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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기열전(史記列傳)’

③ 화식열전

피죽도 못 먹으면서 仁義만 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

  • 원재훈│시인 whonjh@empal.com│

③ 화식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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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화식열전

동양제철화학 창업주 송암 이회림.

“농부들은 먹을 것을 생산하고, 어부와 사냥꾼은 물건을 공급하고, 기술자는 이것으로 물건을 만들고, 장사꾼은 이것을 유통시킨다. 이러한 일이 어찌 정령이나 교화나 징발이나 기일을 정해놓음으로써 모여지는 것이겠는가!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 그 힘을 다해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러므로 물건 값이 싸다는 것은 장차 비싸질 조짐이며, 값이 비싸다는 것은 싸질 조짐이다. 각자 생업에 힘쓰고 즐겁게 일하는 것이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으며 물건은 부르지 않아도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절로 모여들고, 구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만들어 낸다. 이것이야말로 도(道)와 부합하는 것이며, 자연 법칙의 징험(徵驗)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차이를 잘 아는 자에게는 ‘때’가 보이게 마련이다. 어느 시기에 투자를 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다.

“여보게 사업은 말이야 늘 잘되는 게 아니야. 누구나 살다 보면 좋은 운이 몇 번 찾아오게 마련이지. 열심히 산다면 말이야. 그렇게 사업이 잘되면 낮이 짧고 밤이 너무 길어. 자금이 들어오는 게 보이는 낮이 얼마나 짧은지 몰라. 그래서 새벽에 일찍 눈을 떠서 아침을 기다리지. 부지런한 사람은 낮이 짧은 사람들이야.

그런데 말이야. 자본이 쌓이면 그때부터가 중요해. 보통 사람들은 탕진하기 쉬워. 세상에는 돈 쓸 일이 많으니까. 그때 관리를 잘해서 허랑방탕하게 쓰지 않고 잘 모아두어야 해. 사업이나 개인이나 일이 안 될 때가 있는 거니까 그때를 대비해야 돼. 잘 운영한 자금으로 기회를 기다려야 해. 그러다가 다시 기회가 오면 투자를 하는 거지. 참 많은 사람이 이걸 몰라요, 하지만 난 몇 번 온 기회를 잘 잡고 운영해서 우리 기업을 만들었네.”

작고한 송암 이회림 회장(동양제철화학의 창업주)이 생전에 지인에게 한 말이다. 송암은 개성상인 출신으로 척박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기간산업 분야에 과감한 투자를 한 경제인이다. 어쩌다 인연이 되어 고인이 쓰던 집무실 책상 위를 본 적이 있다. 아직도 기억에 남은 것이 돼지 저금통을 비롯한 여러 개의 저금통과 동전들이다. 이 작은 단위의 동전들이 거대한 부의 근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암은 종로에서 작은 점포를 운영하던 시절에 ‘차이’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거래가 없어 한가한 시간이면, 종로통에 지나다니는 물건들의 흐름을 파악한 것이다. 어느 집에 어떤 물건이 들어가는지, 얼마만큼의 물건이 움직이는지를 보면 종로통의 경기를 알 수 있었다. 이 버릇은 훗날 대기업을 운영할 때도 없어지지 않았다. 고속도로에서 물자를 싣고 이동하는 대형 트럭을 유심하게 관찰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돈과 물건의 유통이 물의 흐름과 같이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시대는 달라도 부자들의 정신세계는 일맥상통하는 모양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의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이가 바로 도에 이른 사람이다. 학문이건 예술이건 기업이건 간에 이러한 경지에 올라야 대성할 수 있다.

물건과 돈은 유수(流水) 같아야

③ 화식열전

2006년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인 갑부 6인. 미국 및 세계 갑부 순위는 매번 달라진다.

사마천은 도와 부합하고 자연 법칙을 징험한 사람으로 범려와 계연을 이야기한다. 범려는 월나라 왕 구천의 신하이며, 계연은 범려의 스승이다. 계연은 구천에게 ‘물건과 돈은 흐르는 물처럼 원활하게 유통시켜야 한다’면서 재물이 움직이는 실정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전쟁이 있을 것을 알면 방비를 해야 하듯, 때와 쓰임을 알아두어 언제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월나라 구천왕은 오나라의 부차에게 설욕하기 위해 와신상담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진정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쓸개를 핥으면서 정신력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돈의 흐름을 유연하게 했기 때문이다.

구천왕은 해박한 지식으로 자연의 움직임을 살폈다. 어느 시기에 풍년이 들고 수해가 발생하는지 자연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미리 준비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재물을 비축해 물가가 폭등하는 것을 막고, 물자를 잘 유통시키면 백성이 왕을 따르게 마련이다. 이렇게 10년 정치를 하니 월나라가 부강해졌다. 그 힘으로 20여년을 기다려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인 오나라를 점령했다.

훗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붙잡는 구천왕을 뿌리치고 월나라를 떠난 범려는 스승인 계연의 가르침을 따라 장사에 나섰다. 월나라는 계연의 일곱 가지 계책 중 다섯 가지를 써서 뜻을 이루었는데, 범려는 ‘이것을 집에서 써보아야겠다’고 작심하고, ‘도’라는 지방에 가서 이름을 주공으로 바꾸고 대부호가 됐다.

정치인 범려는 경제인 도주공으로 변모하여 중국인들에게 존경받았다. 그는 많은 재산을 가난한 친구들과 먼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부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자손들도 아버지의 재산을 잘 운영해서 거부가 됐다고 한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부를 확산하는 자손들이다. 그룹 삼성을 떠올리게 된다. 이병철 회장의 대를 이어 이건희 회장은 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한 나라를 움직이는 경제 논리는 한 가정을 움직이는 경제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가정을 움직이는 경제 논리는 한 기업을 움직이는 경제 논리이기도 하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중요한 건 중심 잡기와 어떻게 적용하느냐다. 기술과 문명은 진보하고 발전하지만, 본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중국 고대 장사꾼이나 21세기 장사꾼이나 성공한 사람들은 여기에서 사서 저기에서 파는 ‘공간 차이’와 오늘 사서 내일 파는 ‘시간 차이’를 적절히 이용하는 지혜를 가졌다. 공간 차이는 이제 국가 간 거래로 확대된다. 무역은 결국 공간적인 차이를 잘 이용하는 것이다. 시간 차이는 환 차익이나 주식투자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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