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의 고전인 ‘사기열전’에는 수많은 인물 유형이 있다. 예를 들어 ‘자객열전’에서는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의 원형을 볼 수 있고, ‘화식열전’(대부호에 대한 경제적 통찰)에서는 정주영이나 이병철을, ‘백기왕군열전’(군인의 삶)에서는 이순신이나 원균을 볼 수 있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이 있지만, 대체로 ‘사기열전’에 나오는 인물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 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위인들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 착안해 ‘사기열전’의 인물 유형으로 본 한국의 인물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자객열전’으로 첫 장을 연다.(편집자)
겨울나무는 앙상하다. 아직까지 가지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 하나가 바람이 불자 툭 떨어진다. 나뭇잎 한 장을 주워 들고 물어본다. 넌 어디에서 왔느냐? 누가 너를 떨어뜨렸니? 지난 가을 나무는 가지와 잎자루 사이에 떨켜를 만들어 나뭇잎으로 흘러가는 영양분을 차단했다. 잎을 떨어뜨리는 떨켜. 겨울을 나기 위해 나뭇잎은 나무를 떠난다. 대신 나무가 잘 산다. 이젠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을 도와주는 떨켜, 우리 인간 유형 중에 이 떨켜형이 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 ‘사기열전’에 나오는 자객열전의 영웅들을 나는 ‘떨켜 인간’이라고 부른다.
만주 벌판을 달리는 준마들
내 책상 위에는 안중근 장군의 휘호가 새겨진 작은 병풍이 있다.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과 같은 휘호 옆에는 단지(斷指)한 손도장이 찍혀 있다. 어진 이는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으면 몸이 묶이는 치욕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사마계주(사기의 ‘일자열전’에 나오는 인물)는 말했다. 안중근 장군은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테러리스트이지만, 우리 혹은 나는 안 장군을 어진 사람으로 본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장군처럼 세상을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절절하게 온 힘을 다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깨진 항아리를 연못에 던지듯, 온몸을 던져 자신의 목숨을 거부하고 세상의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세상을 움직이겠다는 말이 공허하게, 혹은 코미디처럼 들리는 세상이다. 사나이 대장부라는 말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 세상. 사내란 그저 월급 타고, 가족 부양하고, 착한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세상이다(그것 역시 보람찬 일이긴 하지만, 왠지 성에 차지 않지 않은가). 이제는 만주 벌판을 달리는 준마와 같은 사내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일산에 사는 늙은 선배는 한때 말했다. 만주 벌판을 달리는 말은 마구간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늙은 선배도 언제부터인가 술을 먹다가 밤 11시가 되면 마구간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마구간의 말이 되어버렸다. 이렇듯 세상과 사내들의 삶이 자잘하게 쪼개지고 무너지고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개념 자체가 바뀌어버려서인지, 우리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대의를 향해 길을 떠나는 삶 자체를 잊어버린 지 오래다. ‘자객열전’에는 만주 벌판을 달리는 준마와 같은 사내들이 있다. 책장을 넘기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나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다.
‘자객열전’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자객들이 있다. 모두 다섯 명의 자객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거사에 성공한 이도 있고, 실패한 이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은 성공과 실패 이상의 울림을 전한다. 그게 뭘까 싶었다.
열전에 처음 등장하는 자객은 노나라 장수 조말이다. 그가 날카로운 비수 하나로 전쟁에서 패해 잃어버린 땅을 되찾은 기묘한 사건이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조말은 노나라 장공을 섬겼는데, 제나라와 세 번 전투를 치러 모두 패했다. 노나라 장공은 수읍 땅을 제나라에 바치고 화친을 청했다. 당신이 강하니 우리 땅 좀 가져가고 전쟁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제나라의 환공은 이를 허락하고, 승리자답게 기분 좋은 술자리를 열었다. 그때 조말이 비수를 들고 뛰어올라, 환공의 목숨을 위협하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하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침범하는 건 가혹한 일이다.’ 비수로 일단 상대를 제압하고 약한 나라의 어려움을 겸손하게 이야기한 다음 간곡하게 부탁했다.
“군주께서는 이 점을 헤아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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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 하나로 땅을 되찾다
일단 살고보자는 심정으로 환공은 빼앗은 노나라의 땅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조말은 비수를 멀리 내던지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장군의 모습이 이러했다.
“북쪽을 향해 신하들의 자리에 앉았는데, 얼굴빛에 변함이 없었고 말소리도 조금 전과 다름이 없었다.”
허허, 기가 막힌 일이다. 조말의 간덩이가 과연 부었구나, 내가 비록 너의 비수에 잠시 위기를 맞았으나 모면했으니 이제 요놈 맛 좀 봐라, 칼 한 자루 가지고 나를 위협하다니, 뭐 이런 심정으로 환공은 화를 내면서 약속을 내던지려 했다.
그때 관중이 나서서 군주의 체통을 지킬 것을 부탁한다. 사나이가 한번 뱉은 말은 절대 돌리는 게 아니다. 그럼 당신은 천하의 인심을 잃게 된다. 소탐대실하지 말고 약속 지키라고 한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양국이 화친하는 자리이니 신하와 군주가 모두 모인 자리다. 이들의 입을 모두 막을 수도 없었다. 결국 갑작스럽게 상황이 종료되고 곰곰이 생각한 환공은 결국 사나이답게, 천하의 군주답게 노나라 땅을 돌려주고 돌아간다.
이 풍경은 한 폭의 동양화다. 이 정도 의리가 지켜지는 사회는 공자가 그리워한 저 요순의 시절과 무엇이 다르랴. 지금 전세계를 향해, 전 국민을 향해 국가 정상들끼리 한 약속도 돈 때문에 하루아침에 날려버린다. 이른바 실용주의란다.
사실 지금의 최첨단 정보시대와 비교해보면 조말의 자리는 밀실과도 다름없을 것이다. 대(對)국민 발표를 하고도, 은근히 말을 바꾸기 일쑤인 작금의 현실을 보자. 정치인은 말 바꾸기의 선수다. 이들에게는 부끄러움도 없다. 실용적인 면에서 어제 한 말을 오늘 바꾸기도 하고, 방금 말해놓고 머리로는 딴말을 준비하는 것 같은 가증스러운 얼굴들은 조말의 비수에 잠시 놀라 헛소리를 하긴 했지만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기 위해, 즉 올바른 정치를 위해 쓴맛을 감수하는 제나라의 멋쟁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긴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정치까지 갈 필요가 뭐 있나. 나나 너나 다 조말의 비수를 잃어버린 지 아주 오래이지 않은가.
조말이 죽고 나서 167년 오나라의 전제가 칼을 들었다. 오나라 당읍 사람인 전제는 오자서라는 뛰어난 인물의 눈에 띈 인물이다. 초나라에서 오나라로 피신 와 있던 오자서는 왕이 되고 싶어하는 공자 광에게 전제를 추천했다. 과연 오자서의 혜안대로 공자 광은 전제의 칼을 빌려 요왕을 제거하고, 왕이 되었으니 그가 합려다. 합려는 오나라의 24대 왕으로 재임하면서 초나라 신하이던 오자서를 재상으로, 그리고 손자병법의 손무로 하여금 군대를 조직하게 해서 결국 초나라를 공략하고 오나라의 세력을 중원으로까지 넓힌 왕이다.
요왕을 제거하기 위해 전제는 구운 생선을 요왕에게 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 생선의 뱃속에 칼이 들어 있었다. 수저가 닿을 자리에 놓인 생선에서 칼을 꺼냈으니 그의 거사는 거의 이겨놓고 싸운 거나 다름없었다.
차원이 다르기는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킬러들의 세계에서도 가장 고난도의 저격은 바로 칼이라는 얘기가 있다. 프랑스의 저격수 레옹이 마틸다에게 멋진 음성으로 남긴 말이다. 목표물에 다가서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수는 그림자처럼 목표물에 스며든다.
중국 역사가 사마천이 지은 ‘사기열전’.
‘사기열전’의 자객들은 프로가 아니다. 프로는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라 실용적으로 움직인다. 돈을 받아야 한다. 암살 대상에 따라 돈의 규모도 다르다. 다름 아닌 인간의 목숨을 가지고 거래하니 그들은 소인배이고 무뢰한이다. 하지만 자객들은 돈 거래를 천박한 짓으로 여겨서인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다름 아닌 명분과 의리, 한걸음 더 나아가 공자의 인(仁) 사상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 자객은 진나라의 예양이다. 전술한 자객들은 나름 깔끔하게 일처리를 했다. 하지만 진나라 사람인 예양은 지독하게도 운이 없거나 아니면 칼과는 거리가 먼 선비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오로지 선비의 지조를 세우기 위해 비수를 품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고치는 것이다. 선비가 지조를 지키는 데 전제조건은 자신을 알아보고 인정해주는 주군이 있다는 것이다.
예양은 진나라에서 범씨와 중항씨라는 두 주군을 섬겼다. 하지만 그들은 예양을 여느 선비와 다르게 보지 않았다. 예양을 알아본 주군은 바로 지백이었다.
지백은 조양자를 능멸했는데, 열 받은 양자는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마치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은 것처럼 군대를 모아 지백을 멸했다. 조양자는 지백에게 맺힌 한이 많았는지, 그의 두개골을 잘 모셔다가 옻칠을 예쁘게 해서 술잔으로 썼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예양은 일단 산속으로 숨는다. 그리고 자기를 알아준 지백을 위해 한 목숨 바칠 것을 각오한다. 예나 지금이나 죽기를 각오하면 못할 게 없다. 하지만 일지매처럼 뛰어난 칼 솜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억울한 주군의 원을 풀어주겠다는 일념으로 일단 몸에 비수를 품고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양자의 배에 칼을 푹 담글 생각을 한다.
두 마음을 품고 섬기는 자들이여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지백의 은혜를 받은 자신의 영혼이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단 성과 이름을 바꾸고 가벼운 경범죄를 지어 죄인이 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것이다. 선비 예양의 몸은 이미 지백과 함께 죽었고, 혼이 잠시 그 몸에 깃든다. 죄수의 신분으로 조양자가 하루에 한두 번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 화장실의 벽을 바르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열전에 의하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란 쉽고도 어렵다. 하늘의 보살핌을 받았는지, 아니면 영웅이 화장실에서 일보다가 급사하는 것이 모양이 좋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양자는 화장실 근처에서 불안감에 휩싸인다. 볼일은 급한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주변을 조사해보니 품 안에 비수를 감추고 있는 이가 있었다.
양자보다 주위에 있는 이들이 더 놀랐는지, 당장 목을 베라고 했다. 하지만 양자는 지백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는 초췌한 몰골의 예양을 보고 뭔가 깨달은 점이 있었다. 그는 너그럽게 예양을 풀어주었다. 예양이 의로운 사람이며 천하의 현인이라는 말을 자신의 주위에 있는 신하들이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외치면서 말이다. 즉 너희들도 예양의 이러한 지조를 닮아야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예양도 마음을 바꿀 것이라고 양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예양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근육이 움직이는 한 그는 복수의 화신이었다. 하지만 이미 얼굴이 팔렸고, 목소리까지 들켜버렸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는 얼굴과 목소리를 추하게 바꾼다. 온몸에 옻칠을 해서 문둥이처럼 꾸몄고, 숯가루를 먹어 목소리까지 탁하게 했다. 그러한 몰골을 아내와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자 예양은 미소 지었다. 이제 다시 한번 시도하자.
다시 복수의 길을 떠나는 데, 오직 한 친구만이 예양을 알아보았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면서 예양의 뜻과 마음을 아는 친구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기왕에 복수할 거라면 겉으로는 양자를 섬기는 척하면서 양자가 긴장을 풀고 가까이 할 때 일을 치르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 그는 예양의 끔찍한 몰골에서 죽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친구에게 예양은 이렇게 말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떠났다.
“예물을 들고 가 남의 신하가 되어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는 건, 두 마음을 품고 자기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이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내가 죽고 나서라도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주인을 섬기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양의 이 말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잘 만들어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그는 자신의 삶 너머를 보았다. 앞으로 자신처럼 살 사람들에게 전범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후배들에게 꼭 그렇게 하라는 명령조의 말씀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는 풍경이고 이미지다. 지금도 이 풍경은 서산의 놀에 떠오른다. 이 이미지는 저녁 하늘 놀처럼 붉고 어둡다. 그 부끄러움이 누천년의 세월을 이어오고 있다. 하여간.
예양은 양자가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거사를 도모했으나 결국 또 하늘의 도움을 받은 양자에게 들키고 만다. 그때 양자가 꾸짖는다. 왜 이토록 끈질기게 원수를 갚으려 하느냐. 너는 범씨와 중항씨를 섬긴 적이 있지 않는가? 지백이 그들을 죽였는데, 그때 너는 왜 원수를 갚지 않고 나에게만 이러는 거냐고 따져 물었다.
옷을 베어 원수를 갚다
그러자 예양은 범씨와 중항씨는 자신을 평범하게 대했지만, 지백만이 자신을 한 나라의 걸출한 선비로 대접했기에 그에 걸맞은 행동이 이러하다고 말했다. 몰골은 흉하지만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예양의 태도에 감탄한 양자는 울면서 예양을 참하려 하였다. 그때 예양이 말했다.
“전날 군왕께서는 저를 너그럽게 용서했습니다. 그 일로 사람들이 당신을 칭송합니다.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옷을 얻어, 그것을 칼로 베어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도록 해주십시오. 죽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제 마음속의 말을 털어 놓는 것뿐입니다.”
양자는 예양의 간청을 받아들이고 사람을 시켜 자신의 옷을 예양에게 가져다주도록 하였다. 예양은 그 옷을 칼로 내리치고 지백의 은혜를 갚았다고 기뻐하며 그 칼에 엎어져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나라의 선비들은 모두 울었다.
한국의 선비들에게도 이런 대쪽 같은 정신이 있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던 시절 고려의 두문동 전설을 예로 든다. 고려 선비들이 새 왕조인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두문동에서 나오지 않자, 태조가 불을 질러 그들의 지조를 시험했다. 그들은 두문불출했다. 그래서 모두 죽었는데, 그 선비들이 억지로 등을 떠밀어 울면서 그 두문동을 나온 선비가 바로 황희다.
선비들은 황희에게 너만은 살아 고려의 정신을 전해야 한다고 그를 내보냈다. 불타는 두문동을 걸어 나와야만 했던 황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뒷날 사육신도 이러한 선비의 부끄러움을 아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양이 비록 칼을 들어 자객 인물의 유형으로 분류되었지만, 열전에 기록된 행간의 의미를 보면 칼보다는 정신의 날이 더 날카로웠다.
때론 문장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베기도 한다. 무서운 문장이 있다.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문장은 어쭙잖게 입술만 나불거리는 사람의 혀를 베어버리는 힘이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잡한 인간들은 진짜 칼을 무서워하지만,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러한 칼날을 더 무서워한다.
예양이 죽은 지 40년이 지나 제나라 땅에서는 섭정과 그 누이의 장렬한 죽음이 있었다. 섭정 또한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다는 인물 유형이다. 그는 효자다. 옛 나라의 근본 사상인 충효의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섭정은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피해 어머니, 누이와 함께 제나라에서 개백정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최대한 신분을 낮추어 구설에 오르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 오빠에 그 누이
섭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은 엄중자다. 엄중자는 한나라 애후를 섬겼는데, 애후는 한나라 재상 협루와 사이가 나빠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래서 협루를 제거할 인물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섭정을 만나게 된다.
엄중자는 섭정을 찾아가 선비의 예를 갖추어 사귀고 막대한 황금을 주면서 섭정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했다고 한다. 물론 그 황금은 거사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감추었다. 효자 섭정은 기구한 사연으로 개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보고 과감한 투자를 하는 고위관리인 엄중자에게서 군자의 덕을 보았지만,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처지이므로 엄중자의 청을 거절했다. 그리고 섭정의 어머니가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자, 이번에는 자신이 엄중자를 찾아가 속마음을 물었다. 내 몸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
엄중자는 한나라의 재상인 협루라고 밝힌다. 하지만 그는 세도가로 경비가 삼엄하니 수레와 말, 장사들을 데리고 갈 것을 권한다. 하지만 섭정은 영민한 사람이었고, 엄중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객으로서 말했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가까이 있고, 지금 그 나라 재상을 죽이려 하는데, 그가 또 그 나라 왕의 친족이라면, 이러한 형세에서는 많은 사람을 써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많으면 생각을 달리하는 자가 생길 수 있고, 생각을 달리하는 자가 생기면 말이 새어나갈 것이며, 말이 새어나가면 한나라 전체가 당신을 원수로 여길 것이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엄중자의 걱정을 뒤로하고 홀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단숨에 관청의 단청에 앉아 있는 협루를 찔렀다. 협루의 부하들이 섭정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수십명이 섭정의 칼날에 베어졌다. 그런 뒤 섭정은 자신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죽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한나라에서는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자객의 신분을 확인하려 하였다. 섭정의 시체는 시장통에 전시됐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섭정의 누나 섭영이 찾아와 울부짖었다.
이미 엄중자와의 만남을 알고 있던 그녀는 엄중자가 섭정을 알아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장통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어찌 이 위험한 인물을 안다고 하느냐고 염려하였다. 하지만 섭정의 누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소리로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동생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처참하게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동생이 선비로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섭정의 죽음을 애도하다 그 자리에서 자신도 목숨을 놓아버렸다. 한나라 주위에 있던 진나라, 초나라, 제나라, 위나라에서는 모두 섭정만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누이도 장한 여인이라고 애도했다.
“장사가 한번 떠나면…”
이상 소개한 4인의 자객은 하나같이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렸다. 그들은 살아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자객의 죽음은 때론 주군의 한을 풀어주기도 하고, 주군의 뜻을 이루기도 한다. 이들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 지금 시대에 이러한 방식으로 뜻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칼로써 자신을 뜻을 전하는 시대가 오지 않기를 당연히 바란다. 칼로써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말이 되고, 그 말이 행동이 되어 예의가 갖추어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싶어한다. 때론 어설픈 폭력이 속 시원하다는 이도 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단적으로 그러한 심정을 대변한다.
개인사에서도 그러하다.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그때 자객들을 생각하면 알량한 개인적인 원한을 가볍게 여길 수도 있다. 운전을 하다가 싸우는 사람들, 돈 거래를 하다가 주먹다짐을 하는 사람들,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원한은 옛 자객들의 처연한 행동에 견주면 티끌 같다. 거기에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한다.
진시황릉 병마용 1호갱. 위나라 사람 형가는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진시황을 암살하러 떠났다.
섭정이 죽고 나서 220년 후에는 진시황의 옷자락을 베었던 비운의 영웅 자객 형가가 비수를 품었다. 형가는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떠나면서 역수라는 강가에 서서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는 강가의 비가(悲歌)로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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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소리는 소슬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장사는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바람, 강, 사람, 그리고 운명을 품고 형가는 역수를 건넌다. 과연 그의 노래대로 길을 떠난 자객은 뒤를 돌아보지도 돌아오지도 않는다. 이들의 모습은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이다. 한번 흘러간 강물은 바다로 나아가 영원으로 사라진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인물들은 계속 등장한다. 자객 열전의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는 형가를 손꼽는다. 그의 상대가 바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한 편의 고대 서사시를 이루었다. 장엄하고, 격정적이고, 문학적이면서 함께 음악적이다. 형가가 진시황을 만나러 가는 길은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의 길이었다. 그래서 이 노래에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보편적인 정서와 동시에 형가라는 한 특출한 인물의 비애와 진시황이라는 저 거대한 바다의 세계가 같이 녹아 있다.
약한 자의 비수를 조심하라!
형가는 위나라 사람이었다. 당시 진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점점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격동기에 뛰어난 인물들은 큰 뜻을 이루거나 대부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형가는 책읽기와 격투기 검술을 좋아했는데 실력이 뛰어났다. 성격은 매우 조용하고 단아했다. 누군가 시비를 걸거나 성을 내면 조용히 사라져 다시는 만나지 않는 성격이었다. 나도 그러한 성격이어서 잘 아는데 이런 사람들은 많이 참는 스타일이다. 말이 없으니 참을 일도 많았을 것이다. 술을 잘 마시거나 담배를 절대 끊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그는 축(?)을 잘 타는 명인 고점리와 친구로 지냈다. 형가는 고점리와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 노래하다가 문득 서럽게 울기도 하기도 하였다.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는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형가의 눈물은 참고 또 참고 있는 자의 눈물이기에 마치 지표를 뚫고 나오는 용암과도 같이 뜨거운 것이었다.
“형가는 비록 술꾼들과 사귀어 놀기는 했지만, 그의 사람됨이 신중하고 침착하여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제후국을 떠돌면서 한결같이 그곳의 현인이나 호걸, 나이 많고 덕을 갖춘 사람들과 사귀었다.”
형가는 연나라 태자 단을 만나 거사를 결심한다. 단은 어린 시절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는데, 거기서 진나라 왕인 정을 만나게 된다. 조나라에서 태어난 정이 어린 시절을 조나라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두 어린아이는 매우 친하게 지낸 모양이다. 이때의 우정이 훗날의 원한이 되었다. 단은 장성하여 다시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진나라의 왕이 정이었다. 그때 단의 마음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친구인 정이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진나라의 정, 훗날의 진시황은 너와 나는 인간의 질이 다르다는 식으로 박정하게 대했다. 이미 천하를 가질 정에게 어린 시절의 우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좌우간 무지하게 모멸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억울하면 출세해야 한다는 유행가 가사가 있는 것인가?
하여간, 연나라로 도망쳐 온 단은 이를 갈면서 수모를 당한 복수를 결심했다. 하지만 이미 진나라는 중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단은 자신의 원수를 갚아줄 사람을 찾았으나, 그 대상이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중원을 통일할 진나라의 정이었으니 그게 어찌 쉬운 일인가?
이미 진나라 정은 기운이 최고조에 다다라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원한에 눈이 멀면 이성이 마비되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필요한 것이 현명한 신하다. 태자 단에게는 그러한 신하가 있었다. 태부 국무가 단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다는 원한 때문에 진나라 왕을 화나게 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대신 깊이 생각한 다음에 비책을 의논하고 권한다.
그래 이게 인생이고, 세상이다.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단은 비수를 품는다. 약한 자는 항상 비수를 품게 마련이다. 세상의 강한 자여, 약한 자의 비수를 조심하라!
스스로 목을 베어 건네다
하지만 정국은 계속 태자 단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진나라의 장군 번오기가 연나라로 망명했다. 만약에 그를 받아준다면 진나라를 화나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태자 단은 자신의 품으로 날아온 가여운 울새와 같은 장군을 품으려 한다. 태부는 절대 받아들이면 안 된다면서 번오기를 받아들일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굶주린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고기를 던져놓는 격이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투항해 온 장수 번오기를 품으려 하는 맘 좋고 심약한 태자 단에게 태부는 말했다.
“위태로운 일을 하면서 안전함을 찾고 재앙을 만들면서 복을 구하려 한다면 계책은 얕아지고 원망만 깊어진다.”
그래도 단은 요지부동이었다. 현인의 눈에는 바로 앞의 불행이 확연하게 보이는 법이다. 태부는 자신의 지혜와 용기로는 감당되지 않는 일이라 전광 선생이라는 현인을 단에게 소개한다. 태자 단이 전광 선생을 만나면서 진시황 암살이라는 계획이 무르익는다.
태자는 전광 선생을 만나 연나라와 진나라가 함께 설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전광 선생은 자신은 한때 하루에 천리를 달리던 준마였지만 이미 늙고 쇠약해진 노둔한 말이라면서 광야를 달릴 수 있는 준마인 형가를 추천했다.
태자 단은 전광 선생에게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간곡하게 당부했다. 전광 선생은 심약한 태자의 걱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광은 몸을 낮추고 형가를 찾아 가 간곡하게 태자 단의 준마가 되어줄 것을 당부하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비밀 유지에 대한 태자의 염려를 덜어준 것이었다. 형가는 즉시 태자를 찾아가 전광 선생의 죽음을 전했다. 태자는 전광 선생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형가가 자리에 앉자 태자는 자리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그 자리에서 태자 단은 말했다. 진나라 정을 찔러 죽여 진나라 내부에 분란이 일어나게 한 다음 다른 제후국들이 합종한다면 진나라를 깨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이 일, 즉 진나라 왕을 제거할 수 있는 영웅을 만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당신이 그 일을 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의 말이었다. 형가는 자신은 그러한 일을 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면서 몇 번 거절하다 끝내 허락했다.
형가가 진나라로 길을 떠날 때 가지고 간 것은 번오기 장군의 목과 연나라의 요지인 독항의 지도였다. 독항은 일찍이 진시황이 눈독을 들이던 땅이었다. 두 가지 덕분에 진나라 왕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태자 단은 당연히 번오기 장군의 목을 줄 수 없다고 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번오기 장군은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어 형가의 뜻에 따랐다.
안중근의 ‘장부가’
형가의 거사에는 이미 두 ‘인간’의 죽음이 있었다. 전광 선생과 번오기 장군의 목숨이었다. 이 둘은 형가의 성공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태자는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서 부인의 비수를 황금 100근을 주고 구입했다. 독약이 발라진 그 칼날은 살짝 스치기만 해도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었다.
비수와 두 사람의 목숨, 그리고 기름진 땅까지. 진시황에게 다가가기 위한 준비가 다 되었다고 태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형가는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온다면 길을 떠날 일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장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심한 태자 단이 형가에게 큰 실수를 한다. 다른 뜻이 있어 주저하는 것이냐, 즉 겁이 나는 거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형가는 단호하게 태자를 꾸짖었다.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비수 한 자루를 가지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진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다음, 태자가 그런 말을 하니 당장 떠나겠다면서 연나라의 진무양이라는 얼치기와 함께 길을 떠난다. 형가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더불어 온 우주가 흔들렸다.
이 대목에서 나는 형가 거사의 위태로움을 보았다. 1%가 모자란 것이었다. 완벽하지 않다면 진나라 왕을 벨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대국의 통일이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전주곡이었는지도 모른다. 형가는 슬픈 곡조인 우성으로 ‘장사가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노래를 부른 다음 진나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고 전한다.
대한제국의 안중근 장군도 이러한 길을 걸었다. 하얼빈 김성백의 집에서 머물렀던 거사 전날, 안중근은 하얼빈 역을 바라보면서 ‘장부가’를 적었다.
“장부로 세상에 나와 그 뜻이 크다
때가 영웅을 만들어내니 영웅 또한 때를 만들 일이다.
천하를 내려다보니 어느 날에 큰일을 이룰 것인가
동풍이 점점 차가운데 장사의 의기가 끓어오르는구나.
기개를 떨쳐 가나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고야 말 것이다.
쥐 도둑 이등박문이여 어찌 네 목숨에 비길까
어찌 이에 이를 줄을 누군들 알았을까
세상일이 원래 그러한 것,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루자.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다
만세 만만세여 대한 동포다.”
정확히 100년 전 10월26일이었다. 이 노래를 부르기 한 달여 전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항구에서 엔치야에 머물던 친구들과 작별했다. 친구들이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안 돌아올 것이다.”
형가에 근접한 이봉창
그때만 해도 장군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야 비로소 이토 히로부미의 방문 사실을 알았고 거사를 준비한 것이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이다. 안중근 장군의 마음과 하늘의 뜻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의 거사는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말대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형가와 안중근은 모두 중국 땅에서 거사를 감행했다. 이후 또 다른 자객인 이봉창이 대단한 거사를 감행했다. 일본 천왕의 암살을 감행한 것이다. 그는 형가와 가장 근접한 인물이다. 절대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거사에 실패했다는 점에서다. 이렇듯 우리는 열전에 나와 있는 인물 유형을 통해 사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늘의 별자리와 같은 것이다.
광막한 우주에 떠 있는 별자리와 같은 인물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빛나고 있는 별인가? 혹은 어둠인가? 열전은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진나라 왕 정은 과연 형가의 예측대로 기뻐하면서 형가를 맞았다. 왕을 향해, 아니 적을 향해 나아가는 형가와 부사인 진무양, 이때 형가의 염려가 현실로 나타난다. 연나라의 장사라고는 하지만 담력이 부족한 진무양이 얼굴빛이 바뀌면서 덜덜 떨기 시작한 것이다. 거사를 감행할 그릇이 아니었던 것이다. 첫 번째 불길한 조짐이었다. 하지만 형가는 여유롭게 그 위기를 넘기고 왕에게 지도를 들고 다가간다. 지도에는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환한 얼굴로 왕이 지도를 펼치자 비수가 드러났다. 그 찰나에 형가는 왼손으로는 왕의 소매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비수를 쥐고 왕을 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왕이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소매만 떨어졌다. 왕은 칼을 뽑으려 했지만 칼이 길어 뽑지 못하고 칼집만 잡았다.
왕은 도망쳤다. 형가는 뒤를 쫓았다. 어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옆에 있던 지혜로운 신하의 일갈이 왕을 살렸다. 칼을 등에 지고 뽑으십시오. 왕은 칼을 등에 지고 칼을 뽑아 내리쳐 형가의 왼쪽 다리를 베었다. 쓰러진 형가는 비수를 왕에게 던졌지만, 한참 혈기방장한 왕은 비수를 피하고 비수는 궁의 구리 기둥을 맞고 튕겨져 나왔다. 왕은 쓰러진 형가를 난자하고, 형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형가는 “당신을 사로잡아 위협을 해서 태자에게 보답하려 했다”면서 준엄하게 진나라 왕을 꾸짖었다.
거사가 실패하자 호랑이에게 상처를 입힌 격이었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진나라 왕 정. 진노한 그는 군사를 동원해 연나라를 공략했고, 태자 단은 동쪽으로 달아났다. 5년 후 연나라는 망했다. 이듬해 진나라 왕 정은 천하를 통일하고 스스로 ‘황제’라고 불렀다. 중국 고대의 신 황제, 신들의 왕인 황제가 땅 위에 나타난 것이다.
열전은 형가의 죽음 이후 또 다른 자객이자 예인인 고점리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고점리는 형가와 어울려 노래하고 춤을 추던 예인이었다. 뛰어난 예인이었기에 진시황은 그가 형가의 친구임을 알면서도 가까이 두었다. 단 그의 두 눈을 멀게 해 멀리서 연주만 하게 했다.
열전엔 이렇게 적혀 있다.
“진시황은 고점리의 뛰어난 축 타는 솜씨를 아까워하여 용서하는 대신 눈을 멀게 했다. 그러고 나서 고점리에게 축을 타게 했는데, 그 소리를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진나라 시황은 그를 점점 가까이하였다. 고점리는 축 속에 납덩어리를 넣어두었다. 진나라 시황 곁으로 가까이 갔을 때 축으로 내리쳤지만 시황은 맞지 않았다. 진나라 시황은 결국 고점리를 죽였다. 이 일로 해서 진시황은 죽을 때까지 제후국에서 온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자객이여, 너는 누구냐”
중국의 하얼빈에서는 해마다 10월26일이 되면 총성이 울린다. 이 울림은 어디에서 오는가? 1909년에는 하얼빈의 대합실에서 울렸고, 그부터 70년 후인 1979년에는 서울의 궁정동 안가에서 울렸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자객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박정희라는 인물보다는 유신정권이라는 망령을 저격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권총 또한 그러하다.
이들이 손에 들고 뜻을 펼친 무기는 총이다. 총알은 빠르게 나아가 상대를 절명시키는 무기다. 총 이전에는 칼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총성과 비수의 음률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으로 전이된다. ‘운명교향곡’ 도입부의 강렬한 엑스터시는 바로 이러한 운명에 대한 음악이다. 음악과 비수와 총성, 겨누는 자와 도망가는 자와 쫓아가는 자의 모든 동작이 ‘운명교향곡’에 담겨 있다.
형가를 읽으면서 베토벤을 들으면, 동서양의 두 정신이 하나의 강물로 굽이쳐 흐르고, 천둥 번개가 치고, 때론 조용히 호흡하면서 저 화엄의 바다로 나아가는 모양이 보인다. 음악이 눈에 보인다는 건, 무슨 말인가. 그 음악에 자신의 이야기가 담기기 때문이다. 그 음악에 사람의 이야기가 있어 눈을 감아도 선연하게 떠오른다.
먼 길을 달려와 숨이 차다. 하지만 나의 마음에는 지금도 만주벌판을 질주하는 힘찬 영웅들, 그 준마들의 말발굽소리가 메아리쳐 온다.
그리고 자객들의 칼에 쓰러지거나 모멸을 당한 인물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셰익스피어가 표현한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가 자객을 바라보는 위대한 인물들의 극적인 심정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믿었던 이 세상이 나를 찌르는구나. 세상이여 너는 누구냐? 자객이여, 과연 너는 누구냐?
▼ 다음 회 예고
첫 회를 ‘자객열전’으로 선택한 것은 2009년이 안중근 의사의 거사 100주년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안중근 의사야말로 자객의 대표적인 유형입니다. 다음달에는 ‘사기열전’의 저자 사마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옛 책에는 저자의 자서(自敍)를 맨 뒤에 붙였습니다. ‘사기열전’에도 맨 마지막에 사마천 자신의 기록이 붙어 있습니다. 사마천에 대한 기록은 ‘한서’에도 남아 있습니다. ‘사기열전’과 ‘한서’를 전거로 글을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