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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마지막 회 |

蒙 말발굽 소리 사라진 칭기즈칸의 고향

《네이멍구자치구》

  • 글·사진 김용한|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蒙 말발굽 소리 사라진 칭기즈칸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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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戰士들

여러 부족이 모여 회의를 통해 우수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평등하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회의 결정에 불복하고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며 부족 연맹 간 전쟁을 치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탁월한 영웅이 유목민족을 규합해 위세를 떨치다가도, 순식간에 분열해 사라지는 일은 유목민족 역사의 전형적인 패턴이 되었다.

춘추전국시대 말에 진시황이 중국 천하를 통일했을 때, 흉노의 영웅 두만선우는 북방의 여러 부족을 병합했다. 남방의 진나라와 북방의 흉노가 팽팽히 겨루는 국면이 형성됐다. “진나라를 망하게 할 사람은 호(亡秦者胡也)”라는 점괘를 들은 진시황은 ‘호(胡)’를 오랑캐, 그중에서도 북방의 흉노라 여겼다. 그만큼 흉노는 진나라에도 위협적인 존재였다.

기원전 215년 몽염 장군은 30만 대군으로 흉노를 쳐서 오르도스를 빼앗고 44개의 성을 이어 쌓아 만리장성을 만들었다. 그러나 진시황이 죽자 차남 호해(胡亥)는 간신 조고와 함께 국정을 농단했다. 진나라는 연이은 반란으로 안에서부터 무너졌다. ‘망진자호야’의 ‘호(胡)’는 바로 진시황의 아들 호해다.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 이후부터 기원전 202년 유방의 천하 통일까지 장장 7년이 걸렸다. 천하 통일 이후에도 한나라가 제후의 반란을 평정하고 전란의 상처를 수습하는 데에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다.

중국의 견제가 사라진 사이 흉노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두만선우가 영웅이라면 그의 아들 묵돌은 대영웅이었다. 두만은 총애하던 후궁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 싶어서, 묵돌을 경쟁국인 월지에 인질로 보내놓고 월지를 공격했다. 월지의 손으로 묵돌을 제거하려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묵돌은 혼란한 틈을 타서 월지의 명마를 훔쳐 타고 흉노로 돌아왔다. 영웅을 숭상하는 흉노인에게 묵돌의 인기는 한껏 높아졌다.



묵돌은 자신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친위대를 양성했다. 묵돌이 소리 나는 화살인 명적(鳴鏑)을 날리면 1만 명의 친위대도 무조건 일제히 화살을 쏘도록 했다. 묵돌은 애마를 향해 명적을 날린 다음, 주군의 애마가 다칠까봐 주저하고 화살을 쏘지 않은 이들을 죽였다. 다음으로 애첩을 향해 명적을 날리고, 역시 화살을 쏘지 않은 이들을 죽였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두만선우에게 명적을 쏘았을 때는 화살을 쏘지 않은 이가 아무도 없었다.



한나라 위 흉노

흉노를 장악한 묵돌은 숙적 월지를 격파하고 인근의 26국을 평정했다. 다시 한 번 남중국과 북흉노가 대립하는 시기가 되었다. 항우를 꺾은 유방도 흉노에게 여지없이 완패했다. 한나라는 흉노와 형제의 맹약을 맺고 휴전한다. 한나라는 매년 솜 비단 쌀 술 등의 물품을 지급하며 황실의 여자를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했다.

이후 흉노는 한나라 위에 군림하는 태도를 보였다. 묵돌은 유방이 죽자 홀몸이 된 여태후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그대에게 없는 것을 채워주겠다”는 음담패설을 국서로 보냈다. 여태후는 성질이 고약해 황제 유방도 그녀를 꺼렸었다. 그녀는 묵돌의 모욕적인 편지를 받고 “피를 토할 지경이 되었지만”, 흉노군의 위력 앞에서는 성질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여태후는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져버려 대왕의 마음에 드시지 않을 것”이라고 겸양하며 묵돌에게 수레 두 대와 말 여덟 필을 보냈다.

한문제(漢文帝)가 1척 1촌 목간(木簡)의 국서를 보내자 노상계죽선우는 그보다 큰 1척 2촌의 목간에 형처럼 으스대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천지가 생겨난 곳, 해와 달이 머무는 곳의 흉노 대선우, 삼가 한의 황제에게 묻노니 안녕하신가?”

이 시기 흉노가 자부한 대로 “여러 활을 쏘는 민족은 합쳐져 일가가 되고, 북방의 고을은 모두 안정되었다.” 흉노는 동서교역로의 상권을 장악해 재원을 확보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한나라 문제·경제는 2대에 걸쳐 와신상담하는 자세로 부지런히 힘을 길렀고, 한무제는 반세기나 흉노와 집요하게 싸웠다. 결국 흉노는 한나라의 힘에 밀려 세력이 꺾인다. 동시에 권력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여기에 더해 악천후로 흉노의 살림살이가 큰 피해를 입자 흉노에 복속되었던 여러 유목민족(정령 오환 오손 등)이 만만해진 흉노를 공격한다. 한나라는 이들 유목민족을 후원한다.

한서(漢書) 흉노전은 전한다. “수개월에 걸쳐서 눈이 그치지 않아 가축은 죽고, 백성은 병에 걸리고, 곡식은 열리지 않았다.” “정령은 흉노의 쇠약함에 힘입어 그 북쪽을 공격하고, 오환은 그 동쪽을 치고, 오손은 그 서쪽을 공격하였다. 이들 세 나라는 수만 명의 백성과 수만 필의 말과 그 밖에 수많은 소와 양을 죽였다. 더욱이 기아에 따른 사망도 이어져 백성의 10분의 3, 가축의 10분의 5가 죽었다.”

흉노는 내분 끝에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다. 한편 한나라는 왕망의 찬탈로 멸망했다가 광무제 유수가 후한을 열었다. 이때 광무제는 오환족 기병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이후 북방 유목민과 곧잘 제휴했다. 남흉노가 북흉노에게 밀리자, 광무제는 남흉노의 8부락을 병주(幷州)에 살게 했다. 남흉노로 북흉노를 견제하는 전략이었다.

후한 말 병주는 산시(山西)성과 내몽골 일부 지역을 합친 지역이다. 이곳은 유목민과 한족이 섞여 살며 독특한 기풍을 지니게 됐고, 유목민족이 중국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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