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지 ‘창조’의 발행인은 김추기경이었고, 필자는 주간이었다.
물처럼 흘러오고 흘러가는
나는 그 원고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읽어 보는데 고칠 만한 데가 거의 없었다. 다음날 회사에 나와서 주교관으로 건너가 그대로 돌려드렸다. 내가 김수환 추기경과 같은 회사 안에서 근무하는 셈이고 전문적인 문필인이니까 세상에서는 김 추기경의 글이나 강론 원고 작성에 내가 많이 협력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순탄한 문장력을 가지고 있어 자신의 강론 원고나 글을 손수 집필했다.
다만 격무로 인해 도무지 시간이 없을 경우에만 나를 불렀다. 가서 만나 뵈면, 어느 언론재단 기관지에서 ‘언론자유의 사명’에 대해 원고 청탁이 왔는데 시간이 없어 쓰기가 어렵다고 했다. 내가 대필을 해 줄 수 있으면 청탁을 받아들일 것이고 쓸 수 없다고 하면 청탁에 응하지 않겠다고 했다.
당시는 우리 사회에서 언론자유가 봉쇄되어 있었으니 이 주제를 살려 김 추기경 명의로 글을 발표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대필을 하겠다고 했다. 가톨릭출판사에 근무하면서 나는 가톨릭교회의 역대 교황 회칙과 바티칸의 사목교서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이 문헌들은 세계의 석학들이 모여 논의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현대 세계 최선의 지혜이며 현실 문제들에 대응하는 진정한 해결 지침들이다.
언론에 관한 지침인 ‘일치와 발전’을 보더라도 쉬운 표현으로 적절하고 심오한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이 생각할 자유에 알고 알릴 권리가 따른다. 교회는 바깥세상과도 대화를 해야 한다. 시대의 징후를 아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이 말씀하는 방법이다.”
이 외에 더 많은 원리가 있다.
내가 원고를 써서 드린 후 어느 날 추기경 비서실 여직원이 흰 편지봉투를 하나 내게 가져왔다. 언론재단에서 원고료가 왔다는 것이다. 나는 추기경님 명의로 된 원고였으니 내가 받을 수 없다고 해 돌려보냈다. 즉시 여비서가 다시 돌아왔다. 내가 원고료를 받지 않는다고 추기경님이 역정을 내신다며 놓고 간다 해 할 수 없이 나는 그 원고료를 받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돈에 대해서는 아무 감각이 없는 것 같다. 오랜 세월에 걸쳐 나는 김 추기경이 받거나 또는 어디에 제공하는 돈의 심부름을 중간에서 한 일이 있다.
김 추기경과 동성학교 동창인 한 사회 원로가 추기경님을 모시고 가족을 위한 생 미사(산 사람을 위한 축복 기원)를 드리고 싶은데 건강이 안 좋아 거동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러니 미사 예물(돈)을 추기경님께 전해드리고 기도를 부탁드려 달라고 했다. 현찰 100만원이 든 두툼한 봉투를 가져다 드리니 김 추기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돈을 받았다.
여러 해 후 구상 시인이 별세한 빈소에 김 추기경이 문상을 하고 돌아가며 내게 흰 봉투를 하나 건넸다. 봉투에는 아무 글씨도 씌어 있지 않았지만 조의금을 접수시켜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받아가지고 접수 데스크로 가서 세어보니 현찰 100만원이었다. 나는 봉투 겉에 ‘근조, 김수환 추기경’이라고 써서 접수시켰다. 그에게는 돈이 그냥 물처럼 흘러가고 흘러오고 하며 고여서 남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이어서 한 시인이 문상을 마치고 응접실에 들어와 함께 술을 한잔 들 때 내가 김 추기경의 조의금 내는 자세에 대해 여담으로 들려주었다. 그는 “그런 돈은 내게 맡기셔야 잘 떼어먹을 텐데” 하고 농담을 했다. 그렇게 마음이 담담한 김수환 추기경에게 어울리지 않게 시국의 격동하는 정세는 끊이지 않고 밀어닥쳤다.
추기경이 나서야 했던 사건
1970년대에 온갖 커다란 시국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우선 1971년 ‘성탄절 자정 미사 강론’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였다.
위수령이 발동되는 시국 상황에서 언론이 극도로 통제되어 있는 가운데 국민 대중에게 생중계 방송 중에 민주화 촉구 의사를 발표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명동성당의 자정 미사 강론을 이용한 것은 김수환 추기경만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강론에서 이렇게 따졌다.
“이른바 국가보위법은 국회의 동의 없이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발동할 수 있게 하는 법이다. 헌정 질서에 어긋나는 이 법의 제정은 국민의 양심적 발언을 막으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누구도 말할 수 없었던 이 이의 제기에 국민은 좌절에서 깨어나 다시 민주화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김 추기경의 시국 발언은 계속되었다. 1972년 8 ·5 시국성명에서 김 추기경은 “7· 4 남북 공동성명이 남 ·북 정권의 기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념과 제도를 초월해 하나의 민족으로 만나자는 선언을 꼭 실천에 옮겨야 한다” 고 촉구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남북 당국의 기만으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