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호

종기로 세상 등지며 역사 흐름 바꿔

세 번의 홀아비 신세 겪은 문종

  • 이상곤│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입력2014-03-19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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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기로 세상 등지며 역사 흐름 바꿔

    경기 구리시 동구릉 내 헌릉의 정자각. 헌릉은 문종이 묻힌 곳이다.

    왕의 질병은 역사를 바꾼다. 종기는 조선 왕들의 단골 메뉴였지만, 제5대 왕 문종(文宗·1414∼1452, 재위 1450∼1452)의 종기만큼 역사의 흐름을 확실히 바꾼 질병은 없었다. 문종이 종기로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등진 사건이 단종, 세조 사이 권력쟁탈전의 분수령이 됐던 것이다.

    세종 31년 10월 25일 ‘조선왕조실록’은 세자 이향(문종)의 종기에 대해 처음 기록했다. “세자에게 등창[背疽]이 생기니, 여러 신하를 나누어 보내 기내의 명산·대천과 신사·불우에 빌게 하고, 정부·육조·중추원에서 날마다 문안드리게 하였다.”

    11월 15일 기록은 종기가 완치됐음을 알린다. “동궁의 종기는 의원의 착오로 호전되지 못했음에도 이를 물은즉, ‘해가 없습니다’ 하여, 동궁으로 하여금 배표(拜表·조선시대에 왕이 중국 황제의 표문(表文)을 받던 일)하고 조참(朝參·한 달에 네 번 중앙의 문무백관이 정전(正殿)에 모여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政事)를 아뢰던 일)까지 받게 하였다니, 걸음걸이에 몸이 피로하여 종기의 증세가 다시 성하게 한 것이었다. 또 실지(實地)로서 아뢰지 않아서 갑자기 중함이 이르게 하여 위태로운 증세가 심히 많았으니, 의원의 착오를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느냐, 어쩔 수 없어 생명을 하늘에 맡겼더니, 다행하게도 이제 종기의 근[腫核]이 비로소 빠져나와 병세는 의심할 것이 없게 되어, 한 나라의 경사가 이에 지날 수가 없다.”

    세자의 등에 난 종기인 등창의 크기와 모양은 실록에 자세히 기록됐다. 세종 32년 1월 26일의 기록이다. “세자가 작년 10월 12일 등 위에 종기가 났는데, 길이가 한 자가량 되고 넓이가 5, 6치[寸]나 되는 것이 12월에 이르러서야 곪아 터졌는데, 창근(瘡根)의 크기가 엄지손가락만한 것이 여섯 개나 나왔고, 또 12월 19일 허리 사이에 종기가 났는데 그 형체가 둥글고 지름이 5, 6치나 되는데, 지금까지도 아물지 아니하여 일어서서 행보(行步)하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의방에 꺼리는 바로서 생사(生死)에 관계되므로, 역시 세자로 하여금 조서(早逝·요절)를 맞이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세자의 등창은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길이가 30cm, 너비가 15~18cm 되는 아주 큰 종기였다. 지극한 정성으로 호전됐지만, 12월 19일 허리에서 재발했고, 이 종기는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위협한다.



    여색 멀리한 ‘바른생활 사나이’

    문종에게 처음 발병한 종기는 배저(背疽)다. ‘동의보감’은 종기를 옹(癰)과 저(疽)로 나눈다. “옹은 병이 얕은 곳에서 생기며 급하게 달아오르지만 치료하기 쉽다. 저는 독기가 속에 몰려 있으므로 치료하기 어렵다.”

    문종의 종기는 안타깝게도 치료하기 어려운 저에 속하는 배저, 등창이었다. 동의보감은 옹저가 생기는 부위에 따라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면서 부위를 5곳으로 분류했다. 그중 한 부위가 바로 등이었다.

    동의보감은 등 부위에 생긴 등창의 원인을 이렇게 지적했다. “등은 방광경과 독맥(督脈·회음부에서 시작해 등의 척추 중앙선을 따라 위로 올라 목을 지나 머리 정수리를 넘어 윗잇몸의 중앙에 이르는 경맥)이 주관하는 곳이지만 오장은 다 등에 얽매여 있다. 혹 독한 술이나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거나 성을 몹시 내고 성생활을 지나치게 하여 신수가 말라서 신화가 타오르면 담이 엉키고 기가 막히는데 독기가 섞이면 아무데나 옹저가 생긴다.”

    문종은 술이나 기름진 음식을 좋아했을까? 문종 2년 2월 14일, 실록은 그가 아우들에게 한 말을 이렇게 기록했다. “남녀와 음식의 욕심은 사람에게 가장 간절한 것인데, 부귀한 집의 자제들은 이것 때문에 몸을 망치는 이가 많다. 내가 매양 아우들을 보고는 순순히 경계하고 타일렀으나 과연 능히 내 말을 따르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문종의 등창이 독한 술이나 기름진 음식으로 인해 생겼다고 보긴 힘든 대목이다. 당시 실록의 평가도 그의 말과 일치한다. ‘희로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음악과 여색을 몸에 가까이 하지 않으며,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몸을 수양하였다.’

    건강은 여러 가지 요건이 합리적으로 맞아떨어질 때 유지된다. 실록은 문종의 건강에 일부 적신호를 보였던 부분에 대해 언급했다. “임금의 성품에 지극히 효성이 있어 양궁(兩宮·세자와 세자빈을 아울러 이르던 말)에 조금이라도 편안치 못한 점이 있으면 몸소 약 시중을 들어서 잘 때도 띠를 풀지 않고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세종이 병환이 나자 근심하고 애를 써서 그것이 병이 되었으며 상사(喪事)를 당해서는 너무 슬퍼하여 몸이 바싹 야위셨다. 매양 삭망절제에는 술잔과 폐백을 드리고는 매우 슬퍼서 눈물이 줄줄 흐르니, 측근의 신하들은 능히 쳐다볼 수 없었다. 3년을 마치도록 외전(外殿)에 거처하셨다.”

    세종의 투병에 효심 지극

    세종에 대한 그의 효심은 놀랄 만큼 지극했다. “세종께서 일찍이 몸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임금이 친히 복어를 베어서 올리니 세종이 맛보게 되었으므로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후원에 앵두를 심어 무성하였는데 익은 철을 기다려 올리니 세종께서 반드시 이를 맛보고 기뻐하시기를 외간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기서 복어는 전복을 말한다. 물고기인 복어와 다르다. 실록에선 우리가 익히 아는 복어를 하돈(河豚)으로 표시했다. 세종 6년의 실록은 복어가 하돈이란 점을 명확히 표시했다. “형조에서 계하기를, 전라도 정읍현의 정을손이 그의 딸 대장과 후처 소사가 음란한 행실이 있으므로 이를 구타하고, 또 대장의 남편 정도를 구타하여 내쫓으려고 하니, 정도가 하돈(河豚)의 독을 을손의 국에 타서 독살하였는데, 소사와 대장은 이것을 알면서 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정도는 옥중에서 병사하였으니, 소사·대장만 율에 의하여 능지처사(陵遲處死·능지처참)하소서.”

    안질에 좋은 전복 올려

    종기로 세상 등지며 역사 흐름 바꿔

    한의학에서 전복은 간의 열을 내리고 눈을 보호하는 최고의 음식으로 꼽힌다.

    세종은 오랫동안 소갈증과 안질로 고생했다. 세종 21년 6월 21일, 그는 자신의 질병과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소갈증이 있어 열서너 해가 되었다…. 지난봄 강무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어두워져서 한 걸음 앞에 있는 사람만 알겠다.”

    전복은 안질에 가장 도움이 되는 음식이다. 전복은 간의 열을 내리면서 눈을 보호하는 최고의 음식이다. 한의학에서 간은 봄과 나무를 상징한다. 봄은 영어로 ‘spring’이다. 용수철처럼 압축된 힘으로 튀어 오르는 에너지를 가졌다고 한다. 이처럼 간의 본질은 튀어 오르는 양기다. 눈은 불꽃으로 이글거리다 심하면 병이 든다. 눈은 간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한의학에선 눈을 불의 통로라고 본다. 어두운 밤길에서 고양이를 보면 눈이 파랗게 불타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간질환으로 발생한 분노와 초조함의 화병은 불의 통로에 불을 더해 눈의 신경을 위축시킨다. 화는 위로 타오르면서 어지럼증을 만들고 혈압을 상승시킨다.

    전복은 음적이다. 생긴 모양도 그렇지만 수축하고 탱글거리는 육질이 응축한 음의 성질을 띤다. 전복의 수축하고 응축한 힘은 튀어 오르는 양기를 진정시키고 열을 내린다. 바로 이런 간의 화로 인한 두통을 개선하고 혈압을 내리면서 눈을 밝혀준다.

    ‘본초강목’은 눈병의 증상을 구체적으로 지목했다. “햇빛을 보면 눈이 시리거나 공포스러운 사람은 국화꽃을 같이 달여 먹으면 좋다.”

    일반적으로 전복 살을 먹지만 시력을 개선하는 효과는 전복 껍데기가 더 크다. 전복 껍데기를 ‘석결명(石決明)’이라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구멍이 있다. 보통은 9개 구멍이 있다고 해서 ‘구공라(九孔螺)’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본초강목은 심지어 구멍이 7개나 9개는 괜찮지만 10개는 약물로 사용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기록했다. 전복 껍데기를 데워 눈에 찜질하는 것만으로도 효험이 있다. 전복 껍데기는 거칠고 울퉁불퉁하지만 속껍데기는 오색으로 영롱하게 빛난다. 바로 이런 형태적 특징을 비유하면서 효능을 풀이했다. “석결명은 담(痰)이라는 불순물과 열로 인한 거친 허물이 가리는 현상을 없애고(각막의 노화나 위축) 찬란하게 빛이 나는 밝은 시력을 회복하는 데 약효가 있다.”

    소갈이라는 이름도 열로 태워 갈증을 유발한다는 뜻이고 보면, 음적인 전복은 세종에게 좋은 음식 이상의 약선요리였다. 수많은 음식 중 세종에게 딱 맞는 약선음식을 찾아냈다는 건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한 문종의 열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세종은 소갈, 건습, 종기, 안질 등을 앓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건강에 적신호가 계속되자 세종 24년 7월 28일 당나라 세자가 정무에 참여했던 첨사부의 전례를 따라 첨사원 설치를 명한다. 25년 계조당을 만들어 세자인 문종의 섭정 시대를 열었다. 이후 세종 32년까지 문종은 8년여 국왕 권한을 행사하면서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한 셈이다.

    독점욕 강한 첫 부인 폐비

    등창은 종기로 대표되는 옹저의 한 부분이다. 옹저가 생기는 원인에 대해 동의보감은 이렇게 설명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흔히 이 병이 생긴다.”

    문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 드물게 장자계승의 원칙을 지킨, 정통성에 문제가 없는 왕이다. 그의 스트레스 원인은 바로 부인에게 있었다. 세 번이나 홀아비가 됐던, 개인사가 불행한 왕이었다.

    실록은 세종 11년 7월 20일 문종의 첫 부인 휘빈 김씨를 폐비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문종은 상호군 김오문의 딸과 결혼했다. 김오문은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와 남매지간으로 인척관계였다.

    “내가 전년에 세자를 책봉하고, 김씨를 누대 명가의 딸이라고 하여 간택하여서 세자빈을 삼았더니, 뜻밖에도 김씨가 미혹하는 방법으로써 압승술(壓勝術·주술을 쓰거나 주문을 외어 음양설에서 말하는 화복(禍福)을 누르는 일)을 쓴 단서가 발각되었다. 과인이 듣고 매우 놀라 즉시 궁인을 보내어 심문하게 하였더니, 김씨가 대답하기를, ‘시녀 호초가 나에게 가르쳤습니다’ 하므로 곧 호초를 불러들여 친히 그 사유를 물으니, 호초가 말하기를 ‘거년 겨울에 주빈(主嬪)께서 부인이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술법을 묻기에 모른다고 대답하였으나, 주빈께서 강요하므로 비(婢)가 드디어 가르쳐 말하기를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발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멀어져서 배척을 받는다 하오니, 효동, 덕금 두 시녀의 신을 가지고 시험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했는데, 효동, 덕금 두 여인은 김씨가 시기하는 자다. 김씨는 즉시 그 두 여인의 신을 가져다가 자기 손으로 베어내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하여 그 술법을 써보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틈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호초가 또 말하기를 ‘그 뒤에 주빈께서 다시 묻기를 「그 밖에 또 무슨 술법이 있느냐」고 하기에 비가 또 가르쳐 말하기를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두 번의 생이별과 한 번의 사별

    두 번째 부인은 조선왕실 최초 레즈비언 스캔들의 장본인인 세자빈 봉씨다. 창녕현감을 지낸 봉여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았는데, 궁중의 여종 소쌍과 동성애를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세종 18년 10월 26일 기록은 이렇다. “내가 중궁(中宮·왕비를 높여 이르던 말)과 더불어 소쌍을 불러서 그 진상을 물으니,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와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실록에는 봉씨의 죄목이 질투심이 많고 아들을 낳지 못했으며 남자를 그리는 노래를 불렀다고 적혀 있다. 이는 세종이 자신의 며느리가 저지른 죄목을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세 번째 세자빈은 권전의 딸로, 딸을 낳은 후궁이었다. 권씨는 마침내 아들을 낳는다. 세종은 원손을 얻은 기쁨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그런데 사면령을 발표하는 교지 읽기를 마치자마자 의전용 촛불인 대촉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다. 암시였을지 모르지만 권씨는 아들을 낳은 바로 이튿날 세상을 떠난다.

    거듭해서 나는 종기

    종기로 세상 등지며 역사 흐름 바꿔

    문종의 종기를 책임졌던 전순의는 꿩고기 구이를 문종의 수라에 자주 올리는 결정적 실수를 범했다.

    세종은 곧바로 동궁전을 헐어버린다. “궁중에서 모두 말하기를, ‘세자가 거처하는 궁에서 생이별한 빈이 둘이고, 사별한 빈이 하나이니,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헐어버려 다시 거기에 거처하지 말게 하자’고 한다.”

    세 번이나 홀아비 신세가 된 문종이 느꼈을 심적 고통과 답답함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문종은 유교 원리주의자에 가까웠다. 기쁨과 슬픔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고 스스로 삭였으니 그 마음속의 화가 종기로 분출된 건 아닐까. 세종이 승하한 사흘 뒤인 2월 20일 문종의 증세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전일 난 종기가 낫지 않았는데, 또 종기가 발생했다. 황보인, 정인지 등은 여막(廬幕·궤연 옆이나 무덤 가까이에 지어놓고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살이와 빈객 접대를 하지 말라고 극구 말린다. 아버지의 장례임에도 종기의 증세가 심해 회복을 가늠하기 힘들었다는 방증이다.

    즉위년 3월 17일과 22일, 4월 6일, 5월 4일의 기록을 보면 종기에 딱지가 앉으면서 아물어가자 문종은 세종의 빈전으로 가려하고 승지와 대신들은 만류하면서 옥신각신한다.

    문종 1년 8월 8일엔 다시 허리 밑에 작은 종기가 생긴다. 11월 14일과 15일엔 종기가 난 부위가 쑤시고 아프다면서 두통까지 호소한다. 이런 와중에 등장한 게 거머리 요법이다. 문종은 11월 16일 “어제 아침에는 차도가 있더니, 어제 저녁에는 쑤시고 아파서 밤에 수질(水蛭·거머리)을 붙였다. 붙인 뒤에는 약간의 가려움은 있으나 어제 저녁 같지는 않다”고 했다. 이후 종기가 많이 회복되면서 정무를 재개하는 효험을 본다.

    거머리를 이용하는 치료방법을 동의보감에선 기침법(·#54716;鍼法)이라고 한다. “종기가 생겨서 점차 커질 때 물에 적신 종이 한 조각을 헌데에 붙이면 먼저 마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종기의 꼭대기다. 그곳을 먼저 물로 깨끗하게 씻어서 짠 기운이 없게 한 다음 큰 붓대 1개를 종기 중심에 세워놓고 그 속에 큰 거머리 한 마리를 집어넣는다. 다음에 찬물을 자주 부어 넣으면 거머리가 피와 고름을 빨아먹는다. 그러면 헌데의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허옇게 된다. 옹저의 피고름을 빨아먹은 거머리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데, 물에 넣으면 다시 살아난다.”

    이런 방법은 독이 심하지 않은 곳에만 써야 한다. 심할 때 쓰면 되레 피만 빨려서 이롭지 않다고 경고한다. 문종 2년 4월 23일, 그는 자신의 질병에 대해 언급하며 회례연(會禮宴·설날이나 동짓날에 문무백관이 모여 임금에게 배례한 후 베풀던 잔치)을 중지할 것을 명한다. “내 병은 급하지 않으니 그 증세(症勢)를 살펴보아서 26일에는 내가 마땅히 친히 나가겠다.”

    이후 4월 24일, 5월 3일에 왕의 종기에 대해 다시 거론되나 왕이 종묘사직에 기도를 올리면서 악화일로를 걷는다. 당시 일본에서 사신이 왔지만 만나지도 못하고 정무를 모두 정지하면서 병이 낫기만을 기다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거머리 이용하는 ‘기침법(·#54716;鍼法)’

    문종의 종기를 책임지면서 진료한 의사는 전순의다. ‘식료찬요’ ‘산가요록’ ‘의방유취’를 편찬한 당시 최고 명의였다. 세종 때는 일본에서 사신 일행으로 온 숭태라는 스님이 의술에 정통한 사실이 알려지자 흥천사에 모시고 전순의로 하여금 직접 가서 기술을 배워오게 할 정도로 국가에서 기른 인재였다. 5월 5일 전순의는 “임금의 종기가 난 곳이 매우 아프셨으나 저녁에 이르러 조금 덜하고 농즙이 흘러나왔으므로 두탕(豆湯)을 드렸더니 임금이 음식의 맛을 조금 알겠더라고 하셨다”면서 호전의 신호를 알렸다. 전순의는 5월 8일엔 “임금의 종기가 난 곳은 농즙이 흘러나와서 지침(紙針)이 저절로 뽑혔으므로 찌른 듯이 아프지 아니하여 평일과 같습니다”라고 또 한 번 청신호를 알린다. 지침은 종기 사이에 꽂아둔 종이 심지로 추정된다.

    종이 심지에 대한 동의보감의 기록은 이렇다. “침을 찔러 고름이 나오지 않으면 건강한 환자에겐 털 심지를 꽂아 넣고 허약한 환자에겐 종이 심지를 꽂아서 계속 고름이 나오게 해야 한다. 만일 부은 것이 내리지 않고 아픈 것이 멎지 않으면 빨리 고름을 빼낸 다음 탁리하는 탕약을 먹어서 원기를 돋워야 한다.” 종이 심지가 빠지고 나자 실제로도 처방에 탁리의 방법을 썼다.

    당시 기록을 보면 허후가 5월 12일 종기의 차후 조리법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한다. “큰 종기를 앓고 난 후에는 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히 회복되니,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종기 난 곳은 날로 차도가 있으니 신 등은 모두 기뻐함이 한이 없습니다. 다시 날로 조심을 더하시고 움직이거나 노고하지 마시어서 임금의 몸을 보전하소서. 또 듣건대, 전하께서 조금 갈증이 나면 냉수를 좋아하신다 하니, 무릇 종기가 갈증을 당기는 것은 그 보통의 증상입니다. 갈증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약을 먹어서 속을 덥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탁리의 대표적 약물인 십선산을 처방한다.

    십선산의 탁리법을 설명한 조문엔 증상이 악화돼 위험해지는 경우를 이렇게 설명했다. “종기가 초기에는 도드라져 올라오며 부었다가 5~7일이 되면 갑자기 꺼져 들어가서 편평해지는 것은 속으로 몰리는 증상이다. 이때는 빨리 내탁산과 속을 보하는 약을 써서 장부를 보하여 든든하게 해야 한다. 막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제일 나쁜 증상이다. 막이 뚫어지면 열에 하나도 살 수 없다.” 문종 2년 5월 14일 기록을 보면, 전순의는 은침으로 종기를 따서 농즙을 짜냈다. 두서너 홉의 농을 짜냈다고 기록돼 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360cc 정도의 엄청난 양이다. 전순의는 의정부와 육조에 “임금의 옥체가 어제보다 나으니 날마다 건강이 회복되는 중이다”라고 전했다.

    꿩고기로 인해 탄핵된 전순의

    하지만 전순의나 신하들의 바람과는 달리 5월 14일 문종은 세상을 달리했다.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호전되고 있다는 보고만 믿다 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망연자실했다. 대사헌 기건은 전순의를 강력히 탄핵했다. “대저 독이 있는 종기는 처음엔 미미하게 나타나며 등에 있는 것은 더욱 독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터인데도 이에 말하기를 ‘해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의 첫째입니다. 몸의 기운을 피로하게 움직이는 것은 등창에서 크게 금하는 것인데도 이를 아뢰지 아니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의 둘째입니다. 음식물의 성질이 반드시 병과 서로 반대되면 해로움이 있고 꿩고기 같은 것이라면 등창에서 크게 금하는 바인데도 날마다 꿩고기 구이를 드렸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의 셋째입니다. 등창에서는 농하여 터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그것이 농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를 침으로 찔러서 그 독을 더하게 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의 넷째입니다.”

    꿩고기 구이를 수라에 올린 건 식료찬요를 지은 식치(食治)의 일인자치고는 큰 실수였다. 본초강목은 꿩고기를 이화(離火)의 음식이라고 규정한다. 닭과 꿩은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꿩을 야계(野鷄)라고 한다. 그러나 쪄서 요리를 하면 닭은 색깔이 변하지만 꿩은 색깔이 붉게 되므로 오행으로 보았을 때 화(火)의 음식이라고 규정한다. 화(火)의 날인 병화일엔 아예 먹지 못하도록 금기로 정한 음식이다.

    종기는 본래 혈에 열이 심해서 생긴 것으로 화의 작용으로 보는 질병이다. 질병의 양상으로 보았을 때 더 악화할 위험이 있는 음식을 수라에 올린 건 있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전순의는 어의에서 전의감 청지기로 전락한다. 특히 봄에 꿩고기를 먹는 건 부작용으로 치질과 부스럼, 습진을 유발한다. 마침 이때는 문종이 치질을 앓은 시점이다.

    문종은 종기 외에 안질도 앓았다. 문종 1년 8월 3일엔 열이 있어 발운산 처방을 사용했다. 발운산은 풍독이 치밀어 올라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예막이 가리며 가렵고 눈물이 많이 나오는 것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닷새 후 완치됐다는 사료를 보면 일과성 질환이었다.

    종기로 세상 등지며 역사 흐름 바꿔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학회 이사

    現 갑산한의원 원장, 한의학 박사, 동아일보·농민신문·프레시안 칼럼 집필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낮은 한의학’ 등 다수


    동의보감의 옹저문은 종기의 원인을 밝히며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흔히 이 병이 생긴다”라고 규정했다. 술과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오직 성군의 길을 가고자 했던 문종에게 세 번의 홀아비 신세가 얼마나 부담이 됐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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