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호

“지금도 어디선가 얻어맞고 있을 것”

‘을(乙) 중 을’ 대리기사 25시

  • 박은경 |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4-10-22 09: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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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에 줄잡아 20만 명. 최근 발생한 ‘대리기사 폭행사건’에서 보듯 대리운전 기사들은 ‘을(乙) 중 을’의 생활을 이어간다.
    • 하지만 일 ‘대리(代理)’라고 인생마저 대리인 건 아니다.
    • 오늘도 밤길을 누벼야 하는 고달픈 그들의 눈물 어린 애환과 속내.
    “지금도 어디선가 얻어맞고 있을 것”

    서울의 대리기사 집결지 중 한 곳인 일명 ‘강남 교보타워 사거리.’

    자정 넘은 시각, 한 대리운전 기사가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하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피 같은 시간이 10분을 넘어 30분을 지난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갈 즈음 저만치 거나하게 취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대리기사는 “다른 기사를 불러라. 가겠다”며 돌아선다. 그때 무리 중 한 여성이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명함을 내민다. 마지못해 명함을 건네받은 대리기사는 “국회의원이 뭔데?”라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9월 17일 불거진, 세월호 참사 유가족 등이 연루된 일명 ‘대리기사 폭행사건’의 전말을 그동안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내용으로 간략히 재구성한 장면이다.

    날이 밝고 사건 소식이 알려지자 순식간에 온 나라가 벌집을 쑤신 듯 들썩였다. 파장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일파만파로 번졌다. 사건을 맡은 서울영등포경찰서 홈페이지엔 부실한 초동 대응과 수사를 질타하는 사람들의 분노에 찬 글이 폭주했다. ‘힘없으면 잡아가서 밤새 조사하고 힘 가진 사람은 대리기사를 패고도 승합차 태워 경찰서로 모시고 와 조사도 하지 않고 보내고,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경찰의 평소 정당한 일처리 방식인가?’ ‘경찰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초동조치부터 잘못됐다. 국회의원은 초법적 존재인가? 법 적용도 신분에 차별을 두는가? 검찰에서 직접 수사하라!’….

    사건 수사가 20여 일을 넘기면서 ‘국가정보원 개입’ 등 각종 음모론이 등장했는가 하면 이념 대결로 치닫는 양상마저 나타났다. 그뿐 아니라 사건의 실체를 둘러싸고 양측의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고, 최근 새정치민주연합 김현 의원이 피의자 신분으로 바뀌면서 사건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수그러들 줄 모른다. 특히 국민의 공분을 산 건 김 의원이 우리 사회 ‘을(乙) 중 을’인 대리기사에게 명함을 건네며 자기 신분을 과시한 점이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는 말로 특권의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자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소위 힘 있고 권력 있는 이들의 행태를 그동안 질리도록 봐온 국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성토하고 나섰다.

    “네가 뭔데 깨워? ○새끼야!”



    이번 사건과 관련해 누구보다 분노가 폭발한 이들은 20만 명을 헤아리는 전국의 대리기사다. 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인터넷 카페 ‘달빛기사’와 ‘밤이슬을 맞으며’는 최근 하루 방문자 수가 1만 명을 넘어섰다.

    그곳에서 울분에 찬 대리기사들의 글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세월호 유족대표 폭행사건 20만 대리기사 분노한다!’ ‘세월호 유가족이 대리기사를 공손하지 못하다고 폭행! 세월호 유가족이 벼슬 되었다.’ ‘국회의원님! 서민 중 서민인 대리기사를 집단폭행하고도 나는 잘못 없네, 나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쌍방폭행이라니…’ ‘폭력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절대 용인돼선 안 됩니다. 대리기사 폭행사건도 연루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쏙 빠지도록 책임지게 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옵니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20만 명의 대리기사 중 ‘투 잡’을 뛰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다. 40대 후반의 1년차 대리기사 정모 씨는 “이 일을 하면서 연구원으로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사람도 봤고, 덤프트럭 2대로 개인 사업을 하는 이도 봤다. 모 대학병원 직원도 있었다. 30대 중반의 일반 직장인 중에도 투 잡을 하는 알뜰한 친구들이 있다. 흔히 대리기사를 ‘인생 막장’으로 여기지만 그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이들”이라고 했다. 정씨 역시 무역업으로 번창해 중국까지 진출했다가 2000년대 중반 사기를 당해 사업에 실패한 경우다.

    대리기사를 ‘업(業)’으로 삼은 이들 중엔 정씨처럼 사업에 실패한 최고경영자(CEO)나 명예퇴직한 대기업 임원, 무명배우 등 전직(前職)이 실로 다양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회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 밑천 없이 맨몸으로 뛰어드는 곳이 바로 대리운전업계다.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삼촌, 친구, 동료인 평범한 이들임에도 일부에선 마치 처음부터 대리기사였던 것처럼 대리기사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며 얄팍한 특권의식을 숨기지 않는다.

    “대리기사에게 국회의원이란 직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이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청소부나 국회의원이나 우리한텐 똑같은 손님일 뿐”이라는 40대 후반 대리기사 이모 씨는 젊은 시절 대기업에 다니다 사표를 내고 해외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 3년 뒤 귀국해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40대 초반에 회사에서 밀려나 6년째 대리기사 생활을 한다.

    이씨는 대리기사 생활 초반에 당한 몇 건의 수모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는 “30대 중반의 남자 회사원 손님이었다. 목적지를 처음부터 정확히 가르쳐주지 않고 잠이 들었기에 집 인근에 가서 깨웠다. 그랬더니 ‘네가 뭔데 자는 사람을 깨워? ○새끼야!’ 하면서 욕을 하고 내 멱살을 잡고 차에서 끌어내렸다. 한번은 운전 중에 중년 남자 손님이 뜬금없이 노래를 불러보라기에 난감해서 못한다고 했더니 자기가 노래를 부르면 점수를 매겨달라고 했다. 모 회사 사장이고 청와대에 연줄도 있다면서 좋은 데 취직시켜주겠다기에 나중에 연락해봤더니 ‘뻥’이었다. 손님 중에 대리기사를 하인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며 씁쓸해했다.

    두들겨 패고, 차바퀴로 깔고…

    5년 전 대리기사 생활을 접고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마흔 살 김준석 씨는 “술 마시면 개가 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대리기사 초창기 시절, 항상 기사를 부르다 이젠 불리는 처지가 되고 보니 그때 좀 더 잘해줄 걸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대리기사 생활 동안 인터넷 블로그에 매일 일기를 올려 인기를 끈 그도 잊지 못할 수모를 겪은 기억이 있다.

    “한번은 직장동료 3명이 차를 타고 시내 외곽의 한적한 지역으로 가달라면서 중간에 2명을 내려달라고 했다. 중간에 경유지가 있으면 시간이 더 걸리고 시내까지 나오는 교통비도 있어 평소 대리비에서 3000원 정도를 더 불렀다. 그러자 운전 중 ‘왜 대리비를 비싸게 부르냐? 차를 세우라’고 하더니 내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다. 그중 한 명에게 심하게 폭행당했는데 내가 쓰러지자 도망갔다. 경찰에 신고해 나중에 가해자들이 다 잡혔는데 내가 합의를 안 해줬다. 나이 좀 든 이들 중엔 가끔 ‘야, 내가 누군지 알아?’ 하고 허세를 부리기도 했는데, 과거 사장 노릇을 했거나 고위공직자처럼 사회에서 한가락 하다 은퇴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이야기나 행동은 그냥 흘려버려야지 일일이 대응하면 대리기사 생활 못한다.”

    50대 중반의 대리기사 김모 씨와 이모 씨를 만난 건 대리기사에게 일주일 중 피크(peak)라는 ‘불금(불타는 금요일)’과 맞물린 토요일 새벽 12시 10분, 서울 강남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였다. 김씨는 “사실 대리기사 폭행은 비일비재하다. 왜 이번 사건만 가지고 시끄럽게 떠드는지 모르겠다. 4년 전 술 취한 손님이 시비 끝에 대리기사를 폭행하고 차에서 끌어내려 차바퀴로 밀어버린 사건마저 있다. 당시 경찰은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라며 고의로 사망사고를 낸 가해자를 구속하지도 않았다. 그땐 지금처럼 언론이 떠들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사건은 2010년 6월 26일 밤 9시 30분경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서울외곽순환도로 갓길에서 벌어졌다. 시비 끝에 술에 취한 차주 박모(당시 41세) 씨가 대리기사 이모(당시 52세) 씨를 폭행하고 차에서 끌어내린 뒤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해서 이씨를 넘어뜨렸고 차바퀴로 재차 깔고 지나가 사망케 한 사건이다. 불구속 수사를 받던 박씨는 사건 발생 한 달 만에 이씨를 폭행하고 승용차로 치어 숨지게 한 혐의(특가법상 도주차량)로 구속됐다.

    대리기사 스마트폰은 ‘동냥 통’

    김씨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던 이씨는 “집이 충북 청주인데 서울까지 오는 ‘콜’을 잡아 한 시간 전 손님을 내려주고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그는 “대리기사 폭행사건을 보는 시각과 반응은 대리기사들 사이에서도 다르다. 비분강개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단순한 사건을 언론이 확대했다는 쪽도 있다. 대리기사 처지에선 폭행당하는 게 워낙 흔해 해당 사건이 평범하게 비치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도 어디선가 손님한테 얻어맞는 대리기사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리기사 경력 4년차인 김씨는 “직장생활과 사업을 다 해봤지만 여의치 않아 대리기사 일을 시작했다. 대리를 하겠다고 나온 사람들은 그나마 자신감이 있으니 나와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남의 차인 만큼 아무나 운전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인터뷰 중임에도 그는 테이블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콜을 잡기 위해 초 단위로 여러 개 뜨는 ‘오더(일감)’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김씨의 스마트폰은 3대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대리운전 프로그램 3개의 오더를 한꺼번에 확인하려고 판 위에 스마트폰을 붙여놓은 건데, 직접 만들었다”며 웃었다. 그걸 보던 이씨가 김씨의 말에 씁쓸히 덧붙였다. “대리기사 스마트폰은 동냥 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동냥 통이 많을수록 돈도 많이 들어올 것 아닌가.”

    두 사람을 만나기에 앞서 찾은 신논현역, 일명 ‘강남 교보타워 사거리’는 대리기사 집결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매일 새벽 2~3시면 수백 명의 대리기사가 진을 치고 콜을 기다린다. 그들을 겨냥한 다양한 노점상도 사거리 코너마다 심야 난전을 펼친다. 특히 어묵 포장마차엔 1000~2500원으로 출출한 배를 채우려는 대리기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묵에 이어 소시지를 먹던 50대 초반의 한 대리기사는 “돈 버는 사람은 여기(어묵 포장마차) 사장님밖에 없다. 돈벌이가 안되니 갑갑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포장마차 건너편 도로엔 ‘PDA 충전기’ ‘휴대폰 배터리’라는 문구가 쓰인 1t 트럭이 주차해 있고, 바로 옆 인도엔 휴대전화 충전기와 대리기사가 즐겨 사용하는 숄더백, 휴대전화 줄 등을 파는 잡화점이 막 노점을 펼치며 개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각이 자정을 넘어 새벽 1시를 향하자 10여 명에 불과했던 대리기사가 50~60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들 중 손님의 콜을 받고 달려가는 기사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거시기도 예쁠 것 같다”

    “지금도 어디선가 얻어맞고 있을 것”

    손님의 ‘콜’을 기다리며 허기를 달래는 대리기사들.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20분째 스마트폰 2대를 손에 들고 서성이는 20대 후반의 한 남성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아직 오늘 첫 콜을 못 잡았다. 평소 같으면 지금이 ‘불금’ 피크 시각이라 엄청 바빠야 하는데 사흘 연휴라서 그런지 손님이 영 없다. 대리기사들도 다른 날보다 훨씬 적게 나온 것 같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대학 졸업 후 미취업 상태인 그는 용돈을 벌려고 7개월 전 이 일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갑(甲)질’하는 손님을 서너 번 접했다. 대기업 간부라고 큰소리치면서 ‘취직시켜줄 테니 찾아오라’고 한 손님이 있었는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명함 한 장만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젊은 놈이 사람을 못 믿는다’며 막 화를 냈다. 웬만큼 배우고 지위 좀 있는 사람한테서 험한 욕을 듣고 무시당하니 나중에 회사 들어가서 그런 상사 만날까봐 겁난다”고 털어놨다.

    최근엔 여성 대리기사도 눈에 띄게 늘었다. 이들은 대리기사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부정적 시각에다 여성이라는 이유가 더해져 손님들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등 더욱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 남편과 운영하던 식당을 접고 대리기사로 나선 50대 초반의 주모 씨는 “젊은 남자 손님 중엔 ‘5만 원만 주면 같이 있어줄게’ 하는 경우도 있는데, 한 대 쥐어박고 싶다”고 말했다. 주씨는 자신의 후배가 4년 전 겪었다는 일을 들려줬다.

    “중년 남자 손님이 고속도로에서 계속 후배의 다리를 만지면서 추근댔다고 한다.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어 차를 세우자 따라 내려서 계속 그러기에 경찰을 불렀다고 했다. 성추행으로 고소했지만 차주는 증거가 없어 풀려났다.”

    주씨는 성추행범의 경우 ‘증거 내놔라’며 발뺌하면서 경찰 조사를 피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땐 정말 몰래 녹음이라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특권’에 무너지는 ‘인권’

    40대 중반의 8년차 여성 대리기사 안모 씨는 “잘났다는 인간들이 더 우리를 여자라고 얕보고 무시한다. ‘왜 여자가 오느냐?’고 시비를 걸거나 콜센터에 전화해 다른 기사로 바꿔달라고 할 때도 많다. 심지어 ‘생긴 게 곱상해서 거시기도 예쁠 것 같다’ ‘잠자리 잘할 것 같다’고 대놓고 말하기도 한다”고 털어놓았다.

    “수치심과 모욕감이 확 치밀어 오르지만 웃으면서 농담으로 받아넘긴다. 싸워봤자 힘으로 남자를 이길 수도 없고 경찰서에 가봤자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합의하에 그랬다’는 인간들도 가끔 있다. 그나마 요즘은 블랙박스를 단 차가 많아 예전보다 성추행이 줄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특권’에 의해 ‘인권’이 무시되는 경우를 수없이 목격했다. 그럼에도 최근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골프장 캐디 성추행 논란에서 보듯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사건이 터져 국민을 질리게 만든다.

    하정철 백석대 교수(법학)는 이렇게 진단한다.

    “미국에선 자기소개서(cover letter)를 쓸 때 첫머리를 ‘○○한테서 당신네 회사 이름을 들었는데…’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그 권위를 모두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력서 첫머리에 특정 인물을 언급한다면 당장 ‘낙하산’이라며 난리가 날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전혀 다른 해석과 양상이 나타나는 건 그동안 우리 사회 특권층이 ‘갑질’을 통해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사회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상식과 양식을 지키지 못하고 법질서마저 가볍게 여기는 특권층은 이미 균형감각을 상실했다.”

    하 교수는 “제2, 제3의 대리기사 폭행사건을 막고 사회 분노를 촉발하지 않으려면 그들이 그릇된 특권의식을 내려놓고 균형감각을 되찾아야 한다”고 했다.

    계속되는 경기불황으로 하루 꼬박 8시간씩 밤길을 달려도 한 달에 150만 원조차 벌기 힘든 대리기사가 많다. 열심히 일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대리기사 폭행사건까지 겹치자 김종용 전국대리기사협회장은 “지금 대리운전 업계는 폭풍전야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현재 4000여 명의 회원을 둔 협회는 대리기사 폭행사건 후 두 차례 성명을 발표했다. 9월 27일 두 번째 성명을 통해 가해자들의 진정한 사죄와 인간적 화해를 촉구한 김 회장은 “대리기사는 항시 폭행과 사고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이다. 이번 사건 역시 대리기사와 손님 간 사적 분쟁에서 시작된 일이 일파만파 확대됐다. 같은 대리기사이자 회장으로서 참담한 심경”이라고 했다.

    4년째 대리기사 생활을 하는 김 회장은 2011년 일본 대지진 때 큰 손해를 보고 사업을 접었다. 무역업체 사장이던 그는 “한창 사업이 잘돼 중국에 공장을 세우고 일본에 추가 주문을 낸 상황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그때 세관을 통과한 물건이 실린 컨테이너가 쓰나미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건 값은 이미 지불했는데, 천재지변이라 보험 혜택도 못 봤다”고 했다.

    그는 “손님의 갑질보다 대리운전업체의 갑질에 분통을 터뜨리는 대리기사가 더 많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따르면 업체들의 갑질은 대리운전업계의 근본 시스템과 풍토의 문제다. 현재 대리운전과 관련한 법이 없다보니 대리운전 업체, 대리운전 프로그램 회사, 콜센터 등이 대리기사를 상대로 횡포를 부리는 경우가 많은 것.

    벌금 액수 높이는 ‘똥콜’

    “대리운전을 하면 시스템상 대리기사의 개인 신용정보가 공유된다. 내가 A업체에 소속돼 있어도 거기에 등록된 정보를 B, C 업체가 공유한다. 심지어 콜을 신청한 손님에게도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까지 오픈된다. 또 ‘충전금’이란 게 있는데 오더를 받으려면 미리 가상계좌에 일정 액수의 돈을 넣어둬야 한다. 대리기사가 콜을 받아 뛸 때마다 업체가 거기서 수수료를 떼는데 남은 충전금액은 대리기사 돈임에도 업체들이 마음대로 넣었다 뺐다 한다. 손님의 항의가 들어오거나 콜을 취소하면 건당 벌금을 물리는데, 업체 측이 벌금 액수를 높이려 ‘똥콜’을 만들기도 한다. 똥콜은 대리기사들이 기피해서 오래된 오더를 말하는데, 자칫 경쟁적으로 오더를 잡다보면 똥콜이 걸릴 때가 많다. 그 밖에 터무니없이 높은 수수료, ‘프로그램 쪼개기’ 등에 대한 불만도 많다.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대리운전 관련 법 제정과 제도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

    대리기사를 하려면 대리운전 업체에 가입하고 매달 1만5000원 정도 사용료를 내는 프로그램을 사야 한다. 프로그램을 통해 일감을 잡을 수 있기 때문. 가입한 프로그램이 많을수록 일감이 풍부해지기 때문에 대리기사들은 가능한 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들이 대개 2대 이상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이유다. 프로그램 회사들은 그 점을 노려 프로그램 쪼개기를 통해 수익을 올린다. 김 회장은 “그렇게 쪼갠 프로그램은 어차피 같은 회사 것이라 비슷하다”고 했다.

    대리운전 업체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대리기사가 대리비를 받으면 업체가 가져가는 수수료는 건당 평균 20%. 하지만 수수료 외에 매달 내야 하는 보험료와 프로그램 이용료, 콜 취소에 따른 벌금 등을 포함하면 실제 대리기사가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하루 10만 원을 벌면 그중 대리기사가 실제 가져갈 수 있는 돈은 5만~6만 원에 불과하다는 것.

    40대 중반의 2년차 대리기사 전모 씨는 “새벽 3~4시에 일 끝나고 친한 동료끼리 모여 앉아 소주 한잔 하다보면 ‘하수구 인생’ ‘밑바닥 인생’이라며 자조하는 이가 많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짓밟히고 무시당해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온갖 추태로 갑질을 하며 삿대질까지 서슴지 않는 손님을 접하면 순간 차를 벽에 처박아버리고 싶을 때마저 있다. 살인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언젠가 한번 손님한테 ‘네가 얼마나 등신짓을 했으면 겨우 대리기사냐? 평생 그렇게 살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맞는 것보다 ‘대리기사 주제에…’같이 인간적으로 모멸감을 주는 손님을 만날 때면 정말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다”고 털어놨다.

    고단한 잠

    취재 중 만난 많은 대리기사는 이번 대리기사 폭행사건에 대해 “사과 한마디면 조용히 끝날 일”이었다며 입을 모았다. 어쩌면 그들은 이런 장면을 갈구하는 게 아닐까.

    대리기사가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하게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 저만치 술 마신 한 무리의 사람이 다가오자 “다른 기사를 불러라. 가겠다”며 돌아선다. 그때 무리 중 한 여성이 그에게 “30분이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기다린 시간만큼 돈(대기비)을 더 줄 테니 그냥 가자”며 (명함 대신) 자동차 키를 내민다.

    토요일 새벽 2시 반 넘은 시각. 신논현역 주변 취재를 마치고 심야버스에 올랐다. 함께 탄 10여 명의 승객 중 4~5명이 대리기사로 짐작됐다. 그중 40대 후반과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나란히 좌석에 앉아 낡고 금이 간 휴대전화 액정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눴다.

    남자1 : “에이, 1만 원짜리 콜밖에 안 뜨네. 오늘은 일도 영 안되고 기분도 별로네. 똥콜만 안 떠도 좋겠는데.”

    남자2 : “마지막 콜 뛴 게 2만 원(대리비)에 대방동(목적지)이었는데, 아파트 지하 2층 주차장까지 내려가 차를 파킹해줬더니 이놈이 갑자기 대리비를 1만 원 깎자는 거야. 마흔 중반이나 됐을까? 나보다 어려 뵈는 놈이 이래라저래라 온갖 걸 다 시키며 종 부리듯 해놓고 그깟 돈 몇 푼 된다고 깎자니, 나 원 참 더러워서. 운전하는데 어깨도 툭툭 치고 말이야. 성질대로 확 패버리는 건데….”

    분을 못 삼킨 ‘남자2’의 얘기가 이어지는 동안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든 ‘남자1’의 머리가 차창에 부딪히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창밖으로 형형색색 불 밝힌 한강 다리들이 보이고 어두운 물결 위에 비친 현란한 조명이 어지럽게 일렁이며 춤을 췄다. ‘남자2’는 종로2가에서 ‘남자1’이 내릴 때까지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Interview | 전선영 용인대 교수

    “초등학생 수준만 돼도 특권의식 사라질 것”


    “지금도 어디선가 얻어맞고 있을 것”
    시사 칼럼니스트로도 활동 중인 전선영(사진) 용인대 라이프디자인학과 교수는 비뚤어진 특권의식에 의한 권력 행사와 그로 인해 빚어지는 사회적 물의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잊을 만하면 특권층의 ‘갑질’이 도마에 오른다. 이유가 뭘까.

    “지난해 5월 모 분유회사 영업사원이 대리점주한테 폭언을 퍼부은 사건이 공개되면서 ‘갑-을’ 논쟁이 뜨겁게 벌어졌다. 그즈음 미국 캘리포니아대 철학 교수가 쓴 책이 국내에 출간됐는데, 부제가 ‘부도덕한 특권의식과 독선으로 우리를 욱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 책에 ‘골칫덩이(asshole) 이론’이 나온다. ‘골칫덩이’는 특권의식에 젖어 자신은 특별하니까 사회적 관습을 잘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을 일컫는다.

    권력감이 충만해지면 남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해지는 속성이 생긴다. 그래서 심각한 잘못을 저질러도 자기정당화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나쁜 일을 좀 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대리기사 폭행사건’에 대해 많은 사람이 공분을 느끼는데.

    “인간은 타인에게 함부로 무시되거나 폭행당해선 안 되는 신성불가침한 존재다. 그 사건에서 가해자들이 간과한 게 바로 그 점이다. 2011년 나온 ‘사회적 약자에 대한 초등학생들의 인식’이라는 석사논문(저자 정미경)에 따르면, 10명 중 8~9명의 아이가 ‘불쌍하다’ ‘도와주고 싶다’ ‘잘 대해줘야 한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그런 초등학생 수준의 논의만 이끌어냈어도 약자에 대한 특권의식은 설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특권의식을 어떻게 뿌리 뽑을 수 있을까.

    “국내외 많은 연구결과에 따르면, 특권의식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순 없다고 한다. 하지만 더 나은 내일을 꿈꾸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면 나아지는 게 또한 인간이다. 인격체는 자기 선택과 의지적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존재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말뜻을 심사숙고해 가치관을 정립하고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올바른 행동은 올바른 가치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 교수는 “영화 ‘친구’에서 동수(장동건 분)가 준석(유오성 분)의 다리 밑을 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동수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느끼고 복수의 칼날을 간다. 아마 폭행당한 대리기사도 그런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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