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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 사실과 기억의 왜곡 사이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예감, 사실과 기억의 왜곡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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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창출과 지속적인 관리 차원에서 보자면, 서두에 인용한 뒤라스의 경장편은 노벨라와는 다른 세계다. 뒤라스의 ‘연인’은 전통적인 소설기법을 해체한 누보로망(nouvwau roman·신소설), 나아가 소설과 영화의 혼융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시네로망(cineroman·영화소설)으로 명명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연인’은 둘 다 회고조의 필치로 ‘인간의 기억’을 소설화하고 있지만, 그것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창작관)에 따라 감상의 결과는 판이해진다. 반스는 원제 ‘어떤 결말의 예감’이 암시하듯, 기억의 진위에 따른 사태의 진상을 알기 위해 추리적인 형식을 취하고, 뒤라스는 기억의 진위나 왜곡조차 삶의 일부로 수용하는 자유 연상의 경지를 보여준다.

셋이라는 빠듯한 숫자에 하나가 더해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패거리나 짝짓기는 오래 전에 끝나 있었고, 다들 학교를 탈출해 진짜 인생으로 진입할 것을 꿈꾸었을 시점쯤이었다. 그의 이름은 에이드리언 핀으로,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눈을 내리깔고 생각을 입 밖으로 내놓지 않는, 키가 크고 조용한 녀석이었다.

- 위의 책 중에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의 성장담인 1부와 이후 쏜살같이 흘러간 중년의 삶인 2부로 구성돼 있다. 2부는 1부에 장치해놓은 의미심장한 비밀을 기억의 법칙으로 풀어가는 미스터리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소설이 진정한 노벨라로서의 미덕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추리 형식, 들뢰즈가 말하는 비밀의 내장과 관리에 있다. 이때 노벨라는 경장편이라기보다는 중편소설에 해당된다. 동류항으로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이 있다. 한 편의 힘 있는 노벨라에는 하나의 삶을 구성하는 세 개의 선(스토리 라인)이 있어야 하고, 그 선은 결정적인 타격선을 동반하며 삶을 무너뜨려야 한다. 세 개의 타격선은 외부에 하나, 내부에 하나, 그리고 기왕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지점에 하나 있다. 셋이었으나 넷이 된 고교동창생 이야기 하나, 이 중 주인공 내가 대학에 입학해 처음 사귄 베로니카라는 여자와의 이야기 하나, 그리고 셋을 넷으로 만들었던 에이드리언 핀과 베로니카와 기왕의 나와의 이야기 하나. 여기에서 주인공 토니 웹스터의 삶(의 의미)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타격선은 마지막 이야기에 있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천재적인 에이드리언의 자살이 놓여 있다. 옛 고교친구이자 첫 여자친구의 남자친구의 죽음. 이 마지막 이야기는 앞의 두 가지 이야기에 은근히 깔아놓은 뇌선(雷線)의 끝, 곧 40년이 흐른 뒤 소설의 화자인 토니 웹스터에게 날아든 고(故) 사라 포드 여사의 유언으로부터 촉발된다. 포드 여사는 베로니카의 어머니. 그녀는 웹스터에게 편지 두 통과 500파운드를 유산으로 남겼는데, 이는 주인공은 물론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의미심장한 대목으로, 소설의 2부를 관통해 결말을 향해 가는 서사적 자장과 파괴력을 창출한다. 곧 주인공은 1부에서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반추하고, 하나의 선으로 반듯하게 정리해가며 편지의 비밀을 풀어간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자리에 앉아 사십여 년 전의 세월을 시시콜콜히 떠올리면서 치즐허스트에서 보냈던 그 굴욕적인 주말을 다시 기억해내려고 했다. … 나는 과거를 기다렸다. 직시했다. 기억의 경로를 다른 쪽으로 돌려보려고 했다. 소용없었다. 나는 고(故) 사라 포드 여사의 딸과 약 일 년 남짓 사귀었다. 여사의 남편은 나를 하대했고, 여사의 아들은 오만하게도 나를 낱낱이 뜯어보았으며, 여사의 딸은 나를 교묘히 조종했다.



- 위의 책 중에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인간의 기억을 다루는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시간성을 문제 삼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기억 안쪽의 ‘상처’, 곧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지워진다 해도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피해의 흔적’과 그것이 일으키는 폭력적 진실이다. 소설의 첫 대목을 접하며 뒤라스의 ‘연인’이 오버랩됐다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맹렬히 살아나는 또 하나의 작품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다. A와 B라는 청년이 있고, 그 사이에 한 여자가 있다. 두 청년이 동시에 그녀를 사랑했는데, A는 B에게 그녀를 사랑한다고 털어놓으면서 그녀에게 고백할 것이라고 말한다. A의 마음을 알게 된 B는 A가 그녀에게 고백하기 전 먼저 고백하고 둘은 연인이 된다. B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을 하고, 그녀와 결혼해 살게 된 A는 평생 죄의식을 짊어지고 죽어간다는 이야기.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간단히 요약하면 사랑과 우정이라는 소설의 가장 흔하고 오래된 주제를 담고 있다. 소설이 비단 재미만을 추구하는 오락물이 아닌, 인류의 기억과 윤리를 문제 삼는 가장 오래된 질문이자 가장 새로운 탐색임을 소세키의 ‘마음’에 이어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통해 새삼 확인한다. 이때 소설은, 아니 기억은, 반스가 역사가 라그랑주의 견해를 빌려 전하고 싶은바, 역사와 등가를 이룬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신동아 201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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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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