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라는 예술 장르의 기능은 복합적이다. 재미와 오락을 안겨주는가 하면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된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좋은 영화는 관객의 상처 받은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료한다. 이른바 시네마 테라피(Cinema Therapy)다. 정신의학계에서는 이를 심리치료에 응용하고 있다. 지난 1년간 ‘신동아’에 ‘영화 속 위기의 사랑’을 연재했던 영화평론가 강유정씨가 2009년 신년호부터 시네마 테라피에 착안해 새로운 영화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 첫 번째 주제는 아버지다. 전통적 권위와 존재감을 상실하고 기능적 인간, 현금지급기로 전락한 아버지들의 상처를 다룬다. (편집자)
‘우아한 세계’
‘아버지’란 어떤 존재일까? 1980년대 학번 세대에게 ‘아버지’는 나쁜 것만 물려주는 보수의 대명사였다. 장정일은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고 외치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을 거부했고, 다른 작가들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제적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가르친 아버지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우며 자란 아이들에게 거부해야 할 인습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1990년대 후반 갑작스레 닥친 IMF 구제금융사태였다. IMF 사태를 통해 아버지는 강해서 무너뜨리고 싶은 존재가 아니라 너무도 약한 존재로 재조명되었다. 구조조정이라는 한파에 의해 직장에서 밀려나고, 어머니 위주로 재편성된 새로운 가족 환경에서 일하지 않는 아버지의 자리는 급격히 축소되었다. 아버지의 권위는 빠른 시간 안에 사라져버렸다. 아버지 노릇은 필요하지만 아버지의 권위는 거부당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우리에게는 낯선 아버지 몇 명이 더 등장했다. ‘기러기 아빠’라고 불리는 아빠, 돈 벌어다주는 기계, 아이들의 성공을 위해 혼자 밥 먹고 다니는 아버지. 자식들에게만큼은 최상의 교육조건을 마련해주고 싶은 ‘아버지’들은 스스로 자취생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지금, 2009년 아버지의 모습은 또 어떻게 달라질까? 최근 한국 영화에 나타난 ‘아버지’들을 통해, 비슷하지만 또 다른 역경 앞에 놓인 아버지들을 호출해본다.
‘우아한’ 가족과 ‘비루한’ 아버지
다 늘어진 러닝셔츠를 입은 남자가 텔레비전 앞에서 바닥에 흩어진 라면을 줍고 있다. 남자의 등 뒤에 놓인 50인치 tv속에는 유기농 식탁, 미소를 머금은 아이들, 스프링클러 물빛이 가득 차 있다. 미국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멋진 풍경에서 추방된 한 남자가 관객처럼 앉아 그 여자와 아이들을 바라보며 실실거리고 있다. 그는 간혹 훌쩍거리기도 한다. 브라운관 속 그들과 너무 다른 식사를 하는 이 남루한 남자, 그는 누구일까.
‘이대근, 이댁은’
한재림 감독의 영화 ‘우아한 세계’는 기러기가 되어버린 우리 시대 불쌍한 아버지들의 초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부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형님’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40대 남자 강인구. 조직 내 서열 2, 3위를 다투지만 예상과 달리 그의 생활은 초라하고 시시하다. 이 남자를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남자를 남편 혹은 아버지라고 부르기 꺼리는 가족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천박한 말투에 이상한 행동, 그리고 남이 봐서 너무도 뻔하게 나쁜 직업인 깡패 짓을 하는 이 남자를 부끄러워한다.
‘생활 누아르’라는 부제에 걸맞게 조폭 강인구에게 전쟁터는 바로 일상이다. 집 한 칸 마련해주지 못한다며 아내는 바가지를 긁고, 무식한 아버지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딸은 저주를 퍼붓는다. 꼬박꼬박 체류비와 학비를 챙겨줘야 하는 유학생 아들에게 아버지는 숨길 수 있을 만큼 숨기고 싶은 치부일 뿐이다.
심각한 것은 남편과 아버지라고 부르기는 꺼리면서도 그가 벌어온 돈은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 강인구는 그들에게 필요한 재화, 돈을 벌어오는 것이야말로 아버지의 도리라고 믿는다. 자신의 불법적이며 천박한 깡패 짓이 가족을 먹여 살리는 대의명분으로 납득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강인구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이 지겨운 조직 폭력배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 먹고살기 위한 일이라는 변명 속에 범죄는 무마되고 폭력은 합리화되는 것이다.
‘베사메 무초’
무책임한 아버지의 뒤늦은 후회
우리 시대 아버지가 살아가는 생활전선이란 조폭 아버지의 싸움판과 다를 바 없다. 칼 대신 펜을 들고 각목 대신 운전대를 잡았을 뿐, 40대 아버지의 일상은 강인구의 전쟁터보다 나을 것이 없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카드 명세서에 서명하는 아내를 위해, 아이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전쟁 같은 삶의 현장에서 아버지는 조금씩 소루한 존재로 사라져간다. ‘우아한 세계’는 전쟁 같은 삶에서 돈을 벌어 가족을 건사하는 지리멸렬한 세상에 대한 풍자극처럼 보인다.
범죄자 강인구가 가족을 내세워 폭력을 정당화하듯 수많은 아버지가 가족을 명분 삼아 불의를 자행한다. 가족의 윤리보다 가족의 생존을 중요한 가치로 선택할 때 아버지는 현금지급기로 전락하고 만다. 현금지급기는 가족사진에 끼어들 틈이 없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아버지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돈을 벌어다주지 않고 윤리적 태도를 보여주는 아버지는 무능하다고 비판받는다. 한편 돈을 벌어다주는 유능한 아버지가 돈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내세울 때 아이들은 속물로 그에게서 거리를 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버지, ‘우아한 세계’는 그 불쌍한 아버지들의 초상이다.
‘우아한 세계’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해주고 싶은 최근의 아버지상(像)을 대변한다. 그런데 우리 부모 세대의 아버지는 어땠을까, 과연 그 아버지들은 아들들을 어떻게 키워냈고 지금은 또 어떤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갈까.
여기,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노인네가 뒤뚱뒤뚱 논두렁을 걸어가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노인의 모습이라기보다 1960년대 기록사진에서 뛰쳐나온 듯한 모습이다. 그의 곁에 있는 아내의 모습도 마찬가지. 기름으로 곱게 가름한 쪽찐 머리, 언젠가 흑백사진 속에서 본 듯싶은 할머니의 모습 그대로다.
이대근이 오랜만에 주인공을 맡은 영화 ‘이대근, 이댁은’은 독특한 작품이다. 고희가 된 노인 이대근은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적적한 나날을 보낸다. 그나마 도장 파는 일과 족발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가 전부. 자식이 셋이나 있다지만 그의 곁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만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지친 채 잠든 노인 앞에 고급 승용차가 등장하고, 노인은 자식들을 만나러 어디론가 향한다.
지나치게 환한 조명 아래 펼쳐진 집안 풍경은 어딘가 무대처럼 낯설고 기이하다. 큰아들 내외, 작은딸 내외의 등장 역시 연극적이다. 무대에 등장하고 퇴장하듯 그들은 적절한 타이밍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말을 타고 들어오는 손자나 택시기사 옷을 입은 목사 사위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 영화는 이 어색한 풍경의 진실을 밝히면서 완만하던 호흡을 숨차게 밀어붙인다.
아버지는 강한 존재인가?
영화의 마지막 3분의 1을 관통하는 가쁜 호흡은 반전이라고 부를 법한 비밀로 가득 차 있다. 중요한 것은 반전의 내용이 무대 위 연기만큼이나 환상적이라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을 길에다 버린 아버지는 이제 노인이 돼 집으로 돌아와 자식들의 애정을 간구한다. 아버지로서 아버지 노릇을 단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이 남자가 인생의 뒤안길에 들자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 ‘이대근, 이댁은’은 마초적 남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이대근을 기용해 자신만의 삶을 살았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아버지들, 그러니까 할아버지 세대의 초라한 노년을 그려내고 있다. ‘우아한 세계’의 그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 자신을 잊고 산다면 ‘이대근, 이댁은’의 아버지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가족을 등한시 여긴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세대들에게 가족은 내버려두어도 대략 건사되는, 굳이 애정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낳아놓으면 대략 성장해가는 그런 대상으로 압축된다.
‘이대근, 이댁은’에 조영된 왜곡된 가족상(像)은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 간의 충돌과 갈등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기에 아들의 애정을 요구하고, 아들은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아니기에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한다. 이 불행한 가역반응 속에서 관계는 틀어지고 외상은 깊어진다. 가족이기에, 그러니까 가까운 사람이기에 생겨났던 아픔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각인되는 셈이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노후문제 또한 이런 맥락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이대근, 이댁은’의 아버지는 허랑방탕한 세월을 보내고 뒤늦게야 아들 세대들에게 사랑과 용서를 호소한다. 이는 두 가지 정도의 달라진 세태를 보여준다.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윤리적 공경이 이제는 필연적 의무사항이 아니라는 점이며, 둘째는 아버지가 그 이름만으로 권력이나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폭력적이며 권위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지만 당신들은 정작 그럴 수 없는 노인 세대에게는 답답한 상황임에 분명하다. 가족이라는 윤리로 보호받지 못하는, 과거의 잘못을 소급해서 점검당해야만 하는 이름으로 아버지가 축소된 셈이다.
‘행복을 찾아서’
경제 능력을 거세당한 아버지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이러한 아버지상이 동양적인 혹은 한국적인 아버지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들을 위해 성공한 남자를 그린 ‘행복을 찾아서’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부정(父情)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행복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크리스 가드너는 아메리칸드림의 성공신화이기도 하지만 아들을 위한 사랑으로 자신의 성공을 이끌어낸 남자이기도 하다. 1980년대, 의료기 세일즈맨인 남자는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지만 수입은 변변치 않다. 경제적 문제로 투덜대던 아내마저 떠나버리자 이 남자는 다섯 살 된 아들을 혼자 돌보게 된다. 그들은 노숙을 하며 힘들게 보내지만 아들에게만큼은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한다.
영화는 노숙자에서 백만장자가 된 한 남자의 인생 역전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직장에서 쫓겨나고 아내에게도 버림받은, 그러니까 불황기의 남자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경제적 능력이 박탈된 남자는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그는 이 불황과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을 이뤄낸다. 영화가 주인공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아니라 아들과 함께 시련을 겪는 과정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불황기의 가장, 직장을 잃고 가정에서 떨어져 나온 실패한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 이곳 한국의 상황에서도 결코 낯설지 않다. 그리고 한때 이러한 모습은 매우 보편적인 모습으로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 속에 등장했다. 지난 불황기의 아버지들은 ‘해피엔드’나 ‘베사메 무초’ 같은 영화 속에서 무능한 만큼 잔혹한 대접을 받아야만 했다.
‘마이 파더’
이러한 점은 아내를 거래의 대상으로 내세워야만 하는 ‘베사메 무초’에서도 발견된다. 아내, 가족을 지켜낼 수 없는 아버지. 경제적 능력을 거세당한 아버지는 설 곳이 없어진다. 씁쓸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버지에게 바로 그 능력을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해. 딸에게는 반드시 엄마가 필요해. 자식이라고 부르는 아이들이지만 각자의 성 역할에 맞는 다른 교육과 윤리가 있다는 뜻일 게다. 아들이 없는 아버지는 함께 목욕탕에 오는 부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목욕탕은 한국적 정서에서 부자 혹은 모녀가 스킨십을 통해 말없는 대화를 나누는 공간으로 인식되곤 한다. 재능 있는 연출가이자 감독인 장진이 ‘아들’이라는 영화에서 목욕 장면을 중요한 상황으로 제시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 ‘아들’은 제목에서부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뜨거운 애정을 암시한다. 강도 살인죄로 복역하고 있는 무기수 이강식. 그는 15년 만에 단 하루의 외출을 허락받는다. 그에게 허락된 외출의 사유는 다음과 같다. “세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두고 와야 했던 아들, 아들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라는 고백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기능이 아닌 존재로서의 아버지
영화는 시종일관 아들을 만나러 가는 아버지와 난생처음 아버지를 만나는 아들의 독백으로 진행된다. 그들은 함부로 자신의 내면을 털어놓지 못하고 그 내면을 관객에게 전달해 공감을 형성해간다. 세 살배기라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 못하는 아들과 커버린 아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는 아버지의 만남이란 무릇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랑과 정은 함께한 시간 위에 쌓인 추억으로 교환되는 공감이니 말이다.
‘아들’이 관객에게 제공하는 공감대는 혈육의 정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기수에게 단 하루의 외출 시간이 주어진다면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너무도 당연히 아들과의 만남이 떠오른다. 영화는 어색한 장벽 너머로 더듬더듬 쌓아가는 모습으로 결국 다시 헤어져야만 하는 부자간의 정을 그려낸다. 생물학적인 혈육으로서의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라 추억을 함께한 가족으로서의 부자가 창조되는 것이다. 그들은 밥도 함께 먹고, 목욕도 함께 하고, 같이 달리고 웃으면서 진짜 아버지와 아들이 된다.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아들을 만들어냈듯이 하루라는 짧은 시간 안에 그들은 진짜 감정을 조형해간다.
이 감정은 정반대의 경우에도 통용된다. 미국에 입양된 한국인 제임스 파커는 친아버지를 찾아 한국에 오게 된다.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 없는 한국 이름 공은철을 선사해준 아버지를 찾아서 말이다. 그런데 22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사형수다. 자신의 근원이 어떤 것일까 궁금했지만 설마 사형수인 줄은 몰랐던 공은철, 그에게 이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일은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용서하고 이해한 것 이상으로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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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헤니가 주연을 맡았던 ‘마이 파더’는 장진 감독의 영화 ‘아들’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초라하고 남루한, 아직 숨기고 싶은 아버지를 지닌 두 아들. 그들은 따뜻하게 그들의 아버지들을 품어준다. 아버지라는 존재와 진정 나눠야 할 것은 바로 모든 것을 초월한 이해와 관용이라는 듯이 말이다. 정작 아버지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한다는 그런 이해와 관용의 태도가 아닐까? 기러기, 현금지급기, 울타리와 같은 기능적 존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존재 자체의 존재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