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한국에서 이주민으로 산다는 것

“엄마가 돈 벌러 왔지? 어서 돌아가라”

  • 육성철│국가인권위원회 사무관 ysreporter@yahoo.co.kr│

    입력2010-12-03 17: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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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이주민으로 산다는 것
    11월의 첫 주말, 경기 광명시 성애병원 영안실을 찾았다. 출입국사무소의 집중단속을 피해 건물에서 뛰어내리다 사망한 베트남 노동자를 조문하기 위해서였다. 8년 전 입국해 일용잡부로 살아온 두안의 빈소를 스물아홉 살 아내 난이 지키고 있었다. 태어난 지 4개월 된 딸 투이용은 아빠의 영정 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두안과 함께 일하던 베트남 미등록 노동자들은 빈소를 찾지 못했다. 두안이 죽던 날 2명은 도망쳤고, 2명은 체포된 탓이다.

    두안의 마지막 길은 베트남 식을 따랐다. 아내는 몸소 수의를 지었고, 제단엔 가짜 돈을 수북이 쌓았다. 두안의 동료들은 가짜 돈을 뿌리며 고인을 위로할 거라고 말했다. 돈 벌러 왔다가 돈 때문에 죽은 사람을 돈으로 이별하는 의식이라 했다. 두안은 살아서 한 달에 130만원을 벌었다. 미등록 노동자였기에 단속이 뜨면 며칠씩 일을 쉬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아내는 돈을 모아 베트남에 땅을 사두었다. 이제 아내는 그 땅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

    한국말이 서툰 아내에게 “살아보니 한국이 어떠하더냐?”고 물었다. 결혼 1년 만에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은 아내의 입에서 “행복하고 좋은 나라”라는 대답이 나왔다.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했고 돈을 벌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1년 전 난은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도 비자가 없어서 출국하지 못했다. 이제 그는 위로금 몇 푼 받아 베트남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다. 그래도 한국이 좋다고 한다. 딱 하나, 남편을 앗아간 강제 단속은 싫다고 덧붙인다.

    행복하고 좋은 나라, 그러나…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지난해 100만명을 넘어섰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경쟁하듯이 다문화 사회를 외치고 있지만 아직도 갈길은 멀다. 이주노동자를 보호해야 할 출입국사무소에서 화재가 발생해 27명이 죽거나 다친 것이 3년 전이고, 토끼몰이식 대규모 단속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뒤집어쓴 것이 2년 전이다. 최근엔 서울 G20정상회의를 앞두고 전국적인 검거 열풍이 불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교도소 수용자처럼 꽁꽁 숨어버렸다.



    한국에 살면서도 한국인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미등록 이주노동자다. 그들은 똑같이 일하면서도 월급을 적게 받는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또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과 모욕을 감수한다. 그들은 은행이나 인터넷도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미등록’ 딱지를 물려받는다. 그래도 그들은 한국에서 계속 살겠다고 말한다. 아니, 여기서 살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루이는 18년간 한국에서 일했다. 그 사이 생후 45일 된 아들을 필리핀으로 보냈다. 2개월이 지나면 정식으로 출생등록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절차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갓난아기를 비행기에 태웠다. 그때부터 14년간 엄마는 아들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매일 인터넷으로 만나면서 커가는 아들을 확인할 뿐이다. 루이도 때로는 필리핀으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그러나 당분간 한국에 머물 수밖에 없다. 돈을 벌지 않는다면, 루이 가족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때문이다.

    남편 타니는 2008년 단속에 걸려 필리핀으로 출국했다. 그는 2010년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을 세웠다. 적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이 여권 이름을 바꿔서 입국하는 관행에 따라 수속을 밟았다. 그러나 타니는 인천국제공항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한 채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2010년 2월에 벌어진 일이다. 법무부는 그에게 사문서 위조 혐의를 적용해 5년간 입국금지를 통보했다. 이제 루이는 2015년이 돼야 타니를 만날 수 있다.

    14년 생이별

    오산에서 화성 쪽으로 달리다 야산으로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가면 산꼭대기에 컨테이너로 지은 공장이 있다. 브러시나 붓을 만들 때 필요한 나무 손잡이를 만드는 곳이다. 사장과 필리핀 미등록 노동자 2명이 여기서 일한다.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면 톱밥과 먼지가 가득하다. 루이는 이곳에서 면 마스크를 쓰고 온종일 나무를 자르고 반질반질하게 다듬는다. 마스크가 톱밥과 먼지를 막아주지 못하는 작업장에서 레아는 5년간 일해왔다.

    쪽문을 열고 두 번째 방으로 가면 시너 냄새가 코를 찌른다. 루이와 또 다른 필리핀 노동자가 다듬은 나무가 이곳으로 보내진다. 사장은 여기서 시너를 섞고 니스를 칠한다. 칠이 끝난 나무를 잠시 들여다보는 동안 현기증이 날 만큼 냄새가 지독했다. 사장은 작업할 때 방독면을 쓴다고 했다. 벽면에 환풍기가 있었지만 그것은 면 마스크만큼이나 믿을 게 못되는 물건으로 보였다.

    루이는 이곳으로 오기 전 다른 공장에서 8년간 일했다. 지금 일하는 공장의 사장 친척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 공장에서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루이는 지금보다 조금 나은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불의의 화재로 사장은 불에 타 죽었다. 그 후 남편은 다른 공장으로 옮겼고, 레아는 현재 일하는 곳으로 왔다.

    공장 사장은 루이의 이름 대신 “야, 이 새끼야”라고 부른다. 그 소리가 싫어서 공장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며칠 뒤 사장이 돌아오라고 했을 때, “아니요, 그건 사장이 잘못한 거예요. ‘이 새끼’ 같은 말을 하면 안돼요. 나쁜 말 하지 말아요”라고 대꾸했다. 그날 이후 사장은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 루이는 그것만으로도 한결 편안하다고 말한다.

    연하는 몽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에서 화학을 전공한 엘리트다. 의사인 아버지는 연하에게 교수의 길을 권했다. 그러나 러시아 유학 중 남편을 만나 아기를 임신하고 결혼했다. 유학을 마치고 몽골로 돌아온 연하는 제약회사에서 5년간 일했다. 이후 몽골이 IMF 경제위기를 겪게 되자 소개비 500달러를 내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직업소개소에서 만난 한국인 미스터 리는 한 달에 몇 백만원씩 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이 사기라는 걸 알기까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유리공장에 취직한 연하는 뒤늦게 미스터 리가 사장에게 돈을 받고 몽골인을 팔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뭔가 크게 잘못됐지만 한국말이 서툰 연하는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미스터 리는 돈을 챙겨 잠적한 뒤였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 아니다”

    연하는 우연히 몽골인들과 연락하다가 미스터 리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수소문 끝에 미스터 리가 20대 몽골 여성과 산다는 곳을 찾아갔다. 그러나 몽골 여인은 미스터 리가 더 이상 그곳에 오지 않는다고 했다. 연하는 몇 년 뒤 다시 몽골 여성을 찾아갔는데, 그날 미스터 리가 몽골, 필리핀, 중국 등을 돌면서 동일한 방법으로 취업사기를 치다가 중국 마피아에게 살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들을 몽골에서 데려왔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아들을 맡길 곳이 없어 아침에 출근하면서 하루 동안 먹을 음식과 과자, 장난감 그리고 변기통을 넣고 문을 잠갔다. 일하다가 걱정되면 화장실에 간다고 거짓말하고 달려와 아들을 보았다. 그러나 방에 들어갈 시간이 없어 창문으로만 훔쳐보고 다시 공장으로 뛰어갔다. 행여 아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아들이 펑펑 울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연하의 아들은 요즘 사춘기를 겪고 있다. 아들도 미등록이라 항상 불안해하는 눈치지만 엄마로서 이 문제를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 건드려봐야 대책은 없고 상처만 날까 싶어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다. 아들은 대학에 가고 싶어하지만 갈 수 있을지 미지수고, 설사 간다 해도 등록금을 댈 형편이 못된다. 이래저래 아들의 미래는 막막하다.

    아들은 몽골어를 못한다. 엄마는 먹고 살기 바빠 가르칠 시간이 없었다. 이제 와 후회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다. 아들은 한국에서 살고 싶어한다. 몽골 음식도 먹지 못한다. 아들은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을 뿐이지 몸도 마음도 다 한국인이다. 심지어 한국을 자기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의 꿈은 아들이 또래의 한국 젊은이들처럼 직장을 다니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주민으로 산다는 것

    이주민은 대게 3D업종에서 일한다.

    한국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미등록 이주민들에게는 해결 불가능한 숙제다. 그들은 그 흔한 인터넷 접속도 어렵다. 이동통신 가입도, 은행통장 개설도 불가능하다. 한국인에게 부탁해 겨우 연결하지만, 만약 고장이라도 나면 난감해진다. 도와준 사람을 계속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국인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했다. 사고방지를 위해 카드를 발급받지 않아, 통장으로만 거래가 가능했다. 그런데 소액을 인출하다보니 통장 페이지가 부족해 돈을 인출할 수 없었다. 당장 돈이 필요해서 다급하게 명의자에게 전화하니 그는 하필 지방에 가고 없었다. 연하는 그가 올 때까지 돈 한 푼 없이 기다려야 했다.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연하는 말한다. 미등록 이주민들이 돈을 달라는 것도, 집을 달라는 것도 아니라고. 그저 사람처럼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거라고. 한국 사회가 이주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이주노동자들이 힘든 일을 대신 해주었으니 그저 보통 사람처럼만 살게 해달라고. 그녀는 또 말한다. 신분증이 없는, “나와 내 아들은 한국에서 사람이 아니다”라고.

    주비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다. 지금 그의 곁엔 남편이 없다. 대신 열 살짜리 씩씩한 아들 레폰이 있다. 남편은 8년간 플라스틱 사출공장에서 일하다 다른 회사로 옮긴 지 7일 만에 사망했다. 사인은 뇌출혈이다. 주비는 안다. 남편은 부인의 입국비용과 생활비,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밤낮 안 가리고 몸을 부리다가 과로로 쓰러졌다는 것을. 그러나 사장은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레폰은 주비가 한국에 입국한 지 2년 만에 태어난 아들이다. 1.7㎏으로 세상에 나와 한동안 인큐베이터에서 살았다. 월급 130만원을 아껴서 한푼 두푼 모아둔 목돈 1500만원을 고스란히 병원비로 지급했다. 겨우 인큐베이터에서 나왔지만 아직도 심장과 간에 이상이 있다. 2005년 잠시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행을 결심한 것도 레폰의 치료 때문이었다.

    레폰은 지난해까지도 아이들로부터 “너희 엄마는 한국에 돈 벌러 왔지? 어서 돌아가라”며 놀림을 받곤 했다. 그래서일까? 레폰이 유일하게 받은 사교육은 태권도였다. 월 9만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지만 주비는 이 돈이 아깝지 않았다. 방글라데시 음식보다 미역국과 된장국을 좋아하는 아이, 한국말을 잘하냐고 묻기가 무색할 정도로 유창한 다국어 습득자, 피부색만 다를 뿐,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그 아이에게 미등록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국적이 어디냐고 묻는 것 자체가 어쩐지 폭력 같다.

    주비는 야간에 일한다. 그래서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레폰은 혼자 지낸다. 주로 TV를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잠든다. 주비는 아침에 돌아와 잠든 레폰을 볼 때가 가장 속상하다. 낮에 외출할 때면 주비는 항상 레폰과 함께 다닌다. 아이가 같이 있으면 단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레폰도 그걸 잘 안다. 그래서 앞길에만 나가도 레폰은 엄마 옆에 바짝 붙는다. 레폰은 매일 아침 기도한다. “하느님, 오늘도 엄마가 잡혀가지 않게 해주세요.”

    사고 그리고 임금체불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부부 하삐와 시먼은 잔업도 마다않고 열심히 일했다. 일이 끝나면 그대로 쓰러져 자고, 다음날 또 기계처럼 일어나 일하는 나날이었다. 한국인들은 ‘빨리빨리, 부지런히’라는 말을 좋아했다. 방글라데시와 너무 달랐다. 하지만 이 정도 고생쯤은 장밋빛 미래를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다. 그렇게 4년이 흘러 브로커 비용을 다 갚고, 방글라데시에 조그마한 땅도 사놓았다. 부모님께 제법 적지 않은 돈도 송금할 수 있었다.

    그러다 시먼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길을 걷고 있는데 느닷없이 오토바이가 들이박은 것이다. 이 사고로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자르고 복원 수술을 받았다. 시먼이 1년 동안 병원에 있어 하삐도 간병을 하느라 일을 접었다. 그때는 산재보상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병원비를 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시먼의 다리에는 철심이 박혀 있다.

    부부가 다시 일을 시작한 뒤에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월급이 조금씩 체불됐기 때문이다. 월급을 재촉하면 사장은 걱정 말라고 했다. 공장이 문을 닫고 다른 공장으로 옮길 때까지도 사장을 믿었다. 그런데 공장을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사장은 폐업 처리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설상가상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도 3000만원 이상 임금이 체불됐다. 미등록이라 노동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했다.

    부부의 상처는 더 있다. 어렵게 생긴 아이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겪고 있는 고통이 그것이다. 13년 만에 얻은 아기는 여자 쌍둥이다. 두 아이 모두 저체중에 병을 갖고 태어났다. 하삐가 산후조리를 하고 있는 쉼터 문을 열자마자 갓난아기가 배냇짓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큐베이터에서 나와 호흡기를 뗀 지 딱 하루를 넘긴 상태였다. 부부는 이렇게라도 숨이 붙어있는 것이 눈물겹게 고맙다고 했다.

    아이들 병원비로 무려 1억원이 나왔다. 너무 큰돈이라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한 아이가 아직도 인큐베이터에 있기 때문에 날마다 병원비가 쌓여간다. 다행히 병원에서 운영하는 의료지원 프로그램으로 3000만원이 감면됐고, 안타까운 사연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성금도 들어왔다. 하삐의 가족들도 방글라데시에서 1000만원을 보내왔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보험과 아름다운 재단에서도 일부 지원을 받았다. 그래도 1000만 원 이상은 부부가 해결해야 한다. 체불된 임금만 아니었더라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찰 아저씨, 내가 때려줄 거야”

    한국에서 이주민으로 산다는 것

    1960~1970년대를 연상케 하는 이주민 거주 주택

    자쿠나와 멀론은 방글라데시에서부터 아는 사이였다. 멀론이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같은 동네에 사는 자쿠나를 만났다. 멀론이 1999년 먼저 한국에 왔다. 그들은 전화로 결혼했다. 결혼을 증언할 3인이 동석한 가운데 주례가 양쪽의 결혼의사를 묻고 전화로 성혼 선언을 하는 것이다. 3인의 증인은 각각 결혼서약서에 사인했다. 결혼하던 해 자쿠나도 한국으로 왔다. 전화결혼은 외국에 나간 방글라데시 연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자쿠나는 2007년 아들 뚜니를 낳았다. 뚜니는 네팔 여자 친구와 아주 친하다. 둘이 서로 “여보”라고 부르며 논다. 바로 앞집에 살아서 항상 같이 지낸다. 뚜니는 자신을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도, “엄마는 방글라데시 사람이니까 손으로 먹고, 나는 한국 사람이니까 숟가락으로 먹을 거야”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아기가 늦어졌다고 말한다. 입국 초기엔 둘이 같이 일하던 공장의 사장이 1000여 만원의 임금을 주지 않고 도망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 사람들은 모두 돈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공장에 불을 질러 경찰이 출동했는데, 그때 임금체불 사실을 말하자 경찰이 다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쿠나와 멀론 같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그 자리에 나설 수 없었고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2008년 11월 남양주 마석 가구공단 외국인노동자 일제단속 때 멀론과 자쿠나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단속이 끝날 때까지 창문 밑에서 숨죽이고 숨어 있었다. 동료들 중에는 산으로 도망쳤다가 며칠 만에 돌아온 사람도 있다. 자쿠나와 멀론은 운 좋게 잡히지 않았지만 그날 많은 친구가 붙잡혀 강제 출국됐다.

    그 사건 이후 뚜니도 단속이 뭔지 알고 무서워한다. 단속 정보가 뜨면 이주노동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공포에 질린다. 어디서 누군가 잡혔다는 연락이 오면 곧바로 도망친다. 어떤 날은 뚜니가 직접 전화로, “아빠, 오렌지 아울렛에 가지마. 단속 나왔어”라고 알려주기도 한다. 뚜니는 요즘 경찰차가 지나가기만 해도 무서워한다. “경찰 아저씨, 내가 때려줄 거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쿠나는 내년쯤 뚜니와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러나 뚜니는 방글라데시로 가기 싫어한다. 그래서 엄마는 고민이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돌아갈 것이냐, 비자도 없이 한국에 머물 것이냐. 어느 쪽이든 마음 한구석이 시원치 않다. 아마도 엄마는 아들과 함께 돌아가고 아빠는 한국에서 계속 돈을 벌 것 같다. 엄마는 방글라데시에서 아들을 의사로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약국과 병원 갈 때도 단속 공포

    한국에서 이주민으로 산다는 것

    이주민 자녀들의 삶도 고달프다.

    파시는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말을 듣고 소개비 1000만원을 들여 3개월 관광비자로 입국했다. 비자가 만료되면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사정했다. 그러면 1개월에서 3개월까지 직원이 맘대로 연장해준다. 라코스는 3개월 비즈니스비자로 입국했다. 소개비 1000만원은 본국의 땅과 금을 팔아서 마련했다. 파시는 한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라코스를 만났다. 그들은 그해 마석의 이슬람 기도방에서 결혼했다.

    파시는 몸이 아프다.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신장 이상을 발견했다. 일터에 먼지가 많고 몸 관리를 잘하지 못해 병이 생긴 것 같다. 9일간 입원하고 120만원을 지급했다. 지금도 검사를 계속 받는데 한번 병원에 갈 때마다 20만원 정도 든다. 몸이 안 좋을 때는 매주 진료를 받아야 한다. 언제 완치될지는 알 수 없다.

    라코스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화물차와 충돌하는 사고도 당했다. 한쪽 다리가 부러져 3개월간 입원하고 7개월이나 일을 못했다. 보험이 없어 이주민단체의 도움을 받았다. 상대방이 치료비도 안 주려 했는데 이주민 인권운동을 하는 신부님이 나서서 받아주었다.

    파시는 병원에 갈 때도 단속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꼭 이주민단체 사람들과 함께 움직인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단속은 거의 공포 수준이다. 파시의 시동생은 약국에서 나오다가 단속에 걸렸다. 마치 잠복근무를 하는 것처럼 약국 문을 여는 순간,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 다가와서 붙잡았다. 그 현장에 파시도 함께 있었다. 파시가 애절한 표정으로 “아이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가는 길”이라고 말하자 출입국 직원이 파시만 보내주었다. 시동생은 그길로 바로 추방되었다.

    파시와 라코스는 가구공장에서 일한다. 2005년 두 사람 사이에서 딸 미치가 태어났다. 파시는 딸을 낳고 1년 정도 집에 있었다. 라코스의 한 달 월급은 140만원, 파시는 110만원이다. 야근하면 180만~190만원 정도 된다. 두 사람은 점심 도시락을 준비한다. 그러면 점심값 10만원을 아낄 수 있다. 한국 음식에 돼지고기가 많다보니 식당에서 밥을 먹기 힘들다. 둘 다 무슬림이기에 음식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당장 저축할 여유가 없다. 2년 전까지는 생활비를 제외하고 모두 송금했다. 요사이는 형편 되는 대로 20만~30만원씩 보낸다. 그 돈으로 방글라데시에 집과 가게를 사두었다. 훗날 방글라데시로 돌아간다면 그곳에서 신발가게나 옷가게를 열고 싶다.

    베트남의 호텔 맞선, 폭행, 이혼…

    지난 7월 부산에서는 베트남 신부 탓티황옥씨가 한국인 남편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집온 지 8일밖에 되지 않은 스무 살 여성이 정신분열증을 숨긴 채 결혼한 남성에게 희생당하면서 브로커를 통한 국제결혼에 대한 비난 여론이 확산됐다. 사실상 인신매매나 다름없는 ‘결혼원정단’이 성행하는 현실에서 유사한 비극은 언제든 재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베트남인 투치는 2003년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한국인과 결혼했다.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중2까지만 학교를 다니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일을 시작했다. 19세 되던 해부터는 호치민에 있는 신발공장에서 일했다. 그때 집에 빚이 한국 돈으로 100만원 정도 있었다. 당시 투치의 나이 스물한 살. 한국 가서 아이 낳고 열심히 돈 벌어 베트남 가족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베트남 여인 여럿이 호텔에서 머물면서 한국에서 원정 온 남자들과 맞선을 봤다. 날마다 맞선 자리에 나갔지만 번번이 성사되지 않았다. 20일이 지나도록 짝을 만나지 못하다보니 초조해졌다. 그때 51세의 남자가 나타났다. 나이도 많고 성격도 맞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결혼중개업체 사람이 “이번에 성사되지 않으면 20일 동안의 호텔비와 식비를 모두 내야 된다”고 했다. 20일치 호텔 비용은 호치민 신발공장에서 몇 달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그렇게 한국인과의 결혼생활이 시작됐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남편의 이유 없는 폭력이 이어졌다. 너무 무서워서 여성쉼터로 도망을 갔다. 그러자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도주했다며 신고하더니 이혼소송까지 제기했다. 남편이 양육 의사가 없다는 걸 확인한 투치는 아이를 데리고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투치는 세 살짜리 아들을 베트남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돈을 벌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왔다.

    그 사이 비자발급과 아들의 양육권 및 친권을 찾아주겠다는 베트남 사람의 말을 믿고 400만원을 줬지만 사기였다. 투치는 지금 남편을 상대로 친권 및 양육권 청구 소송을 벌이고 있다. 남편은 법원에서 주라고 판결한 위자료도 지급하지 않았고 아들을 양육하지도 않았다. 남편은 최근에도 또 다른 베트남 여인과 결혼했고 그 여인도 똑같이 폭행을 당해 이혼소송을 벌이고 있다.

    투치가 만약 소송에서 진다면 아들을 남편에게 넘겨주고 혼자 떠나야 한다. 어렵게 소송에서 이긴다면 아들이 클 때까지 만이라도 한국에서 살고 싶다. 아들이 직장에 취업한 이후에도 계속 한국에서 살겠다면 그때 투치는 혼자서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단다. 투치는 이제 한국인도 베트남인도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전라도 아줌마처럼 받아주면 좋겠어요

    아리나는 스리랑카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디자인학을 공부했다. 1999년 3개월 동안 디자이너로서 원단을 전달하고 오더를 받기 위해 한국에 처음 왔다. 이후 한국을 자주 드나들며 월세로 살다가 주인아주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소개해줘 연애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동거했고, 이듬해 스리랑카에서 결혼했다.

    아리나의 남편은 조용한 사람이다. 가끔씩 소주를 사와 집에서 먹고 잔다. 술 1병 먹으면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남편은 장남으로 집안의 동생들을 돌보는데 1억원이나 빌리고도 아리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리나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무시당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이유가 뭘까? 여자라서? 외국인이라서? 아리나는 둘 다라고 생각한다.

    아리나는 매사에 적극적이다. 한국에서 사는 게 즐겁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회활동에도 열심이다. TV 프로그램 ‘러브인아시아’에 패널로 출연 중이며 다문화 강사, 통역 봉사활동도 한다. 사회적 기업에도 참여하고 봉사모임도 직접 만들어서 운영한다. 치매노인을 돌보는 단체도 조직했는데, 이주민 여성 회원이 10명이다.

    늘 씩씩하고 긍정적인 아리나도 한국인들의 인종차별 행태를 접하면 종종 마음이 상한다. 피부색이 검어서인지 지하철을 타면 아무도 옆자리에 앉지 않는다. 옆자리가 비더라도 그냥 가버리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스리랑카는 못사는 나라지? 스리랑카보다 여기가 더 좋지?”라며 대놓고 무시한다. 그럴 때마다 기운이 빠지고 화가 나지만 불편한 감정을 가슴에 오래 담아 두진 않는다.

    한국에서 이주민으로 산다는 것
    陸盛喆

    1969년 경기 안성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現 국가인권위원회 사무관

    저서 ‘백두대간 종주기 : 그곳에는 새로운 인생이 있다’ ‘세상을 향해 어퍼컷’ ‘왜 유럽축구가 더 재미있을까’


    얼마 전엔 아들 친구가 아들에게 “실룩실룩 나라에서 왔느냐, 왜 까맣게 생겼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들은 “까마면 사람 아니냐?”라고 대응했단다. 또 아들이 어떤 음식을 먹지 않으면 교사가 “아, 맞다. 너희 엄마가 외국인이라서 가리는구나”라고 말한단다. 아들은 보리차보다 생수를 좋아하는데 교사는 “엄마가 외국인이라서 보리차를 모르는구나”라고 말한 적도 있다. 학교에서 “다문화 가정 다 일어나봐” 라고 공개적으로 구분했을 때는 아들도 불편했고, 그 불편함이 아리나에게도 그대로 느껴졌다고 한다.

    아리나는 말한다. 더 이상 자신을 따로 떼어놓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냥 사투리 하는 전라도 아줌마처럼 받아주면 좋겠다고. 그녀는 태어난 곳이자 부모가 살고 있는 스리랑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결혼하고, 자식 낳고, 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바로 이곳이 그의 고향이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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