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백년을 이어온 서양 주식시장에는 크게 두 가지 계보가 있다. 벤저민 그레이엄에서 워런 버핏으로 이어지는 가치투자파가 한 축이고, 제시 리버모어에서 터틀트레이더에 이르는 추세추종 세력이 다른 한 축. 그들의 투자 철학은 지금 같은 주식 대폭락기에 더 빛을 발한다. 국내에도 양대 세력을 대변하는 현자가 있었다. 반도체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인생 말기에 ‘몰빵’ 투자를 결정한 이병철이 전자라면 굶을 때 굶더라도 일단 포식을 하고 보는 ‘늑대식’ 투자를 한 정주영이 후자다.
한 평생 가치 투자로 일관한 이병철(왼쪽)과 현실을 추종한 정주영.
현재의 금융위기는 월가에 영혼을 판 수학 천재들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월가는 이미 10년 전에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의 파산이라는 뼈아픈 경험을 한 바 있다. 이 헤지펀드는 전설적인 채권 트레이더 존 메리웨더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런 숄즈와 함께 만든 것이었다. 적어도 이들의 경력만 보자면 투자자들에게 절대 실패할 수 없을 듯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일반인은 이해하지도 못할 수학 모형을 바탕으로 수익의 신기루를 보여준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는 결국 이름값에 걸맞은 천문학적 손실을 남긴 채 파산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후 10년간 이 교훈은 월가에서 전혀 반성의 기회가 되지 못했다. 이후에도 수학 공식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신앙이 지배했지만 결국 거품이었음이 확인됐고 대폭락의 고통을 일반 납세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들 월가의 지배자들이 빠진 오류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첨단 금융기법이 세상을 진보시킬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노벨상이라는 최고 권위와 화려한 이력이 만나 투자자들을 현혹했고 거기에 자신도 속아 넘어갔다. 이런 기술에 대한 맹신이야말로 현재 겪고 있는 금융위기의 주범이다.
하지만 시각을 달리해 보면 주식시장의 역사엔 뚜렷한 두 가지 철학적 계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400년간 진화해온 투자기법의 정점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워런 버핏으로 대표되는 가치투자와 제시 리버모어를 시조로 하는 추세추종매매다. 이들은 상승장에서 거대한 수익을 거둔 것으로 주목받지만 대폭락의 시기에 살아남는 법을 몰랐다면 결코 그 명성을 오늘날까지 이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첨단 금융기법이 아니라 시장과 인생을 일관하는 철학에 있었다.
가치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
워런 버핏은 경이적인 수익률만큼이나 인상적인 화법으로 유명하다. 그가 던지는 투자 철학은 미국 사회의 새로운 격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가치투자는 그의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레이엄은 ‘투기’라는 이름의 중세 유산을 청산하고 주식시장에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하고자 했다. 대공황의 경험을 통해 시장이 비이성적 광기에 전염되면 언제라도 흑사병과 같은 재앙이 발생할 수 있음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래서 ‘투자’라는 이름의 백신을 창조하려 했다. 그에게 투자는 이성의 산물이었고 어떠한 경우에도 자산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야말로 최대 관심사였다. 그는 바야흐로 주식시장의 근대를 연 데카르트와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주가 분석에 활용되는 PER(주가수익비율), PBR(주가순자산비율) 등의 개념이 그의 발명품인데, 이를 통해 투자의 과학은 시작됐다.
그런데 가치에 대한 철학은 그렇게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비록 주식시장의 계몽운동가였다고는 하나 사람들은 여전히 가치투자에서 신앙이나 철학과도 같은 일면을 발견한다. 그것은 ‘가치’라는 개념 자체가 수리적 모델만으로 걸러질 수 없는 것인데다가, 숫자 너머의 세계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결국 철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제 오를지 기약 없는 주식을 오래도록 보유하는 것은 100세가 되도록 아들을 기다린 아브라함의 신앙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들 철학의 원형은 청교도 자본주의의 창시자라 할 벤저민 프랭클린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믿을 수 없이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으며 특히 자본에 대한 관념은 동시대인을 훌쩍 뛰어넘었다. 특히 복리이자의 중요성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강조했는데, ‘세 번의 이사는 한 번의 화재와 같다’는 그의 격언은 현대 가치투자자들의 ‘Buy & Hold’전략과 일맥상통한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교회가 가르치는 율법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현세에서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한 최초의 인물로 평가할 만하다. 실제로 워런 버핏과 존 템플턴, 존 네프 같은 가치투자자들은 한결같이 소박한 삶의 태도로 사회적 존경을 받는다. 결국 오늘날의 가치투자 철학은 청교도적 세계관에서 싹을 틔운 것이며, 워런 버핏의 신화는 미국적 사상의 승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과 정반대 시각으로 시장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제시 리버모어에서부터 ‘터틀트레이더’에 이르는 추세추종매매 그룹이다. 이들의 시각이 가치투자 그룹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은 오로지 가격이라는 이름의 현재에만 집중한다는 점 때문이다. 가치투자자가 끊임없이 가격 너머의 ‘가치’를 파악하고 이원론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달리 이들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시장에 순응한다. 오르는 주식이 좋은 주식이요 떨어지는 주식은 나쁜 주식이며, 그들이 아는 것은 내일의 주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뿐이다. 이러한 태도로 그들은 일반적인 저점매수 고점매도의 원리를 역행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투자자(Investor)라고 정의하지 않고 매매자(Trader)라고 규정짓는다. 오로지 순간에 모든 것을 바치는 이들에게 투자의 개념은 있을 수가 없다. 가치투자가 오래도록 정주할 곳을 찾는 농경민족의 철학이라면 추세추종매매는 유목민의 철학과 닮았다. 시장에서 이런 유목민족의 생존방식이 주목받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
추세추종매매의 아버지 제시 리버모어는 인간의 본성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이란 손실에 대한 혐오와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 탐욕의 전염현상을 의미한다. 사막을 여행하는 자들이 숱한 고비에 직면하듯이 시장은 투자자를 시험대에 오르게 한다. 예측이 불가능하고 출렁대는 주가는 늘 인간의 본성을 자극한다. 그러나 난파하지도 않은 배에서 뛰어내리는 쥐떼 같은 근성은 인간에게도 잠재한다. 추세추종매매는 모두가 비관에 젖어 있을 때 생존의 기회가 어디서 다가오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아흔다섯 번의 투자에서 실패하지만, 다섯 번의 성공한 투자에서 모든 손실을 만회하고도 이익을 남긴다. 추세추종매매의 전략은 내일 무엇을 먹을지 걱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던 유목민의 신앙에 맥이 닿아있으며, 궁하면 통한다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도 맞닿는다. 가치투자가 근대성을 대표한다면 추세추종매매는 전근대인들의 생존전략으로서 오늘날까지 그 유효성을 입증하고 있다.
한국적 생존철학의 고수들
그런데 주식시장의 역사가 일천한 한국에서는 워런 버핏이나 제시 리버모어와 같은 현인을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시선을 돌려 다른 분야로 확대해본다면 한국 현대사에도 가치투자자와 추세추종매매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 두 인물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병철과 정주영이다. 그들은 투자자가 아닌 경영자였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만큼은 주식시장의 승자들과 동일했다. 일찍부터 많은 이가 두 사람의 상반된 면모에 주목했는데, 그들이 다른 것은 단지 취향이나 출신 성분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 세계관에서 큰 차이가 있었는데, 각각의 철학을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가치지향’과 ‘추세추종’이다.
헤지펀드를 최초로 설계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마이런 숄즈.
그는 노년에 이르러 가치투자자들이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듯이 전자산업에 가용한 모든 에너지를 투자했다. 그리고 두 번째 다가온 암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그는 자신의 지향점을 잊지 않았다. 그의 일생은 비록 일본을 모방하고 따라가는 것으로 일관했지만 일본이라는 창을 통해 도입하고자 한 것은 과학과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근대문명이었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삼성의 반도체 신화는 이렇게 한 사람의 가치지향의 철학으로부터 시작됐다.
삼성전자의 오늘을 있게 한 반도체.
정주영은 추세추종 매매자가 가격에 집중하듯이 오로지 현재에 몰두했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대신 눈앞의 일에만 매진했다. 그에게 기회는 잠시 열렸다 닫히는 문이었기에 순간순간 폭발하는 듯한 삶을 살았다. 그로써 일생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도 추세추종매매는 시장 앞에 연약하기 짝이 없는 개인투자자들의 생존전략으로 빛을 발한다.
노아의 전략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가치지향과 추세추종의 철학이 많은 면에서 대조적이면서도 위기에 대한 신념만큼은 동일하다는 점이다. 주식시장에서 두 계보는 수익과 생존의 선후관계에 대해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수익보다 중요한 것은 생존이며 수익은 생존의 결과 따라온 부산물로 본다. 한 한국영화의 명대사처럼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것’이라는 논리다.
그런데 리스크에 대응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벤저민 그레이엄의 가치투자 이론의 중요부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원금보전’이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는 가치투자자에게 손실은 치유할 수 없는 충격이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투자하기 이전에 위험을 예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가치지향 철학이 리스크에 대응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 이상적인 이야기가 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일화다. 노아는 시장에 역행하는 투자자를 상징한다. 그가 방주를 만들 당시 세상은 거품으로 충만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은 바로 그런 거품시기에 샴페인을 터뜨린 투자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 노아는 홀로 거품시대의 붕괴에 대비하고 있었다. 성경은 이를 신의 계시로 설명하지만 워런 버핏이 그런 초월적 존재의 도움으로 투자에 성공했다는 증언은 없다.
이 오래된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현상과 본질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주식시장에서 현상이란 가격을 뜻하며 본질은 가치를 의미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현상적으로는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본질은 막다른 파국에 다다른 상태였다. 기독교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현세 대신 내세를, 육체 대신 영혼을 강조하는 이원론의 철학을 전파한다. 가치투자자가 주식을 가격과 가치의 이원론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런 기독교적 전통에 의한 것이며 이를 통해 시장에 역행할 용기를 가지게 된다. 오늘날 금융위기는 미국 사회가 이런 전통적 세계관에서 일탈한 대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노아의 일화가 있다. 일제 말기 청년 사업가 이병철은 대구에서 굴지의 고액 납세자였다. 당시 그는 양조장과 삼성상회라는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대상품목이라고 해봐야 청과물, 건어물, 잡화 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두 사업 모두 당장의 먹을거리와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그는 이상한 낌새를 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언론은 연일 연전연승을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상인의 감각은 그런 현상에 속지 않았다. 먼저 평소 조선인에 대해 고압적이던 일본 관료들이 그에게 굽실거리며 식량을 구하려고 통사정하는 데 의문을 품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운명은 욱일승천하는 것이 아님이 자명했다. 그는 마치 노아가 방주를 만들 듯이 미래를 대비했다. 다가올 식량난에 대비하여 과수원을 매입하고 사업체를 지배인에게 맡긴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1942년 봄의 일이었다.
현대인에게는 당시 그의 판단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감이 오지 않을 것이다. 한 인물을 평가하는 데 있어 현재 시점으로 과거를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콜럼버스의 달걀이라 한다. 하지만 함석헌이 “해방이 도둑처럼 느닷없이 다가왔다”고 고백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제 말기 지식인 다수가 친일 행각을 했는데 그들이 해방 직전까지 일본의 패배를 예상치 못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모두들 일본의 지배가 천년 만년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지식인이라는 존재의 예지력은 이렇게 허무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그 시기에 단 한 사람의 상인이 3년을 앞질러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인의 놀라운 예지력을 보라!
이렇게 다가올 미래를 꿰뚫어보고 시류에 역행하는 모습은 그의 일생을 두고 발견된다. 그가 말년에 내린 반도체 투자 결단도 현재의 삼성만을 기억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감이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한국과 삼성은 이제 막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신흥 개발도상국, 이름 없는 회사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개인투자자에 비유하자면 대폭락 장세에 몰빵을 내지른 것과도 같다.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내지른 몰빵을 통해 누군가는 지옥으로 가고 누군가는 천당으로 간다는 점이다.
그가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순간에 보여준 모습은 현대판 노아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66세 되던 해에 첫 번째 암의 도전을 받는다. 그는 이 상황에 기업을 운영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했다. 우선 암에 관한 권위 있는 서적들을 긁어모으고 스스로 위암에 관해 공부했다. 그 결과 위암은 일본이 가장 발병률이 높고 그만큼 수술 실력도 앞서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일본이라면 그가 정통한 곳이었다. 다시 다양한 루트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가장 실력 있는 의사를 파악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집도의를 직접 선택했다. 수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 후 그는 10여 년을 더 기업경영 일선에서 활동하며 삼성의 역사에서 가장 큰 결단이었던 반도체 진출을 선언한다.
이 일화는 대폭락 장세에 대처하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일깨워준다. 우선 이성으로 공포를 제압하는 것이다. 워런 버핏은 시장에서 실패하는 투자자를 가리켜 집단자살을 하는 래밍떼에 비유한 바 있는데, 군중심리에 영합하는 것이야말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적어도 이병철은 죽음의 공포가 엄습한 상황에서 최대한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음은 정보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다. 지금 대폭락 시기에 가장 고통스러운 자들은 거품시기에 자기결정권을 타인에게 양도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펀드매니저, 애널리스트 같은 전문가의 화려한 간판에 굴복했다. 그리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곳에 생명줄을 갖다 바쳤다. 그러나 이병철의 일화는 객관적 정보수집과 자기 결정력만이 삶과 죽음을 가를 뿐 노아의 계시는 신화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전근대의 생존전략
그러나 이미 벌어진 대폭락의 시기를 예견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사람이라면 또 하나의 지혜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추세추종매매는 주식시장에서 가치투자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갖는다. 그리고 그들은 리스크에 대해 가치투자와 또 다른 방식으로 대응한다. 추세추종매매자들은 이른바 ‘매몰비용’이라는 개념으로 투자에는 수업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설적인 수익률을 올려 현대 추세추종매매를 대표하는 에드 세이코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돈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돈을 벌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숨을 들이마신 후 내쉬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원금보전과 매몰비용에 관한 양자 간 철학의 차이는 투자에 대한 방법론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가치투자자들은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는 전략을 쓰지만 추세추종매매자들은 예측할 수 없는 시장에 대해 분산 전략으로 대응한다. 이렇게 투자를 집중하느냐 분산하느냐의 차이가 리스크에 대응하는 방식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런 추세추종매매 방식은 주식시장을 떠나 폭넓은 분야에서 발견된다. 야생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생명체의 전략을 보면 추세추종매매가 자연의 한 법칙임을 알수 있다. 보통 동물들은 새끼를 한번에 여러 마리 낳는 포트폴리오 전략을 활용한다. 특히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위치한 동물일수록 더 많은 수의 유전자를 퍼뜨림으로써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거기에 선택과 집중을 더한다. 어미들은 약한 유전자를 스스로 도태시킴으로써 강한 새끼에게 집중한다. 이것은 추세추종매매에서 피라미딩 기법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포트폴리오 내에서 추락하는 주식의 싹을 자르고, 오르는 주식을 더 많이 사들임으로써 생존을 이어간다. 추세추종 철학을 전근대인의 생존전략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추세추종 철학은 특히 현재와 같은 난세에서 빛을 발한다. 추세추종매매는 유동성이 있을 때만 시장에 진입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시작하지를 않는다. 이것은 큰 파도가 일어야만 파도타기를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파도타기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우선 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추세추종 철학에서는 실패를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런 원시적 방식이 현재도 유효한 것은 미래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많은 투자자가 시장에서 주가를 예측하려 시도하지만 현재까지 개발된 수학적 도구로는 불가능함이 입증됐다. 추세추종의 철학은 역사의 진행에 발맞춰 진화하는 도구로서 여전히 그 유효성을 입증한다.
추세추종 투자의 대가 정주영은 시련은 부를 축척하기 위한 과정으로 해석한다.
추세추종 철학의 리스크 대응 방식을 설명하는 데 적절한 상징이 있다. 바로 늑대다. 늑대는 전세계에 고르게 분포한 포식자인데, 호랑이나 사자가 특정지역에만 존재하는 지역구임을 감안한다면 늑대야말로 전국구 포식자인 셈이다. 조직적으로 사냥을 시도하는 늑대의 무리는 자연의 세계에서도 가장 유능한 사냥꾼으로 통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위기극복의 메커니즘이 없었다면 전 지구적인 포식자의 지위를 차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능한 사냥꾼도 사냥에 실패할 확률이 90%에 달한다고 한다. 추세추종 매매자들이 시장에서 겪는 것과 거의 같은 실패를 겪는 셈이다.
늑대들은 이렇게 열악한 생존환경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 우선 드물게 찾아오는 폭식의 기회에 충분히 에너지를 축적한다. 이들은 한번 먹잇감을 확보하면 위장이 넘쳐 토할 때까지 집요하게 집착한다. 여기에 배고픔을 견디는 능력을 더해야 한다. 실패와 곤궁함은 자연에 충만한 것이며 이것은 최고의 포식자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진화란 가장 강한 개체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적응에 성공한 개체가 살아남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시장의 승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흔히 부자들에 대해 갖는 편견 중 하나는 그들이 인색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부자가 소유한 것보다 적게 소비하는 습관을 인색함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부자와 보통사람은 자산과 위기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다른 시각으로 접근한다.
정주영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그가 남긴 삶의 흔적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한국 최고의 부자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살던 집엔 단출한 가구와 가전제품뿐이었고 그나마도 수십년 된 것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부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런 면모를 과연 종교나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 검소함이나 소박함이라는 단어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야 할지 모른다.
제시 리버모어는 정주영과 같은 추세추종적 철학의 소유자였으나 그들의 말로는 전혀 달랐다. 그는 젊은 시절 주식으로 돈을 벌면 거기에 맞게끔 자신의 소비수준을 높여갔다. 그러다 파산해도 젊을 때는 멋지게 재기해 보이곤 했다. 하지만 노년의 그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자산이 감소해도 한번 높아진 소비수준은 절대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밥통을 키워놓은 늑대는 포식자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 탐식 성향으로 인해 종말을 맞는다. 제시 리버모어는 결국 63세 되던 해 자신을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정주영과 제시 리버모어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검소한 삶에 대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불황과 호황기에도 살아남는 현실적 교훈이다. 대폭락의 시기를 누구보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거품시기에 소비수준을 높여놓은 사람들이며 그들 역시 밥통을 키워놓은 늑대와 마찬가지로 진화에서 도태하게 된다. ‘포브스’는 해마다 세계 최고의 부자 순위를 발표하지만 정작 뉴스의 주인공들은 거기에 일희일비할 리 없다. 그들은 자산에 거품이 끼어 있음을 알고 있고 언젠가 꺼질 운명임도 알 것이다. 바로 그런 기준, 보통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품과 리스크를 감안하는 사고방식이 그들의 생활을 검소하게 만들 뿐이다.
정주영은 노년에 정치실험 실패를 포함해 일생 동안 겪었던 실패를 단지 시련이었을 뿐이라고 멋지게 해석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시련을 이겨냈고 마지막까지 부를 유지했다. 그러나 10여 년 전 IT버블 당시 요란하게 등장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벤처기업가들 중 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거품시기에 샴페인을 터뜨렸던 월가와 여의도의 증권맨들도 기억해두도록 하자. 필시 자기 자산도 끝까지 지키지 못할 빈곤한 철학의 소유자들이 많은 사람의 일생이 걸린 돈을 무서운 줄 모르고 굴려댔다. 비록 뒤는 참담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가는 모습이다.
시장의 賢者를 추종하라
지난 몇 달간 한국시장은 세계에서도 가장 유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세계 6위의 외환보유고, 세계 13위의 무역대국 같은 수치는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 한국의 투자자들이 유독 래밍떼 같은 특성을 보이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문명국이란 오랜 역사적 경험이 집적된 나라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실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나라를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것과는 달리 시장의 역사는 일천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한국의 주식시장이 유달리 출렁이는 것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 미숙함에 큰 이유가 있다. 이미 우리는 시장을 떠나서 살 수가 없는데도 시장의 지혜를 배울 만한 곳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이다.
미국 산업화 시기의 상징인 앤드루 카네기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미국 사회에 남긴 더 큰 유산은 자신의 성공을 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한 것이다. 이민자 출신이던 카네기는 자신이 했던 일이라면 누구라도 반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노년에 자신의 성공원리를 정리해줄 젊은이를 찾았고 나폴레온 힐이라는 신출내기 기자를 만나게 된다. 카네기는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성공의 원칙을 찾아볼 것을 권유하면서 금전적 지원은 없다는 조건을 걸었다. 앤드루 카네기의 소개로 나폴레온 힐은 미국 사회의 수많은 성공한 인물을 만날 수 있었고, 20년 만에 ‘성공의 법칙’이라는 책을 출간하게 된다. 그때 이미 카네기는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 사회에 대공황이 찾아왔을 때 카네기의 유훈은 나폴레온 힐을 통해 전파될 수 있었다. 미국인들은 시장의 현자(賢者)들에게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배웠던 것이다.
한국은 지난 반세기 가장 성공적인 경제개발을 일군 나라다. 그것은 종종 기적이라고 표현된다. 그런 경제기적을 일군 나라에 시장의 지혜가 축적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1997년의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성공의 탄탄대로만을 달려온 듯 착각하지만 그것은 기억의 조작에 불과하다. 그 반세기 동안에도 숱한 위기가 존재했으며 현재의 한국은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낸 결과다. 이제 한국 사회는 자본과 시장에 대해 굴절되지 않은 시선으로 접근할 때가 되었다. 그 어떤 자연재해와 군사적 위협보다 자본에 의한 위협이 더 큰 시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에서 돈과 세속적 성공에 관한 격언이 넘쳐나듯이 우리도 시장의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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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엔 벤저민 프랭클린과 같은 직업윤리의 창조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당대 최고의 거부가 되는 경험철학만큼은 뒤질 것이 없다. 그 가운데서도 성공의 유이한 모델을 보여준 두 인물, 이병철과 정주영은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들은 가난한 젊은이가 거부가 되고, 부자가 더 큰 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 시대를 초월하고 지역을 초월해서 실천할 수 있는 삶의 철학을 유산으로 남겼다. 우리는 과연 그것을 역사 속으로 떠내려보내도 괜찮은 것일까? 아마 그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아직 대한민국은 기회의 땅이고 황금의 대륙일지 모른다. 현재의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역시 그들에게서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폴레온 힐이 앤드루 카네기의 시각을 복제해냈던 것처럼 현재의 한국 사회는 그들의 유산을 다시 후손에게 물려줄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