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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히마르, 노인과 바다를 찾아서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코히마르, 노인과 바다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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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소년과 청새치

노인의 이름은 라파엘이었다. 노인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소년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 것이었다. 소년은 소설이나 연극의 시작이나 끝에 등장하는 존재였다. 나는 소년이 어디로 갔는지 노인에게 묻지 않았다. 다만, 노인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생각들로 흘러온 그의 인생이 궁금했다. 마치 헤밍웨이가 이 마을에 와서 카를로스라는 늙은 어부를 만났을 때처럼. 그 어부로 인하여 불현듯 ‘멋진 이야기’(소설) 한 편을 쓰고 싶었던 것처럼. 나는 옷은 남루하고 얼굴은 ‘열대 바다가 반사한’ 강한 햇빛으로 그을고 심하게 주름졌지만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빛의 파란’ 노인에게 매혹됐다. 라파엘이라는 이름의 이 노인은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물고기들이 있다고 팔을 쭉 뻗어 보였다. 그는 그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그러니까 세상으로 튀어 오르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포구를 빠져나와 노인을 돌아다보니, 그는 여전히 바다의 한 지점을 응시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이라면, 그것도 노인의 기다림이라면 헤밍웨이만큼 통달한 작가도 없었다. 기다림이란 다혈질의 소유자로 낚시광이자 사냥광인 헤밍웨이가 특히 잘 다룰 수 있는 세계였다. 전부를 거는 모험과 도전이라는 극적인 경험을 누구보다 잘 체득한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기다림이라는 정적인 속성을 전복시킬 역동성을 품고 있는 적임자였다.

‘노인과 바다’의 세계는 단조롭게 시작해서 극적으로 치솟았다가 다시 단조롭게 잠잠해지는 양상이 아니던가. 이 작품은 1939년 헤밍웨이가 코히마르에 정착한 지 13년 되던 1952년에 발표한 장편이라기보다는 중편 분량의 소설이다. 작가는 한 번 스치듯 일별한 어떤 강렬한 이미지나 기운을 상상력으로 창조해내기도 하지만, 대개 그 작가의 이름을 건 문제작은 오랜 시간, 그곳의 대기와 토양,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 그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가 안으로 밖으로 옆으로 위로 성찰하며 씨실과 날실처럼 한 단어, 한 문장 뽑아 ‘한 편의 작품으로 짜내는 것(織造, texture)’이다. 13년째 이 마을에 살아온 헤밍웨이가 처음 이 소설을 착상하면서 벅차오르는 흥분감을 그대로 실어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아무리 읽어도 매번 감동적인 것은 그 때문이다.

늙은 어부가 돛단배에서 홀로 4일 밤낮을 청새치와 싸운다는 줄거리야 … 카를로스 영감의 배를 타고 이 얘기가 그럴듯한지 바다로 나가보려고 해. 다른 배는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홀로 긴 싸움을 하는 중에 그가 한 모든 행동과 생각들이 그럴듯한지 말이야. 제대로만 해내면 정말 멋진 이야기가 될 거야, 작품이 되겠지. - 1939년 헤밍웨이가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앞의 책

소설은 흔히 지어낸 이야기(허구, fiction)라고들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서 얼마만큼 지어내느냐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한 편의 훌륭한 소설 작품인 동시에 창작론 책이고, 나아가 인류학 책이다. 위에서 보듯, 작가는 소설의 줄거리를 단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늙은 어부가 돛단배에서 홀로 4일 밤낮을 청새치와 싸우는’ 이야기. 소설은 바로 이 한 문장의 한 단어, 한 단어에 뭉쳐 있거나 얽혀 있는 사실과 진실들을 풀어나가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풀어나가되, ‘그럴듯한지’ 앞뒤 사정을 살펴가며 이끌어나간다. 만약 제대로만 엮어진다면, 그래서 누가 봐도 ‘그럴듯하다’면, 소설은 ‘작품’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헤밍웨이가 영감을 받은 카를로스 영감 이야기로만 소설을 끝냈다면 작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듯함에 견줄 만한, 나아가 그럴듯함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창조해야 하는데, 곧 미학과 철학이 그것이다. 소설 속 소년과 청새치의 존재를 생각해보면 뚜렷해진다. 이것은 철저히 헤밍웨이라는 작가가 창조해낸 헛것으로 ‘작품(예술)으로서의 소설’의 본질에 해당한다. 한 나약한 인간이 거대한 자연과 맞서는 내용(대결 구도)을 중심에 놓고 그 모든 것을 열고 닫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장치. 둘이되 하나, 정확하게는 셋이되 하나의 창조가 그것이다.

10대 시절부터 시대를 달리해서 만나온 ‘노인과 바다’, 2012년 헤밍웨이 사후 50년째 되는 해 첫 번째로 출간된 새 번역본을 품고 소설의 무대이자 작가의 집필지인 쿠바 코히마르를 돌아본 후 도달한 나의 생각은, 산티아고(노인)와 소년과 청새치는 모두 한 존재라는 것. 바타유가 헤겔의 시선으로 거창하게 풀어낸 ‘주인(노인)과 노예(청새치)의 변증법’이란 것도, 결국 내 안에 도사린 ‘또 다른 적(敵)이자 친구인 자아(세상)’와의 싸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혁명가이자 시인이었던 호세마르티의 농촌 시에 곡을 붙인 쿠바의 민중가요 ‘관타나메라’를 흥얼거리며 라 테라사로 향했다. 식당 건너편 마을 화방 벽에는 맘씨 좋게 수염을 기른 헤밍웨이와 그가 잡은, 그의 키를 넘는 청새치가 친구처럼 함께 그려져 있었다.

신동아 201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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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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