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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⑮

“일본인은 주자를 모르니 성리학으로 이끌어야겠소”

필담집을 통해 본 ‘완고한 조선’과 ‘유연한 일본’

  • 이경근│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원·국어국문학 openears@naver.com

“일본인은 주자를 모르니 성리학으로 이끌어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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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측 인물 중에서는 원중거(元重擧·1719~1790)가 주목된다. 제술관과 다른 두 서기보다 적극적으로 필담에 응했고,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펼쳤기 때문이다. 그는 32세에 사마시에 급제한 후 하급 관리로 근무하다가 1763년에 계미사절단 서기로 뽑혀 일본에 다녀왔다. 그 후 몇몇 관직을 거쳐 규장각에서 같은 서얼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등과 함께 ‘해동읍지’를 편찬하는 일에 참여했고, 목천(지금의 천안) 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당대 서얼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존경하는 어르신’이었다고 한다.

이 필담 기록은 무엇보다 원중거와 가쿠다이의 ‘학문’이 달랐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다음은 1763년 12월 28일 두 문사가 주고받은 필담의 일부. 필담 당시 가쿠다이는 55세, 원중거는 45세였다.

원중거: “이곳에도 마땅히 성리지학(性理之學)이 있겠지요? 과연 정주(程朱·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를 종주(宗主)로 삼는지요?”

가쿠다이: “이곳에도 성리지학이 있습니다…그러나 근세에는 도쿄에서 오규 소라이(荻生喇徠·1666~1728) 선생이 복고지학(復古之學)을 크게 창도해 해내(海內)를 휩쓸었습니다.”

원중거가 ‘마땅히 성리지학’이라고 자연스럽게 얘기하듯, 조선에서는 ‘성리학’만이 공인된 학문이었다. 그러나 18세기는 탈(脫)성리학 움직임이 왕성하게 일어난 시기였다. 조선에는 ‘실학’으로 통칭되는 학문이 성행했고 양명학과 서학도 들어와 있었다. 물론 관리 발탁시험은 성리학 과목으로 치렀으므로 성리학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조선의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원중거는 흔들림 없이 성리학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얼로서 어렵게 진출한 관직에 대한 애착일 수도 있고, 공식적인 사절로서 조선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당시 에도 막부의 공식적인 학문, 즉 관학(官學)도 성리학이었다. 그러나 가쿠다이 자신은 성리학이 아니라 ‘소라이학’을 지향하고 있다고 당당히 밝힌다. 조선처럼 성리학이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쿠다이는 핫도리 난가쿠의 제자이며 핫도리는 오규 소라이의 제자다. 즉 가쿠다이는 소라이학 학자였던 것이다. 이어지는 필담을 따라가보자.

원중거: “이들은 모두 정주(程朱)를 종주로 삼는지요?”

가쿠다이: “정주를 배척합니다. 선학(禪學)을 공부하는 것은 유자들이 취하지 않습니다. 소라이학은 고경(古經)을 종주로 삼지, 주해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고언(古言)을 가지고서 고경을 풀이하니 더 믿음직한 증거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원중거: “주해를 버리고서 경전을 읽는 것은 도와주는 이가 없는 소경과 같습니다. 정주의 학문은 해가 중천(中天)에 뜬 것 같으니 정주를 독실하게 믿지 않는 것은 모두 이단(異端)입니다.”

원중거는 소라이의 고학이 이정자(二程子)와 주자(朱子)를 종주로 삼는지 확인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고 가쿠다이는 정주 성리학은 ‘선학’이라고 단정하며, 배척하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송대(宋代)에 흥기한 성리학이 불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의 주석에는 불교적 요소가 많이 혼입되어 있었다. 원래 공맹(孔孟·공자와 맹자)의 유학은 ‘물 뿌려 청소하고 손님접대 잘하고, 어른께 나아가고 그 앞에서 물러나는’ 법을 가르쳤다. 생활에 밀착한 현실적인 성격이 그 특징이었다. 그런데 인도에서 들여온 불교는 현세를 넘고 생사를 넘어 우주 전체, 존재 전체를 이야기하면서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송대의 주희는 유학의 부흥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는데, 불교와 대결하기 위해 존재 전체와 개체를 연결하는 불교 논리를 유학 안에 받아들였다. 즉 성리학은 태생적으로 불교와 가까웠던 것이다. 따라서 성리학을 선학이라고 비난한 가쿠다이의 말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불교 가운데 선학은 우주를 구성하는 존재로서 마음의 작용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 성리학이 주장하는 ‘성즉리(性卽理)’ 역시 ‘나의 본성이 우주의 원리와 같다’는 것이다.

“정주 성리학 믿지 않으면 모두 이단”

소라이학은 유가 경전을 선진(先秦) 시대의 의미에 따라 풀이해 예악형정(禮樂刑政) 등의 제도적이고 실제적인 측면을 중시했다. 그래서 고학(古學), 혹은 복고학(復古學)으로 불린다. 특히 ‘순자 성악설’의 노선에서 유학을 해석함으로써, 유학에서 성리학적 심성론의 흔적을 거둬내고 정치를 도덕에서 분리했다. 소라이학이 유학 도덕주의를 넘어서 유학 전통을 정치철학으로 다시 읽으려고 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원중거 역시 물러서지 않고 ‘성리학적 주석의 도움 없이 유학 텍스트를 독해하는 것은 도와주는 이 없는 소경의 처지와 같다’는 비유를 동원하면서, 정주학을 신봉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이단(異端)이라고 선언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는 조선학계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가쿠다이는 이어지는 대화에서 돈독한 성리학자였다가 고학으로 돌아선 한 일본 학자의 예를 들어 자신 역시 그런 경우라고 말한다. 다음은 그에 대한 원중거의 반응이다.

원중거: “정주의 가르침에 어찌 의심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독서법 중 꼼꼼하고 자세하게 읽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힘써 실천할 것을 꼼꼼히 생각지도 못했으면서 의문부터 제기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병을 앓는 이가 바탕을 튼튼히 하지 않아서 감기가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명나라 유학자 가운데 육구연(陸九淵·1139~1192)을 따르는 이들이 바로 이와 같은 기습(氣習)에 빠져 있습니다. 이제 귀국을 보니 인재가 배출되어 큰 전환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근원이 바르지 못하면 실로 무수한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처럼 덕이 깊고 배움이 바른 분께서 근원을 살펴보시고 후학을 인도해 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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