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부턴가 음악 하는 사람들, 특히 대중음악을 하는 이들도 ‘예술가’라는 자명한 사실이 사실이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가요는,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는 K-Pop(Korean Pop Music)이라고도 하는 한국의 대중음악은 이제 ‘산업’의 영역에 속한다. 모두들 아이돌 그룹의 해외진출을 통해 벌어들이는 외화 규모가 얼마인지, 이를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제적 이미지가 얼마나 향상됐는지 가늠하기 바쁘다. 아시아를 휩쓰는 신(新) 한류열풍의 비결은 철저한 매니지먼트와 손끝 각도까지 맞춘 완벽한 퍼포먼스의 힘이지, ‘세월의 무게를 이겨낸 작품으로서의 음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시대다.
엄인호, 최이철, 주찬권. 50대 후반이라는 적잖은 나이에 접어든 세 사람이 모여 ‘슈퍼세션’이라는 이름의 음반을 만들고 공연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1970~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정점을 이끌었던 이들 밴드의 시대는 대중음악가가 예술가임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비록 권력은 그들의 음악을 반기지 않았고 이들의 모습을 대중매체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았지만,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들의 음악은 긴 시간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며 시간의 왕관을 썼다.
30년의 세월

1970년대 후반 방송국에서 오가며 스치듯 첫 인연을 맺었다는 이들이 함께 보낸 시간은 어느새 30여 년. 기타리스트 최이철이 키보디스트 김명곤과 함께 한국 최고의 연주밴드라고 칭송받은 밴드 사랑과 평화를 결성한 것이 1977년이었고, 지방에서 DJ를 하던 엄인호가 서울에 올라와 이정선, 이광조와 트리오를 결성한 것이 1978년이었다. 드러머 주찬권은 1981년 데뷔해 5년 뒤 들국화에 정규멤버로 참여해 전성기를 함께했다.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도 조인트 콘서트를 연 적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한 무대에 선 것은 1990년 김현식이 죽고 그 추모 콘서트를 할 때였죠. 모두들 현식이와는 관계가 깊었으니까. 이번에 다시 같이 판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는 기획자의 제안이 왔을 때는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웃음) 꼭 잘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요즘 같은 아이돌 판에 우리가 끼어들 자리가 있겠나 싶기도 했고…. ”(최이철)
그러나 오랜 인연은 힘이 센 법이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며 살아온 이들의 경험은 눈빛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주기 마련. 이들이 함께 모여 10월 하순 완성한 음반 속의 노래와 연주곡이 대부분 한꺼번에 부스에 들어가 동시에 연주하는 방식으로 레코딩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마주 보며 호흡을 일치시켜 문자 그대로 ‘합주’해낸 음악. “한 번에 쫙 뽑아내야 명곡이지 자꾸 다시 꺼내 손보면 짜맞추게 돼서 진짜가 안 나온다”는 말은 관록의 노장들이 아니고서는 쉽게 할 수 없을 터다.
그 덕분일까. 첫 곡 ‘Again’부터 14번째 마지막 트랙 ‘Feather’에 이르기까지, 음반은 옆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한 현장감으로 가득하다. 악기별로 채널을 쪼개어 한 사람씩 따로 녹음하는 통상의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느낌. 높은 음이 올라가지 않는 가수의 목소리를 컴퓨터로 보정해 가창의 달인으로 만들거나, 복잡한 음향효과로 부실한 연주를 화려하기 짝이 없는 애드리브로 탈바꿈하는 일이 다반사가 돼버린 이 기계음의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