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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승엽 후배였으면 내 기록 다시 썼을 텐데”

‘양신’ 양준혁

  • 이영미|스포츠 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내가 이승엽 후배였으면 내 기록 다시 썼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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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역 시절 ‘양신(梁神)’ ‘기록의 사나이’로 불리던 양준혁(48)은 2010년 은퇴 후에도 야구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유소년 야구재단을 설립하고,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야구와 관련해 의미 있는 길을 걷고 있다.
1990년대 한국 프로야구를 지배한 선수는 ‘양신’과 ‘종범신’이었다. 1993년 같은 해에 데뷔해 신인상은 양준혁이,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는 이종범이 수상했다. 양준혁과 이종범이 더욱 주목을 받은 건 출신 지역 때문이기도 했다.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은 경상도를, 해태 타이거즈의 이종범은 전라도를 대표했기에 선수 시절 내내 경쟁이 치열했다. 그렇다 보니 야구 커뮤니티에는 누가 더 뛰어난 선수인지를 묻는 질문이 종종 올라온다.

최근 양준혁은 이색적인 이벤트를 경험했다. 이종범과 스크린 야구 대결을 펼친 것이다. 서로 망신만 당하지 말자며 붙은 대결의 승자는 양준혁이었다. 그와의 인터뷰는 이종범과 벌인 야구 대결 이야기로 시작했다.



‘이종범’ 대 ‘양준혁’

얼마 전 이종범 해설위원과 스크린 야구 대결을 벌였다. 현역 시절이었다면 ‘세기의 대결’로 불렸을 빅매치였는데.
“실제 야구로 맞붙었다면 이종범이 이겼을 것이다. 스크린 야구는 타격만 잘하면 돼서, 잘하면 내가 유리할 거라 생각했다. 현역 시절 이종범은 5툴 플레이어(야구에서 야수의 능력을 평가하는 항목. 타격의 정확성, 파워, 안정된 수비, 정확한 송구 능력, 빠른 주루 능력을 말한다)의 대표 선수였다. 메이저리그 추신수도 5툴 플레이어로 불리지만 이종범만큼 존재감이 강하진 않다. 그는 타석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투수를 압박했다. 현역 때 이종범을 이기지 못했다. 신인왕에 오른 것 외엔 모든 부문에서 이종범이 앞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스크린 야구에서라도 꼭 꺾고 싶었는데, 이기니까 기분은 좋더라(웃음).”

1993년 신인왕 경쟁은 ‘역대급’으로 치열했다.
“당시 신인왕 후보들이 엄청났다. 이종범을 비롯해 이상훈, 박충식, 구대성, 김홍집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이었다. 신인왕 관련해서 말이 많았지만 당시 난 타격왕에 올랐고 홈런 2위, 타점 2위를 기록했다. 신인왕만큼은 내가 받는 게 맞았다.”
1993년 양준혁은 신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성적을 냈다. 타율 0.341, 출루율 0.436, 장타율 0.598로 3부문 1위에 올랐고, 23홈런, 90타점을 기록했다. 이종범은 타율 0.280, 16개 홈런, 73도루, 83득점을 기록했다.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던 선수지만 은퇴 무렵엔 벤치 신세일 때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경기 전 후배들에게 배팅 볼을 던지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010년 시즌 초부터 선발과 대타를 오가더니 6월 중순부터는 한 번도 스타팅 멤버에 들지 못했다. 주전으로 뛰던 선수가 후보 역할을 맡다 보니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뭐라도 해보려고 배팅 볼 투수를 자처한 것이다. 불편한 내색해봤자 좋을 것도 없고. 그러나 한 달 정도 벤치만 달구고 있다 보니 자존심이 상했고, 야구를 계속할 이유를 못 찾겠더라. 그래서 은퇴를 결심했고, 올스타전이 열리기 전에 구단에 내 의사를 알렸다.”


1루로 열심히 뛰던 선수

2010년 올스타전이 선수로서 마지막으로 참가한 올스타전이었다. 원래는 올스타에 뽑히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부상 선수 대신 이름을 올렸다.
“올스타전을 앞두고 동군 감독인 김성근 감독님께 은퇴 사실을 미리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골절상을 입은 SK 박정권 대신 내 이름을 올리셨다. 올스타전이 열리는 장소가 대구여서 배려해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8-3으로 뒤지고 있던 7회말 1사 1,2루 상황에서 김현수의 대타로 들어가 3점 홈런을 터뜨렸다.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때린 홈런이었다. 김성근 감독님이 은퇴하지 말고 SK로 오라고 하시더라.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러나 선수 생활의 시작과 끝을 삼성에서 하고 싶었기에 미련을 접었다. 삼성에서 성대한 은퇴식을 열어줬다.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양준혁은 올스타전에서 홈런을 친 다음 날인 7월 26일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은퇴식은 공교롭게도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였다(9월 19일). 당시 SK 선발은 김광현. 양준혁은 김광현을 상대로 헛스윙 삼진만 3개를 기록했고, 마지막 타석에선 송은범을 상대로 2루 땅볼을 치고 1루까지 열심히 뛰어 아웃되는 것으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양준혁은 선수 시절 “항상 1루로 열심히 뛰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 은퇴식에서도 그 약속을 지켜 많은 사람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은퇴 전부터 당시 삼성 라이온즈를 이끌던 선동열 감독과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제 그런 얘기를 꺼내면 뭐하겠나. 그분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고, 최선의 방법이었을 텐데. 지금 와서 왈가왈부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본다.”



필드와 중계석의 차이

은퇴 후 여러 가지 일을 시작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그중 야구 해설위원은 야구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두는 분야다. 필드에서 직접 하는 야구와 중계석에서 보는 야구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
“야구 공부는 끝이 없는 것 같다. 현역 때는 몸으로 하는 연습을 통해 야구 실력을 쌓았다면 해설위원은 다양한 기록과 자료를 공부하고 숙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절감했다. 야구팬들 중 전문가의 식견을 갖고 있는 분이 많다. 공부하지 않고 해설에 들어갔다간 바로 들통난다.”

해설하면서 비난을 많이 받았다. 각종 야구 커뮤니티에는 경상도 사투리 억양과 발음을 지적하는 내용이 많았다.
“사투리는 아무리 고치려 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편이다. 사실 프로야구를 18년 정도하면 나름대로 야구에 관한 한 고수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해설 시작한 첫 시즌은 준비하지 않고 중계에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18년 야구 경험이 3일도 못 버텼다. 밑천이 다 떨어지더라. 그걸 나보다 팬들이 더 빨리 눈치챘다. 비록 욕은 많이 먹었지만 해설을 시작한 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선수로서 보는 야구와 필드 밖에서 보는 야구는 차이가 크다. 이런 점을 일찍 깨달았다면 더 좋은 기록을 냈을 것이다. 야구 트렌드는 해마다 바뀐다. 내 스타일을 고집하면 도태되고 만다. 몇 게임 손놓고 있다가 야구장에 나가면 그새 또 바뀐 걸 느낀다.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스티브블래스 증후군

현역 시절 뉴욕 메츠로부터 오퍼를 받았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안 가길 잘했다. 난 이종범과 달리 타격은 괜찮아도 수비와 다리가 빠르지 않아 금세 실패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만약 수비에 자신이 있었다면 뒤돌아보지 않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수비가 안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신인 때 1루수를 보다가 포수나 내야수들에게 폭투를 하는 일이 많았다. 짧은 거리의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했다. 공만 잡으면 덜덜 떨었다. 나한테 공이 오는 게 불안했다. 스티브블래스 증후군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외야수로 전향했다. 멀리 던질 때는 그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이승엽이 신인 투수로 입단했다가 1루수 자리가 비는 바람에 구단에서 타자 전향을 권유했고, 포지션을 바꾼 덕분에 신인임에도 1루수를 맡게 됐다. 승엽이는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웃음). 지금도 스티브블래스 증후군은 사라지지 않았다. 연습 때는 짧은 거리도 잘 던지는데 시합만 들어가면 제대로 던지질 못한다. 사회인야구대회에 나가도 마찬가지다.”

이승엽이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 신인 시절부터 성장 과정을 지켜본 선배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기’였던 승엽이가 지금은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로 존중받고 은퇴를 앞두고 있으니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내게는 마냥 어린 후배이지만 해설위원으로 만날 때는 최대한 깍듯하게 대하려고 한다.”

이승엽은 어떤 선수였나.
“신인 때부터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한 경기에서라도 부진하면 곧장 훈련장으로 가서 새벽까지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최고의 선수가 된 것이다. 야구 잘해서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의 공통점이 있다. 절대 야구를 쉽게 대하지 않는다. 집요하게 파고든다. 재능만 믿고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반짝 스타로 떠올랐다 이내 사라진다. 이승엽은 정상의 자리에 있어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을 거듭했다. 내가 만약 이승엽의 선배가 아니라 후배였더라면 이승엽처럼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승엽이가 오기 전까지 나는 홈런 20개, 3할 이상 때리면 최고 선수라고 생각했다. 더 올라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승엽이가 홈런 40개, 50개 이상을 때려내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난 현실에 안주하며 만족했고, 승엽이는 더 높이 도전했다. 그게 나와 이승엽의 차이다.”



2인자

그래서인지 양준혁 하면 ‘2인자’란 수식어가 뒤따르기도 했다.
“승엽이는 눈치 못 챘겠지만 내가 승엽이를 위해 노력한 게 많다.”

어떤 부분을 말하는 건가.
“승엽이가 2003년 56개로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달성할 때 내가 ‘밥상 차려주는 역할’을 많이 했다. 승엽이랑 타순이 붙어 있다 보니 그런 상황이 많이 벌어졌다. 새로운 태양이 뜨면 이전 태양은 지기 마련이다. 그런 현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1인자가 있으면 2인자가 있는 법, 내가 밥상 차려주는 역할을 해서 승엽이가 빛난다면 나한테도 좋은 영향이 미칠 거라 생각했다. 위대한 대통령 뒤에는 위대한 참모가 있는 법 아닌가.”

그래도 한때 삼성 라이온즈 최고의 타격왕이 ‘2인자’로 떨어졌다는 걸 인정하는 게 쉽진 않았을 것 같다.
“당연하다. 누가 2인자를 하고 싶겠나. 그런데 현실을 부정하기보단 빨리 인정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승엽이가 프로야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해도 선수들 연봉이 1억 원을 넘기 어려웠다. 그러다 승엽이가 인기를 모으고 홈런 40개를 치자 연봉이 4억 원으로 뛰었고, 그다음에는 6억 원이 되더라. 이승엽이 앞에서 연봉을 올리니까 뒤따르는 선수들도 자연스레 상향 조정됐다. 그때는 백업 선수도 1,2억 원씩 받던 시절이었다. 1인자가 알아서 몸값을 올리는데 2인자가 그걸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앞에서 이끌어준 승엽이가 고마운 상황이었다.”

1998년 12월, 당시 해태 임창용과 1대 3 트레이드가 됐다. 삼성에선 양준혁을 비롯해 곽채진, 황두성에게 현금 20억 원을 내주었다. 야구계에선 지금도 회자되는 충격 트레이드의 하나로 손꼽힌다.
“젊은 혈기로 구단 사장에게 덤비다 바로 트레이드가 되었다. 연봉 문제 때문에 구단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미국으로 떠날 생각까지 하는 등 트레이드에 강하게 반발했다가 김응용 해태 감독님이 1년 후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를 추진하겠다고 말씀해주셔서 해태 유니폼을 입었다.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기록의 사나이

양준혁 하면 ‘기록의 사나이’다. KBO리그 최초로 2000안타를 달성했고, 통산 2318안타를 남겼다. 현역 시절 최다 홈런(351개), 최다 타점(1389점), 최다 안타(2318개), 최다 득점(1299점), 최다 사사구(1380개) 등 9개 부문에서 신기록을 수립했다.

“내 기록은 이승엽이 다 깼다. 난 대학 졸업 후 프로에 입단했고, 군 복무도 마쳤다. 마지막 2년을 더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포기했다. 그렇게 따지면 7년을 까먹은 셈이다. 승엽이처럼 고교 졸업 후 병역면제 혜택 받고 계속 경기에 나선다면 내 기록은 쉽게 넘어설 수 있었다. 사실 3000안타를 목표로 했다. KBO리그에서 아직까지 단 한 명도 기록하지 못한 성적 아닌가. 앞으로 어떤 선수가 3000안타의 기록을 세울지 궁금하다.”

우승 명가 삼성 라이온즈가 올 시즌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삼성도 많이 바뀌어야 한다. 변화의 대상엔 선수만이 아닌 프런트도 포함돼 있다. 프랜차이즈 스타플레이어로 거듭나야 했던 최형우(KIA)와 차우찬(LG)이 FA가 되면서 삼성을 떠난 건 돈보다 마음에 있다. 정말 많은 선수가 삼성을 떠났다. 어느 면에선 구단이 선수의 마음을 얻지 못한 탓도 크다.”

어떤 면에서 그렇다고 보나.
“구단은 선수를 연봉 협상할 때만 비즈니스로 대하고, 그 외적인 면에선 ‘내 선수’란 마인드가 강하다. 지금 세대는 그런 부분이 통하지 않는다. 선수로, 스타플레이어로 존중해주고 대우해줘야 한다. 내가 해설위원 신분으로 나설 때 이승엽을 존중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야 서로에 대한 애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프로는 냉정한 곳이 아니다. 감동과 문화가 있어야 하고 인간미가 스며들어야 한다. 명문 구단, 명문 클럽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문화와 역사가 뒷받침돼야 하고, 선수들이 팀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김한수 감독이 현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은 과도기라고 본다. 더 처절하게 느끼고 깨닫고 배워나가다 보면 이전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라고 믿는다.”


청소년드림페스티벌

야구 외에도 재단을 통해 유소년 야구와 소외 계층 아이들을 위한 재능 기부 행사를 많이 하고 있다.
“사실 은퇴 후 진로가 지금의 모습은 아니었다. 곧장 메이저리그로 가서 지도자 과정을 밟으려 했다. 은퇴식 경기 때 얻은 3000만 원의 수익금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팬들이 은퇴 경기를 보기 위해 티켓을 사줬고 수익금이 3000만 원이나 됐는데, 그 돈을 허투루 쓸 수가 없었다. 좀 더 의미 있는 곳에 쓰자 싶어 청소년 야구대회를 개최했다. 그게 청소년드림페스티벌인데 올해로 8회를 맞았다.”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나.
“왜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겠나. 그것도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내가 하는 일에 더 집중하고 싶다. 내가 운영하는 구단이 6개나 된다. 어린아이부터 청소년까지 구단 선수로 뛰고 있다. 이 일이 힘들면서도 보람이 넘친다. 애들이 나한테 주는 에너지가 굉장히 크다. 내가 자식은 없지만 자식 키우는 게 이런 마음인 것 같다. 내가 하는 건 프로야구 선수를 키우는 게 아니다. 야구를 배우며 인성도 가르치고 예절, 자립심도 갖게 만든다. 스포츠를 통해 바른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운영하나.
“후원이 대부분이다. 선수 때는 항상 받기만 했는데 지금은 사람들을 만나 아쉬운 소리를 하고 다닌다. 후원을 받으려면 다섯 번 이상은 만나야 한다. 부탁했다가 거절당하면 정말 비참하다. 은퇴 후 7년 동안 재단 관련 행사를 하면서 아이들 부모로부터 단 10원도 받지 않았다. 야구장비, 숙박비, 경비, 모든 걸 재단에서 지원했다. 스포츠 재단 중에선 우리가 가장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고 자부한다. 시간이 갈수록 후원자가 늘어야 하는데 갈수록 후원자가 줄어 안타깝다.”

후원의 손길이 줄어들면 운영이 어렵지 않나.
“스폰서들은 도움을 주면 효과를 기대하는데 우리 일이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가 나타나기 어렵다 보니 조금씩 후원이 줄어들더라. 몇 년 전 청소년드림페스티벌 축제를 앞두고 여성가족부의 후원을 받으려고 3년간 문을 두드려 겨우 관계자를 만날 수 있었다. 청소년 축제라 여가부로부터 후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여가부에서 청소년을 위해 쓸 수 있는 1년 예산이 고작 9억 원이라고 하더라. 정말 황당했다. 정부가 청소년들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천생 야구인

그러면 비용은 어떻게 충당하나.
“재단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자선골프대회도 열고, 광고도 찍고, 방송도 한다. 최근 후배들도 적극 나서고 있다. 최형우가 FA 계약하면서 2억 원을 기부했다. 최정(SK)도 적극 도움을 주고 있다. 야구로 받은 혜택을 야구에 돌려주겠다는 취지였다. 후배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됐다. 그럴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언제까지 재단을 운영할 예정인가.
“죽을 때까지 할 것이다. 은퇴 후 방향을 잘 잡았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면 이렇게 쓰고 싶었다. 진짜 보람이 크다. 아이들한테 꿈을 심어주고 그런 꿈을 키운 아이들이 야구선수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양준혁은 인터뷰 말미에 KBO와 대한야구협회, 대한소프트볼협회를 향해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흥행과 인기가 보장되는 클럽 위주의 리틀야구 리그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초등학교 야구부, 즉 엘리트 야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내용이었다. 야구 관련 단체에서 초등학교 야구부를 살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하지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그는 “초등학교 야구부가 성장 발전하지 못하면 재능 있는 프로야구 선수가 나오기 어렵다. 야구를 클럽화하는 건 찬성이지만 엘리트 야구도 함께 성장해야 한다. 그게 프로야구의 자양분이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천생 야구인, 양준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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