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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논픽션 공모 우수작

땅문서에 이름표를 달아줘

  • 김상인

땅문서에 이름표를 달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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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문서에 이름표를  달아줘

일러스트·조은명

“연무에 황사까지 궂은 날씨군요. 차장님 오늘 일정은 변경해야 할 것 같은데요.”

2003년 어느 봄날, 2층 사무실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김훈병 차석이 던진 말이다.

“어제도 기점(측량의 기준이 되는 지점)을 못 잡아서 경계측량 신청인에게 사과했잖아. 자꾸 미결업무가 늘어나면 안 되지. 측량 장비하고 마스크나 잘 챙겨.”

지시는 했지만, 나 역시 바깥일이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전 9시가 넘었는데도 햇빛이 보이지 않았다. 찌푸린 날씨는 오히려 점점 더 우중충해지는 듯했다. 봄 가뭄이 계속되고, 합천댐이 생기면서부터 안개 끼는 날이 많아졌다. 다른 팀들도 망설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마냥 사무실 형광등에 도면만 비춰볼 수는 없는 노릇. 소장님도 조바심이 났는지 1층 소장실에서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밟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문을 열리자 이내 하소연 소리가 들린다.

“비가 오면 또 측량 못할 거 아닙니까? 봄이라 신축 건물은 늘고 측량 의뢰인들은 목 빼고 기다리고 있어요. 여기 5팀이 업무 처리를 못하면 내가 괴로워서 죽을 지경입니다. 제발 현장으로 나가세요!”



반쯤은 쫓겨나다시피 나온 우리 팀 막내 윤환현이 차 트렁크에 경위의(經緯儀·측량에 사용하는 도구)를 실으며 한마디 던졌다.

“지척에 있는 사람 얼굴도 못 알아보겠는데 무슨 재주로 측량을 하라는 거야.”

나는 차 미등을 켜고 서서히 운전을 시작하면서 말했다.

“네 얼굴에 점까지 보이는데 무슨 소리야. 차석과 막내, 내 말 잘 들어. 소장님이 나한테 불만이 많은 거야. 어제 일도 그렇고. 할 수 없지.”

“그게 어디 차장님 잘못입니까? 수목이 울창한 산골짜기라 하루 만에 측량할 수 없었잖아요.”

차석과 막내는 합창이라도 하듯 말했다.

“나를 설득하려 하지 마. 다른 팀은 어떻게든 하루에 2건 이상씩 측량을 마치고 오잖아. 수석팀에서 그에 못 미치니 못 마땅한 거 아니겠어?”

안개 속에서 미로를 헤매듯 운전하는 내가 염려스러운지 두 팀원이 동시에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는 모습이 운전석 거울에 비쳤다.

“괜찮아, 이래봬도 운전경력 15년이야. 눈이 밝아 측량도 10년은 더 할 수 있을 거야.”

그러자 차석이 말을 좀 해도 되겠다 싶었는지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차장님 궁금한 게 있어요. 지적공사 거창출장소에 팀이 다섯 개 있잖아요. 그런데 소장님은 꼭 어려운 업무를 우리 팀에 맡기거든요. 그래 놓고 평균 처리건수로 다른 팀과 비교하잖아요. 오늘 측량할 성산마을만 봐도 도면이나 측량증거문서 같은 과거 자료가 전혀 없어요. 기점부터 잡아야 하는데 이렇게 시계(視界)가 맑지 않으니 대략 난감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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