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태일 수기(왼쪽)와 평화시장 르포를 실은 ‘신동아’ 1971년 1월호, ‘그 후의 평화시장’ 르포가 실린 1971년 3월호.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강성재 기자(1939~2002)는 ‘신동아’ 1971년 3월호에 실린 르포 ‘그 후의 평화시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스물세 살 청년 전태일은 그을음과 불길로 얼굴은 새까맣게 뒤범벅이었으나 눈동자만은 쏘는 듯한 빛을 내면서 헐떡거리던 숨을 잡고 비틀거리는 상체를 가누면서 울음 같은 것이 섞인 목소리로 외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결코 기계가 아니다.”
‘신동아’ 1971년 1월호는 전태일 수기(手記)를 실었다. 수기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이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기억해주기 바라네.”
‘이 순간의 나’를 기억해달라면서 전태일이 불타 죽은 지 40년. 11월13일 마석모란공원(경기 남양주시)에서 열린 40주기 추도식은 경건했다. 지금껏 사람들은 ‘그 순간의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때 그 사람들
혜화동(서울 종로구) 옛 서울대 교정에서 남쪽으로 10분 남짓 걸으면 청계천이다. 학생들에게 전태일 분신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장기표(65), 조영래(1947~1990·변호사)가 몸담은 ‘사회법학회’, 김근태(63·민주당 상임고문)가 주축이던 ‘경제복지’ 회원들은 앞 다퉈 전태일을 추모하는 집회를 열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김문수(59·경기지사)는 수기를 읽고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1985년)으로도 일했다. 전태일 분신 40주년 소감을 묻는 ‘신동아’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사건이 일어났어요. 대단한 충격이었죠. 처음엔 청계노조 간부들에게 한자와 상식을 가르쳐주기로 했으나, 막상 노동자들을 만난 뒤부터는 오히려 내가 현장을 배워야 했어요. 그가 분신한 지 40년, 그동안 어려운 이들을 위해 정치를 해왔지만 치열함과 자기 헌신 부분에서는 항상 그에게 부끄러웠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전태일은 나에게 채찍 같은 존재였어요. 배우지 못해, 한자로만 쓰인 근로기준법을 읽지 못해,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하던 전태일의 아쉬움을 생각하며 어려운 노동형제들의 곁을 떠날 수 없었어요. 가난하면서도 더 가난한 미싱사, 시다를 돌보는 그의 사랑 실천은 언제나 나에게 채찍입니다. 그는 늘 일기를 적었습니다. 일기는 이웃 사랑 정신, 어려운 이를 돌보는 정신으로 일관하고 있어요.”
그가 덧붙여 말했다.
“더 이상 전태일을 1970년대 시각에서 바라보면 안 됩니다. 시대가 달라진 만큼 한국적 상황과 전태일의 시대정신이 결합돼야 해요.”
김문수와 같은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도 전태일 정신을 품에 안고 있다.
손학규(63·민주당 대표)는 11월13일 마석모란공원(경기 남양주시)에서 엄수(嚴修)한 40주기 추모 행사에 참석했다. 정치학도이던 손학규도 전태일 분신에 자극받아 노동현장에 몸을 던졌다. 탄광·공장 노동자를 거쳐 청계천에서 빈민운동을 했다.
손학규는 10년 전 전태일 30주기 때 ‘신동아’ 인터뷰에서 지금의 정치 지향과는 다르게 말했다.
“1970년대는 노동문제가 가장 뜨거운 화두였지만 지금은 국가경쟁력의 시대입니다. 노동의 내용과 질이 달라졌기 때문에 양극화된 투쟁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합이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