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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힐링 healing 필링 feeling

“남의 담벼락에 분칠한 기 뭐 볼 거라꼬…”

21세기 해운대에서 20세기 감천동까지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남의 담벼락에 분칠한 기 뭐 볼 거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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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호텔의 아련한 추억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닷가의 공기를 잠시 뒤로하고 우선 숙소에 들어가 샤워를 한 후 차를 마시고 나와 담배를 다시 한 대 피웠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백사장이 아니라 거대한 건물들이었다.

저 멀리 부산 중심부의 초고층 빌딩이 광안리 해수욕장을 압도하고 해운대 해수욕장을 굽어보며 기립해 있었다. 흡사 SF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흐린 날씨에 시곗바늘마저 어느덧 7시를 넘어서자 거대한 마천루의 조명은 하늘 아래 떠 있는 라퓨타였다. 광막하고 고요한 밤하늘 위로 떠오른 천공(天空)의 성(城) 라퓨타, 그런 오랜 이야기가 있었다.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지름 7.24km의 거대한 암석 라퓨타를 상상했거니와, 일본의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천공을 날아다니는 성과 그곳으로 운항하며 전투와 모험을 펼치는 비행석을 상상했거니와 그것은 모두 사람의 관념에 의해 가상의 이야기와 이미지로 구축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바라보는 부산의 밤하늘을 압도하는 스카이라인은 밤이 깊을수록 그야말로 인간이 세웠으나 인간을 압도하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천공의 성으로 저 항구도시를 상징하고 있다.

가까이 눈을 돌리면 하룻밤의 내 숙소가 된 팔레드시즈 역시 그와 같은 형상이다. 저 멀리 치솟아 있는 마천루의 스카이라인이 동백섬을 따라 완만히 흐르다가 다시 파라다이스호텔을 거치면서 급상승하기 시작해 팔레드시즈의 웅장함으로 마무리된다. 그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직 마천루의 공습을 받지는 않았으나 곧 그렇게 될 운명이라고 하는 해운대 달맞이언덕이 완만한 곡선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



팔레드시즈는 해운대해수욕장 백사장과 바로 잇닿은 곳에 위치한 곳으로 동백섬 지나 APEC 정상회의장이었던 누리마루까지 걸어서 산책할 수 있는 입지, 그러니까 한마디로 해운대 한복판에 있다. 바로 옆의 파라다이스호텔과 동백섬 쪽의 웨스틴조선이 최고급을 지향한다면 이 팔레드시즈는 거대한 풍채와 현대식 외관과 달리 해운대를 찾는 일반 시민들의 소박한 하룻밤과 연관돼 있다. 1만3665㎡ 부지에 연면적 10만1632㎡, 지하 3층 지상 17층, 4개 동에 331실 규모다. 2008년 우수산업 디자인 ‘굿 디자인’에 선정될 만큼 그 외관이 압도적이다.

여느 고급 호텔의 특장과 대중적인 콘도미니엄의 장점이 일정하게 결합해 있다. 이를테면 팔레드시즈의 1, 2층은 투숙객이든 그렇지 않든 아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각종 식당, 카페, 편의점, 와인바 등으로 구성돼 있다. 최고급의 근사한 호텔이 보이지 않는 가상의 유리벽을 치고 있다면 팔레드시즈는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다. 게다가 바다로 향한, 그것도 바다에 매우 가까이 면한 팔레드시즈의 1층 카페들은 비록 단면이기는 하지만 흡사 유럽의 카페 거리를 연상케 한다. 바다와 카페의 거리가 숨 한 번 돌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남의 담벼락에 분칠한 기 뭐 볼 거라꼬…”

해운대 ‘마천루 숲’의 낮 풍경과 밤 풍경 .

해운대의 밤과 낮

이 거대한 공간 역시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사의 기억을 담고 있다. 팔레드시즈가 들어선 곳에 원래는 극동호텔이 있었다. 1966년 11월 7일 특급호텔로 개장했다. 지상 7층 115개의 객실로 개장 당시 서울의 워커힐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 박정희 대통령이 개관식에 참석할 정도였다. 외국 귀빈이 부산을 찾았을 때 우선적으로 선택된 최고의 숙박시설이었다. 개관 당시의 자료 사진을 보면 해운대 백사장은 지금보다 훨씬 드넓었다. 동백섬 방향이나 달맞이언덕 쪽이나 비포장길이 많았고, 특히 달맞이 언덕 너머로는 헐벗은 야산 사이로 골프장이 널찍하게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해변의 낮은 건물들, 그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호텔, 그것이 극동호텔이었다.

1970년대에는 부산으로 신혼여행을 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들이 선망하던 숙소가 극동호텔이었다. 1979년 조선비치호텔이 문을 열고 뒤이어 파라다이스호텔 등 특급호텔이 생기면서 기운이 빠지기 시작한 극동호텔은 이윽고 1989년 문을 닫았으며 한동안 해운대의 흉물로 불리며 쇠잔했다가 마침내 완전 철거된 후 그 자리에 팔레드시즈가 들어섰다. 최근 해운대 수영만 매립지와 해운대 해수욕장, 센텀시티 일대의 초고층 사업이 잇따라 가시화하면서 차차 87층과 108층짜리 월드비즈니스센터(WBCB)도 들어설 예정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은 제법 위풍당당한 팔레드시즈 정도는 그 마천루들에 압도당할 것이다.

밤의 해변과 팔레드시즈를 두 번 세 번 번갈아 바라본다. 동백섬에서 달맞이언덕으로 이어지는 길을 오가면서 이 상전벽해를 생각한다. 현대 도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이 부산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 해운대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백사장은 점점 줄어들고 고층의 행렬은 더욱 아득해진다.

나는 바닷바람을 쐬러 산책 나온 사람들 사이에 끼어 걷기도 하고 가만히 멈춰 서보기도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속에 있는 해운대를 상상하며 이곳을 찾았다가 상전벽해가 된 경관에 매료당한 듯 연신 사진을 찍는다. 스마트폰 만능 시대라 사람들은 산책로에 잠시 서서 스마트폰의 셔터 아이콘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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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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