게 되었다. 1952년 봄 조병옥·장면 박사가 이끄는 충무공기념사업회는 미국 록펠러재단에서 지원한 돈으로 서울 수유리에 충무공 이순신 기념공원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공원을 만들려면 현장 측량부터 해야 한다. 사업회는 김중업-박학재 교수와 박병주 교사에게 기초조사를 맡겼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아가며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었던 서울 수유리 일대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이런 인연이 있었기에 두 교수는 바로 박 교사를 추천한 것이다.
약관 27세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독도를 조사하게 된 것에 박 교사는 크게 고무됐으나 바로 고민에 빠졌다. 측량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측량 폴(pole)을 잡아줘야 거리와 각도를 잴 수 있는데 교수들에게 그 일을 부탁할 수는 없었다.
이 고민은 우연한 일로 풀렸다. 김중업 교수가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리는 국제예술가회의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김 교수가 출장을 이유로 불참한다고 하자 박 교수도 “그렇다면 나도 빠지겠다”고 해, 박 교사는 측지반 반장이 돼 같은 학교 토목과의 선배 교사인 김기발씨를 조사단에 끌어들였다.
7월에 시작된 조사단 구성은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9월에야 확정됐다. 1947년 조선산악회의 조사 때 해안경비대가 함정을 제공했으니 이번에는 해군이 배를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이때는 전쟁 중이라 해군은 미군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 싼한일 갈등을 잘 알고 있던 미 군사고문단은 해군에 함정을 제공하지 말라고 지시 했다.
그리하여 교통부 해운국 소속의 등대 순시선인 ‘진남호(305t)’가 동원돼, 조사단 38명을 싣고 9월17일 오전 10시20분쯤 부산 어시장 부두를 출발했다. 해군은 배를 제공하지 않았지만 국방부가 후원하는 행사이니만큼 진남호에 대한 통제를 맡기로 했다. 해군은 ‘당연히’ 진남호의 전 일정을 미군에 통보했다.
“나의 역사는 기록되기 시작한다”
이튿날 아침 진남호는 울릉도 도동항에 입항해 울릉경찰서장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9월22일 새벽 5시30분 도동항을 출항해 독도로 갔다. 박 선생은 부산에서 배를 타자마자 일기 형식으로 메모를 시작했다. 박 선생이 작성한 9월22일자 메모에는 ‘오늘부터 나의 역사는 기록되기 시작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의 메모에 따르면 조사단원들이 뱃멀미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다 누군가가 “독도가 보인다”고 외쳐, 선실에 누워 있던 조사단원들이 갑판으로 올라가 독도를 구경했다. 그런데 잠시 후 요란한 폭음과 함께 전투기 4대가 날아와 독도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박 선생의 메모장에는 ‘독도에서 2km 떨어진 곳에 배가 도착했을 때 4대의 비행기가 날아와 독도를 25번 폭격해, 우리 배는 오후 12시40분 항로를 돌려 오후 6시쯤 울릉도에 도착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의 회고다.
“전투기로 보이는 비행기가 떨어뜨린 폭탄이 독도에 맞으면 큰 불꽃이 튀겼고, 바다에 떨어지면 곧 큰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뱃멀미에 시달리다 독도가 보인다고 하여 갑판에 올라왔던 우리는 그 광경에 아연실색했다. 나는 내가 할 일을 깨달았다.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지만 흔들리는 배와 멀미, 그리고 폭격 때문에 시계를 볼 여유가 없었다. 마침 홍종인 조사단장이 우리 배의 위치를 확인하라고 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소리를 듣고 거리를 추산하는 음측(音測)도 강의했으므로, 음측 능력을 갖고 있었다. 독도에 폭탄이 떨어져 불꽃이 튀면 정신을 차리고 숫자를 셌는데, 20을 세고 나니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1초에 셋을 세니, 20을 셌으면 6초를 넘긴 것이 된다. 소리는 초속 340m로 이동하니, 6초면 2040m란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나침반을 보니 독도가 북동쪽으로 나오기에 훗날 조사단은 독도 남서방 2km 해역에 진입했을 때 4대의 전투기가 독도에 25번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목격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해군은 조사단을 태운 진남호가 언제 독도에 도착할 것인지를 사전에 미군에 알렸다. 그런데 진남호가 독도에 도착할 시간에 정확히 전투기가 날아와 독도를 폭격했다. 박 선생은 “이 폭격에 놀란 진남호 선장은 즉시 부산에 있는 해군본부로 무전을 보냈으나, 응신(應信)이 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폭격으로 당황한 와중이었지만 박 교사는 협각법(夾角法)으로 독도에서 가장 높은 서도의 높이를 약측(略測)했다. 그는 팔을 쭉 뻗었을 때 자신의 눈에서 손끝까지의 거리가 61cm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손끝에 잡은 볼펜 밑동을 바다가 보이는 데 세우고, 볼펜에 서도 꼭대기가 있는 지점을 표시한 후, 그 높이를 재는 것이다. 높이는 4cm로 나왔다. 그의 팔 길이 61cm가 진남호에서 서도(독도)까지의 거리 2km라면, 볼펜으로 측정한 4cm는 130m라는 계산이 나온다.
부산을 떠나기 전 그는 일본 자료에서 독도 정상(서도)의 높이가 해발 115m란 기록을 본 적이 있었다. 115m와 그가 목측(目測)한 130m는 얼추 비슷하다. 그는 진남호가 독도에서 2km쯤 떨어진 곳에서 독도 폭격 장면을 목격했다는 보다 확실한 판단을 갖게 되었다
미군기의 연이은 독도 폭격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9월22일 독도를 폭격한 전투기는 어느 나라 소속이었을까? 한국과 북한,일본, 소련 공군은 한 번도 독도를 폭격한 적이 없었고 독도를 폭격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미국 공군은 달랐다. 현재 미 공군은 한국에 7공군, 일본에 5공군을 두고 있지만 6·25전쟁 때는 7공군이 없었다. 6·25전쟁 때는 일본에 있는 5공군이 일본과 한반도 작전을 전담했다. 이 5공군이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했다.
일본에 있던 연합군사령부는 맥아더 라인이 선포되고 1년여가 지난 1947년 9월 독도를 미 공군기와 미 해군기를 위한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948년 6월8일 독도에서 처참한 사고가 일어났다. 오키나와에서 이륙한 미 5공군 소속 B-29 편대가 독도에서 고공폭격을 연습해, 18척의 배를 타고 나와 조업하고 있던 조선인 59명 가운데 14명이 숨지고 네 척이 침몰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미군정을 받고 있었기에 정부 차원의 항의를 할 수가 없었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소수 언론이 미군의 폭격을 맹렬히 비난했을 뿐이다. 사건 조사와 수습은 ‘당연히’ 미군이 맡게 되었다. 조종사들은 폭탄을 투하하기 전 연습장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B-29편대는 고공폭격을 연습하러 간 것이라 육안으로는 독도에 사람이 들어왔는지 확인하기 어렵다고 주장해, 조사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황소는 지금의 자동차보다 더 귀한 존재였다. 미군은 희생자 유가족에게 황소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자금을 배상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배상을 받았지만 유족들의 고통은 자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 발생 2년 뒤이자 6·25전쟁 직전인 1950년 6월8일, 조재천 경북도지사는 ‘독도조난(遭難)어민위령비’를 만들어 독도로 갖고 가 제막했다.
미 공군기의 독도 폭격은 크게 보도된 사건이었기에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사건 후유증이 컸기에 미 공군은 독도 폭격연습을 중단했다. 미군기가 독도를 폭격하는 소리는 울릉도 동편에서도 들을 수 있다. 울릉도 주민들에 따르면 미군은 6·25전쟁 기간 중에도 독도에서 폭격연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박 선생이 당시 울릉도 주민들에게 들은 증언 근거).
日,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제공
그런데 조사단이 독도에 가는 날 4년 만에 독도 폭격이 이뤄졌다. 전투기 날개에 그려진 국기를 확인하지 못하고 울릉도로 돌아온 조사단은 이 전투기를 ‘국적불명의 전투기’로 부르기로 했다.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다. 왜 미군은 독도를 다시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한 것일까. 여기에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작용했다.
미군기의 독도 폭격으로 참사가 일어난 지 2년 만인 1950년 6월8일 독도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세우는 조재천 경북지사(왼쪽). 이 위령비는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유실됐기에 경북도는 2005년 8월15일 새로 만든 위령비를 독도에 세웠다(오른쪽).
야마모토 도시나가(山本利壽) 의원이 “다케시마 주변이 (미군의 폭격) 연습지로 지정되면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로 확인받기 쉽다는 발상에서 외무성은 다케시마가 연습지로 지정되길 바란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이냐?”라고 묻자, 이시하라 간이치로(石原幹市郞) 외무성 정무차관은 “대체로 그런 발상에서 다양하게 추진하고 있다”고 답변한 것이다.
기자는 이시하라 간이치로 차관의 답변이 현실화된 물증은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심증은 갖고 있는데, 그 근거가 바로 1952년 9월22일의 독도 폭격이다.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제공한 일본은 한국 해군을 통해 진남호의 일정을 알고 있는 미군을 움직여 진남호가 독도에 접근할 때 폭격을 했다는 얘기다. 개연성이 충분한 상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진남호에 탄 한국산악회원들은 일본 중의원에서 오고간 문답을 알지 못했으므로, 1948년의 독도 폭격을 떠올리며 공포에 떨다 곧바로 울릉도로 돌아왔다. 조사단은 명목상 울릉도도 조사하게 돼 있었으므로, 이들은 해군본부의 지시를 기다리는 동안 울릉도를 조사했다. 박 교사는 이들을 따라다니며 울릉도의 역사와 자연·산업에 대한 메모를 했는데, 이 메모는 훗날 그가 부산공고 교지인 ‘용광로’에 ‘독도의 측량’이란 제목으로 독도·울릉도 탐사 내용을 발표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해군본부는 “모든 조치를 다 해놓았다”며 “다시 독도로 가라”는 요지의 무전을 보내왔다. 조사단은 미 5공군에도 연락했으니 폭격 걱정은 하지 말고 독도 조사를 하고 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리하여 9월24일 0시 무렵 저동항을 출항해 24일 새벽 독도 인근에 도착했는데, 그때 또 난데없이 전투기 3대가 나타나 독도를 폭격했다.
새벽에, 그것도 모든 조치를 취했다고 해서 안심하고 갔는데 또다시 시작된 독도 폭격은 더 큰 두려움을 주었다. 조사단원들은‘이것은 고의적인 방해다’라는 데 의견을 모았고, ‘이런 상태에서 독도 조사는 불가능하다. 언제 또 전투기가 날아와 폭격할지 모르니 독도 상륙은 위험하다. 왜 우리 조사를 방해하는지 알아봐야 한다’며 뱃머리를 돌리기로 결정했다.
귀항 결정이 내려지자 박 교사는 다시 독도에 올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기까지 왔는데 독도를 한 바퀴라도 돌아보고 가자”고 제의해 이를 관철시켰다. 진남호가 독도 주변을 도는 동안 그는 사진기로 독도를 촬영하고, 재빨리 스케치를 했다. 다음에 독도에 상륙할 기회가 온다면 어떻게 측량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독도를 눈에 익혔다.
부산을 출발할 때 한국산악회는 독도에 상륙하면 전면에 한글로 크게 ‘독도’, 한자로 작게 ‘獨島’, 알파벳으로 ‘LIAN COURT’라고 새긴 영토 표석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당시는 한자를 한글보다 많이 쓸 때인데, 한국산악회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한글을 가장 크게 새긴 표석을 준비했다. 영문 LIANCOURT(리앙쿠르)를 새긴 것은 국제해도에 리앙쿠르로 표기된 섬이 한국의 독도라는 것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한국산악회는 한국의 독립성을 강조하기 위해 독도 조사를 광복절에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영토표석 뒷면에 15th, AUG, 1952를 새겨넣었다. 그런데 조사단 구성이 늦어지고 계획이 여러 차례 변경되는 바람에 광복절을 한 달 넘겨 출항했다. 그리고 폭격으로 독도 상륙에 실패했으므로, 이 표석을 울릉경찰서에 맡기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독도는 둥그냐 삼각형이냐?”
정부 지원을 받은 만큼 조사단은 10월9일 부산시의사당에서 열린 국회 국방·외무위원회에 조사 보고를 하고 사실상 해단(解團)했다. 측지반장인 박 교사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보고문을 만들어 보고했다(박 선생의 메모 참고).
“우리의 영토인 독도가 어떻게 생겼느냐? 삼각형이나 둥그냐? 크기는 대략 얼마나 되느냐? 이런 질문에 대한 해명이 제가 스케치해 온 이 지형도입니다. 국적 불명의 항공기 폭격 때문에 정확한 측량을 하지 못했습니다만 독도의 대략적인 면적은 3만5000여 평으로 추정됩니다….”
보고를 마치자 독도 정보에 굶주려 있던 국회의원들이 박수를 쳤다. 조사단장을 맡았던 홍종인 한국산악회장도 박 교사에게 “당신이 큰 수고를 했소. 음측과 목측을 해준 덕분에 독도에 대한 보고를 제대로 할 수 있었소”하며 칭찬했다.
날이 추워지면 누구도 독도 상륙이 힘들어진다. 독도 입도(入島)는 날이 풀리는 1953년 초여름에 재개된다. 1952년과 53년 사이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 미군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1953년 2월27일, 더 이상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난 1953년 6월25일 일본 수산청과 해상보안청 공무원이 독도에 상륙해, 조업하던 우리 어민을 쫓아내고 또다시 일본 영토 표주를 세웠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해군은 독도 주변으로 함정을 출동시켰고 독도 영유권 다툼은 한일 간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큰 사회이슈가 되었다. 정부는 한국산악회에 다시 한번 독도 조사를 기획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다시 조사단을 만들게 됐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측지반 구성을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한국산악회는 세 명의 대학교수와 박 교사로 측지반을 편성하고, 반장은 김모 교수에게 맡긴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박 교사는 “독도 측량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단시간에 집행해야 한다. 반장은 지난해 독도 환경을 눈으로 살피고 온 내가 맡는 것이 효과적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한국산악회는 “당신이 동행하지 못하겠다면 측량기계만 빌려달라”고 했다. 박 교사는 “그렇게는 못한다”고 버티자 교수 두 사람이 용퇴함으로써 박 교사가 반장이 되었다.
1953년 10월14일 독도에 상륙한 한국산악회가 일본의 영토 표주를 뽑아내기 전 이 표주에 태극기를 묶고 촬영했다. 이 표주 뒤에 조재천 지사가 세운 독도조난어민위령비가 보인다.
결례를 무릅써가며 반장을 맡은 박 교사는 전년 조사 때 눈여겨본 것을 토대로 제대로 된 측지 계획을 수립하려고 했다. 그는 1952년 조사 때 고생한 경험 때문에 동행을 사양한 부산공고의 김기발 교사 대신 구자원 교사를 참여시키고, 한국산악회에는 바위를 탈 수 있는 대원들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길이가 3m쯤 되는 대나무를 수십 개 구해 50cm 간격으로 빨간색과 흰색을 번갈아 칠한 측량 폴(pole)을 만들었다. 각각의 폴에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큼지막한 번호판을 붙였다. 그리고 폴 허리춤엔 노끈을 세 가닥씩 매달고, 각각의 노끈 끝엔 땅이나 바위에 박아 넣을 수 있는 못을 매달았다. 일반적인 측량이라면 폴은 조수가 잡고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독도는 험준한 바위인지라 폴을 잡고 서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바위를 탈줄 아는 사람이라면 바위틈에 못을 박아 폴을 고정시킬 수 있다.
바위를 타는 조수들은 변곡점에 폴을 박아놓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또 폴을 박는다. 박 교사는 이렇게 하면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측량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국산악회 측은 한양공대 토목과 학생인 이문행씨 등 젊은 회원 다섯 명을 박 교사의 조수로 지명해주었다.
이렇게 구성된 조사대원 36명은 서울로 수도를 옮긴 뒤인 10월11일, 해군 905 경비정(정장 서덕균 대위)을 타고 부산항을 출항해 당일 울릉도에 도착해 울릉경찰서 측으로부터 전 해 맡겨놓았던 영토 표석을 전해 받아 905정에 실었다.
이때 박 교사는 “독도 주변은 파도가 너무 세서 군함처럼 큰 배는 접안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도와 서도 사이의 암초바다를 다니는 데도 필요하니 군함에 작은 전마선을 두 척 싣고 가자”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10월13일 아침 905정은 울릉경찰서장을 태우고 독도로 출항했다.
한국 군함 따라붙은 일본 순시선
그날 정오 무렵 905정은 독도에 접근해 전마선을 내렸으나 파도가 너무 세, 울릉도로 되돌아왔다. 905정이 울릉도로 귀항하고 있을 때 국기를 올리지 않은 선박 한 척이 따라와 나란히 달렸다. 905 정장인 서 대위가 깃발을 이용해 정선(停船) 명령을 내리고 국적을 밝히라고 하자, 저쪽 배는 일장기를 올렸다.
서 대위는 즉시 총원 전투명령을 내렸다. 순식간에 905정 장병들이 전투 준비에 들어가면서 긴장이 조성됐다. 저쪽 배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나가라(약 300t)’함인 것으로 밝혔는데, 그 함의 무장은 905정보다 훨씬 약했다. 이렇게 대치한 상태로 달리다 나가라함이 뒤로 처지며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홍종인 한국산악회장이 서 대위를 불러 정황을 설명하게 했다. 서 대위의 설명 요지는 이러했다.
“일본 순시선은 자기 정부의 명령으로 다케시마를 순시하러 왔다고 했다. 이에 우리는 해군본부를 불러 ‘일본 순시선이 평화선을 넘었으니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지시해주기 바란다’라고 물었다. 해군본부에서는 ‘일본 순시선이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면 무조건 돌려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무조건 돌아가라’라고 했더니, 순시선은 ‘귀함의 안전한 항해를 빕니다’라면서 떨어져 갔다….”
그러자 울릉경찰서장이 흥분해서 “일본 순시선이 평화선을 넘어왔으면 나포해야지 왜 돌려보내느냐”고 야단을 쳤다. 서 대위는 “우리는 본부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항변했다. 조사단에는 언론사 기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홍종인 회장은 사태를 정리한 후 “아마 일본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할 것이니 라디오를 켜놓고 들어보자”고 했다. 그날 밤 일본 NHK에서는 이런 방송 내용이 흘러나왔다.
1953년 10월15일 한국산악회가 독도 자갈마당에 설치한 영토 표석의 앞면과 뒷면(아래) 오른쪽 위는 2005년 8월15일 경북도가 복원한 표석이고 아래는 2008년7월30일 이 표석을 경북도가 철거한 후의 모습이다.
방송을 들은 조사단은 다시 한번 자신들의 임무가 막중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13일 울릉도로 돌아온 조사단은 뱃멀미로 녹초가 되었다. 조사단에 부여된 독도 조사 항해 시일은 열흘이었으므로 마냥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14일 새벽 다시 독도행을 추진했다. 하지만 13일의 항해가 너무 힘들었기에 울릉도에서 동승한 경찰서장 등 몇몇은 “가지 않겠다”고 해 탑승자 수가 줄어들었다.
10월14일 새벽 1시쯤 울릉도를 떠난 905정은 5시30분쯤 독도 주변에 도착했다. 그리고 두 척의 전마선을 내려 지금의 동도 자갈마당에 조사단원들을 상륙시켰다. 자갈마당에서 한국산악회원들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갈매기와 일본 공무원들이 박아놓은 일본 영토 표주(標柱), 그리고 1950년 조재천 경북지사가 설치한 독도조난어민위령비였다.
독도에 상륙했던 일본 공무원들은 1947년 조선산악회가 설치한 영토 말뚝은 철거했지만, 위령비는 손대지 않은 것이다. 한국산악회 독도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한 김한용 사진사도 독도에 상륙했다. 한국산악회원들은 먼저 일본 영토 표주에 태극기를 묶어 사진을 찍은 후 울릉도에서 데려간 인부들을 동원해 이를 뽑아내 905정에 옮겨 실었다. 김한용씨는 표주를 뽑아내는 역사적인 장면을 렌즈에 담았다.
그때부터 김정태씨를 필두로 박 교사의 조수들이 대나무 폴을 세 개씩 지고 동도의 바위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툭 튀어나온 변곡점에 폴을 박아 세우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다시 폴을 박았다. 박 교사는 자갈마당에 트랜시트(transit·轉鏡儀)를 세우고 스타디아(stadia) 측량법을 사용해 이들이 세운 폴을 보며 거리와 각도를 측정했다.
1953년 10월14일 독도 동도에 상륙해 암벽을 오르며 박병주 선생이 만든 대나무 측량폴을 박아 세우는 한국산악회 회원들. 위 사진은 독도를 측량할 때의 박병주 선생.
동도는 서도에 비하면 덜 거칠기에 주의 깊게 발끝을 내디디면 일반인도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 박 교사는 대원들과 함께 동도 정상에 올라가 자갈마당에서는 볼 수 없는 정상 부근도 측량했다. 그러나 자갈마당 반대편으로는 내려가 보지 못했기에 그곳은 정확히 측량하지 못했다. 저녁이 되자 동도 측량을 마감하고 자갈마당으로 내려와 텐트를 치고 야영했다.
이튿날은 서도를 측량하기로 했다. 먼저 이문행 대원이 전마선을 타고 서도 주위의 암초로 가 폴(函尺)을 세우면 박 교사는 각도와 거리를 측량했다. 두 사람은 전마선을 타고 서도 주위를 돌며 측량을 했으나, 난바다를 향한 쪽은 파도가 너무 세서 측량을 하지 못했다.
서도의 암벽은 동도보다 훨씬 거칠고 가팔라‘아차’해서 부딪치면 금방 상처가 난다.한국산악회 대원들은 서도 정상까지 등반하지 못했기에 그 또한 서도에 대해서는 측량하지 못했다.
독도는, 가보면 알겠지만 아주 단순한 바위섬이다. 이러니 광물반이나 수산반 등은 금방 조사를 끝내고 한가해진다. 측지반을 제외한 다른 조사반은 다음날 할일이 없었으므로 독도조난어민위령비가 있는 자갈마당에 울릉도에서 가져간 독도 영토 표석을 세웠다.
1953년 10월14일 밤 작업을 끝내고 독도 동도의 자갈마당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야영하는 한국산악회(위). 박병주 교사가 이끄는 측지반은 전마선을 이용해 서도 주변의 암초를 옮겨 다니며 측량했다(아래).
그런데 이 표석을 당초 예정했던 1952년 8월15일이 아닌 1953년 10월15일 세우게 되었으니 표석 옆면에 1953년 10월15일을 써넣었다. 905정은 해군본부의 통제를 받는 작전 함정인지라 귀항 날짜가 정해져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산악회는 15일 정오쯤 철수해야 했다. 박 교사는 서도 주변 암초에 대한 측량을 중단하고 조수들과 함께 905정에 올랐다.
그리고 서 대위에게 독도 주변을 근접해 천천히 돌아달라고 해, 자갈마당과 동도 정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동도의 반대편과 서도의 반대편을 자세히 스케치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어 협각법과 앙각법(仰角法)을 이용해 서도 높이를 174m로 추정해냈다. 전년보다 높게 나온 것이다. 이러한 자료를 확보한 박 교사는 부산에 돌아와 한국인 최초의 독도 지형도를 만들었다.
독도에 상륙해 분야별로 조사를 하고 영토 표석까지 세운 한국산악회는 서울 소공동에 있던 서울대치대 강당에서 독도 조사 결과를 발표하게 되었다. 이때 연사로 나간 박 교사는 그가 그린 지형도를 펼쳐 보이며 이러한 요지의 발표를 했다.
1953년 10월14일 한국산악회에 동행해 역사적인 사진을 찍은 김한용 선생(좌). 한국산악회의 독도 표석 설치를 보도한 1953년 10월23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 기사(우).
박 교사가 작성한 이 독도 지형도는 그때까지 일본에서 나온 어떤 독도 지형도보다 훨씬 상세하고 정확했다. 박 선생이 작성한 지형도는 국토지리정보원이 항공사진을 이용해 만든 최근 지형도와 큰 차이가 없다.
조사단에 참여했던 언론인들은 매체를 통해 보고를 했다. 조사단장이었던 홍종인씨는 조선일보 주필이었으므로 조선일보에 ‘독도에 다녀와서’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4회 실었고, 영자지인 ‘코리아 타임스’의 정인홍 기자 등도 자기 매체에 독도 조사 기사를 실었다.
조사단이 독도에서 뽑아 싣고 온 일본의 영토 표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박 선생은 물론이고 사진사로 동행했던 김한용 선생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전달한 것으로 안다”라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기자가 문의하자, 부산대 박물관은 “우리 박물관은 1960년대에 개관했기에 1953년엔 없었다. 그분들이 표주를 전달한 것이 사실이라면 박물관이 아니라 학교 측에 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박물관 소장 자료에 그 표목은 없다”라는 답을 보내왔다.
한국산악회가 독도에 설치한 영토 표석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산악회의 독도 조사와 영토 표석 설치는 일본에서도 관심을 끌었기에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일본 매체도 이에 대한 보도를 했다.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국이 뽑아간 영토 표주는 일본이 네 번째로 박아넣은 것이었다. 나가라함에 타고 있던 일본인들은 905정이 독도를 떠난 후 독도에 상륙했다.
1953년 10월 부산으로 돌아온 박병주 교사가 작성한 독도지형도와 국토지리정보원이 현대적인 기법으로 제작한 지금의 독도지형도(아래).
한국산악회 표석 제거한 일본
홍순칠씨가 이끈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조난어민위령비에 대한 기록은 남겨두었어도, 한국산악회의 영토 표석에 대해서는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한국이 일본의 영토 표주를 뽑아갔듯이, 바로 다음날 독도에 상륙한 일본은 한국산악회의 영토 표석을 뽑아간 것이다. 그러나 독도조난어민위령비는 손대지 않았다. 이 위령비는 계속해서 독도에 서 있다가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유실됐다.
한국산악회의 활동으로 독도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쥐게 된 정부는 이를 토대로 일본과 기나긴 협상을 벌여 1965년 독도를 뺏기지 않은 채 일본과 국교를 회복하게 되었다. 한국은 1953년 한국산악회의 활동으로 독도 영유권을 확인한 뒤 1954년 홍순칠씨가 이끄는 울릉도 제대군인들이 독도의용수비대를 만들어 독도에 상주하면서 지키다 1955년 말 경찰에 독도 방어를 인계함으로써 완벽하게 독도 영유권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냄비 근성’을 가진 국가다. 일이 터지면 요란하게 떠들다가 마무리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잊어버린다. 독도 영유권이 분명해지자 광복과 전쟁 전후 시기에 있었던 독도 영유권 다툼의 역사를 잊어버린 것이다. 1953년 일본이 떼어간 최초의 한글 영토 표석(한국산악회 영토 표석)과 1959년 사라호 태풍이 휩쓸고 간 독도조난어민위령비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다.
2005년 2월22일은, 일본 시마네(島根)현이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고지를 발표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해 시마네현의회는 2월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결정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직후 기자는 김한용 선생으로부터 1953년 한국산악회가 독도에 상륙해 일본의 영토 표주를 뽑고 한국산악회의 영토 표석을 설치하는 사진을 제공받아 ‘주간동아’에 공개했다.
그러나 김 선생은 독도 조사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한국산악회가 독도를 조사하게 된 배경과 조사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 이번에 만난 박병주 선생이 밝혀줌으로써 기자는 1952년과 53년 간의 긴박했던 독도 영유권 다툼을 복원할 수 있었다. 기자가 김 선생 사진을 공개한 얼마 후 ‘동아일보’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인 이화장에서 1950년 조재천 경북지사가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제막하는 사진을 받아 공개해 역시 큰 관심을 끌었다.
한국산악회 영토 표석을 철거해놓고 철거해도 좋으냐고 물은 경상북도의 공문.
일본의 다케시마의 날 지정으로 시끄러웠던 2005년의 8월15일은 광복 60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이날이 다가오자 경북도는 재빨리 한국산악회 영토 표석과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복원해 독도에 설치하는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2008년 7월30일 독도에 직원을 보내 그들이 복원한 한국산악회 영토 표석을 철거했다. 철거 이유는 이 표석에 알파벳 LIANCOURT가 쓰여 있다는 것 단 하나였다.
2008년 7월 미국 의회도서관이 독도를 가리키는 장서 분류 이름을 독도에서 리앙쿠르로 바꾸려 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국내에서 이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이 논란은 부시 대통령이 나서서 ‘없던 일로 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싱겁게 정리되었다.
그런데 경북도는 이 논쟁의 화살이 2005년 한국산악회 영토 표석을 복원한 자신들에게 향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한국산악회 표석을 철거했다. 그리고 700만원을 들여 LIAN COURT 대신 DOKDO, KOREA를 새긴 표석을 만들어 2009년 중 다시 설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경북도는 큰 실수를 하나 했다.
한국산악회의 영문이름을 바꾸는 것을 전제로 독도 표석 철거에 뒤늦게 동의한다는 내용을 담은 한국산악회 공문(왼쪽)과 표석 철거에 동의한 적이 없다고 밝힌 한국산악회의 공문(오른쪽).
이에 대해 경북도 담당 관리는 “공문을 보내기 전 한국산악회 측과 협의해 표석을 철거하고 새로 설치하는 데 동의를 받았다. 아시다시피 관공서는 결재받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공문 발송이 늦어져 먼저 표석을 철거하게 됐다”고 해명했다.
한국산악회 최홍건 회장은 처음 기자와의 통화에서는 “우리는 이사회를 열어 동의해주었다. 한국산악회의 영문은 COREAN ALPINE CLUB이니, KOREA ALPINE ASSOCIATION도 고유 영문으로 바꿨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보냈다”고 밝혔다. 한국산악회는 이사회의록을 공개한다. 기자는 한국산악회의 이사회의록을 모두 뒤져봤는데 어느 회의록에도 경북도의 표석 철거와 변경에 동의한다고 결의하거나 결정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최 회장이 이끄는 한국산악회가 경북도 공문에 대해 회신을 보낸 것은 사실이었다. 한국산악회 회신에는 최 회장 말처럼 COREAN ALPINE CLUB으로 바꿔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경북도 측은 이 회신을 8월21일 접수했다고 밝혔다. 이때는 이미 기자가 ‘주간동아’를 통해 “경북도가 한국산악회의 동의를 받아 독도에 있는 최초의 한글 영토 표석 복원물을 LIANCOURT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철거했다”고 보도한 다음이라, 한국산악회에서 논란이 일고 있었다.
그러자 최 회장이 이끄는 한국산악회는 경북도에 ‘왜 경북도는 우리의 동의도 받지 않고 독도 영토 표석을 철거했느냐. 우리는‘주간동아’기사를 통해 경북도가 독도 표석을 철거한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내용의 공문을 9월29일자로 경북도에 보냈다. 최 회장 측은 DOKDO, KOREA가 들어가는 표석을 새로 제작하는 데는 동의했지만, 기존 표석을 철거하는 것은동의한 적이 없다며 말장난 같은 공문을 보낸 것이다.
이에 대해 경북도의 관계자는 “우리는 분명히 한국산악회의 구두 동의를 받아 7월30일 이 표석을 철거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산악회와 경북도의 다툼은 리앙쿠르라는 단어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리앙쿠르는 국제 해도에 올라 있는 독도 이름이지, 일본의 이름이 아니다. 1953년 한국산악회는 국제해도에 리앙쿠르로 돼 있는 것이 한국의 독도라며 이 표석을 설치한 것인데, 이들은 거꾸로 해석해 이 사태를 빚었다.
독도 영유권을 공고히 하려면 우리는 독도를 지켜온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 역사는 잘한 것은 물론이고 잘못한 것도 밝혀놓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되짚어봐도 1953년 한국산악회가 리앙쿠르라는 단어가 들어간 한글 표석을 설치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이 표석에는 한국 최초로 독도를 측량했다는 역사적인 배경이 깔려 있는데, 보신주의 때문에 2008년의 경북도와 한국산악회는 이 표석을 철거했다.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우리 사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독도 포퓰리즘이다. 문제가 됐다고 해서 자초지종을 살펴보지 않고 역사를 파괴하는 나라는 바른 길을 갈 수 없다. 이제라도 독도 영유권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독도 사건 일지
1945년 8월15일 한국, 일본으로부터 광복
1946년 6월22일 연합군사령부, 지령 1033호로 맥아더 라인 선포
1947년 8월20일 조선산악회, 독도 상륙해 영토 말뚝 설치
1947년 9월 미군, 독도를 미공군기와 해군기의 폭격연습장으로 지정
1948년 6월 8일 미공군 B-29 편대 독도 폭격으로 한국 어민 14명 사망. 이후 미군 독도 폭격 연습을 중단함
1948년 8월15일한국, 미군정 끝내고 독립정부 세움
1950년 6월 8일 조재천 경북지사 독도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 세움
1950년 6월25일 6·25전쟁 발발
1950년 6월28일 서울 함락. 이후 부산으로 수도를 옮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해 환도(還都)
1951년 1월 4일 서울 다시 함락
1951년 3월15일 서울 재수복
1952년 1월18일 이승만 대통령, 평화선 선포
1952년 2월 미일행정협정 맺음
1952년 4월28일 일본, 미군정 끝내고 독립
1952년 5월23일 일본 외무차관, 중의원에서 독도를 미군 연습장으로 제공하겠다고 밝힘
1952년 6월말 일본 공무원 독도 상륙해 일본 영토 표주(標柱) 세움
1952년 9월17일 한국산악회, 독도 조사 위해 진남호 타고 부산 출항
1952년 9월22일 진남호, 독도 부근서 미군기의 독도 폭격 목격하고 울릉도로 회항
1953년 2월27일 미군, 독도를 더 이상 폭격연습장으로 쓰지 않겠다고 밝힘
1953년 6월25일 일본 공무원, 독도 상륙해 네 번째로 일본 영토 표주 세움
1953년 7월27일 6·25전쟁 정전
1953년 8월15일 한국, 서울로 다시 수도 옮김
1953년 10월11일 한국산악회, 독도 조사하기 위해 해군의 905정 타고 부산 출항, 울릉도 도착
1953년 10월13일 905정, 영토 표석과 울릉경찰서장을 태우고 독도로 출항했으나 일기 나빠 회항하다
일본 순시선 ‘나가라’함과 조우
1953년 10월14일 한국산악회, 905정 이용해 독도에 상륙, 각종 조사 작업을 함
1953년 10월15일 한국산악회, 독도 영토 표석 설치하고 울릉도로 철수
1953년 10월16일 나가라함 타고 온 일본 공무원. 한국산악회 영토 표석 철거함
1954년 4월 독도의용수비대 독도 들어가 상주하며 지킴
1954년 10월22일김종원 경북경찰국장 독도 방문 때 독도의용수비대 허학도 대원 추락사
1955년 12월30일 독도의용수비대, 독도 방어를 경북 경찰에 인계함
19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 체결
1965년 12월18일 한일기본조약 발효로 양국 국교 회복
2005년 2월22일 일본 시마네현, ‘다케시마(竹島)의 날’ 제정
2005년 8월15일 경북도, 한국산악회 영토 표석과 독도조난어민위령비 복원
2008년 7월30일 경북도, LIANCOURT라는 단어가 있다고 한국산악회 영토 표석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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