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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高麗의 거란 견제 덕에 宋, 통일 대업 이뤄내다

  • 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高麗의 거란 견제 덕에 宋, 통일 대업 이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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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의 난에 개입한 위구르

위구르의 카를룩 가한은 아들 타르두슈 빌게에게 4만 기(騎)의 말을 주어 당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757년 9월 당나라-위구르 연합군은 안경서군을 공격해 6만 명을 참수(斬首)하는 대승을 거두고 해족(奚族) 군단이 지키던 장안을 빼앗았다.

장안과 낙양을 잃은 안경서는 허베이의 업(鄴)으로 후퇴했다. 758년 9월 곽자의가 지휘하는 20만 당나라-위구르 연합군이 업으로 진격해오자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중앙아시아 샤흐리 샤브즈(史國) 출신 사사명은 이때 13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어 안경서보다 세력이 컸다. 사사명은 안경서를 위기에서 구해줬으나 이듬해 3월 안경서로부터 양위를 받은 다음 그를 살해했다. 불과 2년 후인 761년 3월 사사명도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피살돼 사조의가 황제로 즉위했다.

762년 4월 당나라 숙종이 환관에게 시해되고 아들 이숙이 대종(代宗)으로 즉위했다. 대종은 토벌군을 일으키면서 위구르를 설득하고자 사신을 보냈다. 뵈귀 가한(타르두슈 빌게)이 사조의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히려 당나라를 공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대종은 발해에도 사신을 보내 발해왕을 왕(王)으로 정식 인정하는 등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당나라는 우여곡절 끝에 뵈귀 가한을 설득해 동맹을 다시 맺는 데 성공했으며 당나라-위구르 연합군은 사조의군을 대파했다.

그해 10월 다시 낙양에 입성한 위구르군은 약탈과 방화, 살육을 자행했다. 763년 1월 사조의는 달아나다가 안록산의 부하이던 이회선에게 죽임을 당했다. 안록산의 난은 당나라의 내전인 동시에 위구르, 돌궐, 거란·해, 발해, 토번 등이 관련된 국제전이기도 했다. 당나라가 안·사의 난 후유증에 시달리던 763년 10월 간쑤 방면에서 남진해온 토번군은 장안을 약 보름간 점령했다가 후퇴했다.

안·사의 난으로 인해 시라무렌 강-다링허 유역의 거란 세력이 급성장했다. 안·사의 난 이후 덕종(德宗), 헌종(獻宗), 무종(武宗), 선종(宣宗) 등은 당나라의 급속한 쇠락을 막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덕종은 균전제에 기초한 조용조(租庸調)를 대신해 1년 2회 화폐로 세금을 걷는 양세법(兩稅法)을 도입하면서 재정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헌종은 819년 고구려계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 이사도(李師道)의 난을 평정한 후 절도사의 권한을 대폭 줄이는 등 군사력을 재건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발해·거란, 唐의 빈틈 노리다

안·사의 난 와중이던 761년 이사도의 조부 이회옥(李懷玉)은 반란군의 공세를 피해 고종사촌 후희일과 함께 2만여 병력을 이끌고 다링허 유역(평로)에서 보하이(渤海)를 건너 산둥반도에 상륙해 10여 개 주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당 조정은 이회옥(당 조정이 ‘정기’라는 이름을 하사)을 평로·치청(랴오시·산둥)절도사에 임명했다.

이정기는 산둥(齊)의 경제·군사·외교권을 장악했으며 점차 반당(反唐) 노선을 걸었다. 이정기는 777년 강남과 화북을 연결하는 요충지 쉬저우(徐州)를 포함한 5개 주를 추가 점령해 제나라(치청)를 최강 번진으로 만들었다. 아들 이납(李納)을 거쳐 806년 손자 이사도가 뒤를 이었다.

헌종은 투항해 온 번진들을 앞세워 815년 12월 이사도의 제나라 공격에 나섰다. 이사도는 당나라가 군수물자를 저장해놓은 하음창을 불사르는 등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장화이(江淮)와 허베이 번진 거의 전부가 당 조정에 가담하자 이사도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협공을 받은 이사도는 819년 위박(魏博) 번진 전홍정과의 산둥성 서부 운주·동아 전투에서 대패했으며 부하 유오(劉悟)가 이사도를 죽이고 투항했다. 이로써 765~819년 55년간이나 지속되던 이정기 일가의 제나라는 멸망했다.

덕종, 헌종, 무종 등의 노력에도 당나라는 무조(武照·측천무후) 초기나 현종 전반기와 같은 성세(盛世)를 회복할 수 없었다. 토번, 위구르, 거란, 남조, 발해 같은 인접국이 기울어가는 당나라의 빈틈을 노렸다.

이렇듯 극도의 위기상황임에도 당에서는 우승유가 대표하는 신진 관료와 이덕유가 대표하는 보수 관료 간 대립인 우·이(牛·李) 당쟁이 나날이 격화됐다. 40년간 계속된 우·이 당쟁은 환관의 정권 장악을 야기했다. 현종 때부터 영향력을 키워온 환관은 금군(禁軍)을 배경으로 황제를 옹립하기도 하고 폐립·독살하기도 할 만큼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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