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이 스스로를 불행하게 느끼는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다.
- 행동을 지배하는 심리체계가 성숙하지 못하고 여전히 결핍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을 위해 출국하려는 이들로 붐비는 인천공항.
특히 우리 경제를 견인해온 전자, 자동차, 중공업, 철강 등의 수출 대기업들이 최근에는 예전만 못한 실적을 보이면서, 세계 속 한국 경제의 경쟁력에 대한 의문이 커진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전통적인 시장이 휘청하면서 중국과 인도 같은 신흥 시장이 그동안 한국을 먹여살려왔는데, 이 시장이 어느 순간 경쟁 생산국으로 바뀌면서 한국의 경제가 샌드위치 상황에 빠져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삼성전자의 실적 악화라고 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캐시카우(cash cow) 구실을 해온 반도체와 휴대전화, 최근에는 스마트폰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고, 중국 같은 후발주자들과의 기술 차이가 없어지거나 오히려 역전당하면서 수익이 악화됐다. 그래서 출장비를 줄인다느니, 교육비·마케팅 비용 등 각종 지출을 줄인다고 연일 언론에서 호들갑을 떤다.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면 흑자를 낸 기업이 별로 없다는 객관적인 지표에 근거하면 이런 우려는 합당하다. 그리고 대다수 국민의 삶이 팍팍해졌다는 각종 조사결과를 보면 체감경제도 나빠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호들갑이 우리 미래에 진정 도움이 되려면 진정한 현재의 모습과 그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없어서 불행할까
우리의 경제위기에 대한 논란은 과연 현재가 어렵다는 얘기일까, 아니면 미래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일까. 국가 전체 수준에서 보면, 9월 기준 수출액은 476억9100만 달러이고, 무역흑자는 33억6000만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32개월 연속 흑자라고 한다.
2011년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한 한국은 수출로는 세계 7위, 전체 무역은 세계 10위, 국내총생산(GDP) 세계 15위다. 1인당 국민소득 2만(20K) 달러가 넘고 인구가 5000만(50M) 명이 넘는 ‘20-50 클럽’에도 가입했다. 세계에 여섯 나라밖에 없었고, 우리가 일곱 번째 나라가 됐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고려하지 않고 현재의 상태만 보면 국가적 위기 상태는 아니다.
각 기업은 어떨까. 흑자가 줄어들고 적자로 돌아선 기업이 늘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대표적인 예로 삼성전자가 최근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그런데 초라하다(?)는 삼성전자 실적이 10월 7일 발표에 따르면, 3분기 매출 47조 원, 영업이익 4조1000억 원이다. 현대자동차의 영업이익은 한 해 8조 원대를 유지하고, 포스코는 철강업계의 불황 속에서도 영업이익이 올해도 1조 원대를 넘을 거란다. 상위 20개 기업의 전체 영업이익이 줄어들었고 상위 20개 기업을 제외한 기업들의 실적은 상대적으로 더 악화됐지만, 동시에 SK하이닉스, LG전자, 현대건설 등은 오히려 영업이익이 크게 증가했다.
국민 개개인의 삶은 어떨까. 물론 어려운 사람이 아직도 많고 소득양극화 지수가 올라간다.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여전히 2만3000달러를 웃돌고, 우리의 경제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대기업은 수백만 명의 직원에게 아직도 꾸준히 월급을 지급한다. 어떻게 보면 그 월급을 꾸준히 지급하기에 영업이익이 줄어든다.
과연 국민의 체감경기가 나쁜 것이 국민 주머니에 원천적으로 돈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어디다 써버려서 돈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일까.
세계 최고의 소비 수준
한국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가계부담의 블랙홀은 역시 교육비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에 대학진학률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연간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사교육비 지출규모는 20조 원 정도다. 공교육에 들어가는 비용까지 계산하면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는 어떨까. 대학 연간 등록금 평균 633만 원에 4년제 대학생 225만 명을 곱하면 14조 원이 넘고, 전문대까지 합하면 그 규모는 더 커진다. 더구나 대학생 1인당 사교육비도 평균 20만5000원이라니 그 규모만 7000억 원대다. 다 합치면 교육비만 연간 35조 원이 넘는다. 이 엄청난 규모의 돈이 매년 새롭게 교육비로 지출된다. 즉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돈이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국민의 주머니로 그만큼의 돈이 들어갔다는 얘기가 된다. 교육비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의 소비 수준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권이다.
예를 들어 1인당 석유소비량이 세계 5위권(2008년 기준)이고, 연간 25조 원어치의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지고, 국내 수입 명품 시장은 연간 5조 원 규모다. 이 모든 것이 국민의 주머니에 들어간 돈을 소비해서 나온 수치다.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이 체감하는 경제적 어려움이 원천적으로 수입이 적어서일까, 아니면 상대적으로 너무 써서, 특히 쓸데없는 데 써서일까 고민해볼 문제다.
한때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상징이던 박노해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 씨는 최근 사진작가로 전 세계를 둘러보고 “이제 우리 사회에는 가난한 사람은 없다.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만 있다”고 얘기했다.
물론 말 그대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전혀 없다는 얘기도 아니고, 그들을 보살필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아니다. 다만 세계적으로 보면 한국인 소득, 특히 소비 수준은 이미 세계 최고권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위기라고 난리를 친다. 그러면서 지금 누리는 사치(세계적으로 보면)를 조금이라도 못 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며, 더 벌어야 한다고 외친다. 물론 모든 조건이 똑같다면 풍요로운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갖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소비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더구나 이미 90만큼 가지고 있는 것을 91이나 95만큼으로 올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희생이 필요하다. 마치 10시간의 수면시간을 9시간으로 줄이려 할 때와 3시간의 수면시간을 2시간으로 줄이려 할 때 그 한 시간은 똑같은 한 시간이 아닌 것과 같다.
진정 부족한 것
그렇다면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은 뭘까. 돈, 자동차, TV, 교육, 일…과연 이런 것들일까.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의외로 쉽다. 자신이 하루에 쓰는 자원, 대표적으로 시간이나 돈을 가장 많이 쓰는 활동과 가장 적게 쓰는 활동을 순서대로 나열해보자.
앞에서 얘기했듯이, 일상에서 조금만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나 당연히 부족하다고 여겼던 것들은 (객관적으로 거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미 우리 삶에 충분하다. 우리 삶에서 가장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 그래서 가장 부족한 것은 바로 ‘여가, 즐거움, 삶의 의미’와 같은 추상적인 것들이다.
1인당 근로시간이 긴 것은 이미 뉴스거리도 아니다. 연간 2163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이고 OECD 평균의 1.3배를 일한다. 우리와 생활수준이 비슷한 나라들과 비교하면 우리 삶에 무엇이 많아서 문제이고 무엇이 부족해서 문제인지 명확해진다. 성인만 그러한가. 청소년의 학습시간도 OECD 국가 평균은 33시간인데, 한국의 청소년들은 49시간이다. 앞에서 얘기한 사교육비나 교육비와 연계해 생각하면 우리 학생들이 뭔가를 덜 배워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OECD 국가들 중에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많이 공부하는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학습동기는 최하위권, 이제 더 이상 청년에 한정되지 않는 높은 실업률, 행복지수 최하위, OECD 국가들 중에 자살률 1위 등 다양한 부정적 부문에서 세계 수위를 다툰다.
필자와 같이 해외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얘기한다. 경제적인 면이나 물질적인 면에서는 대부분의 선진국 삶에 비해 우리의 삶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원시림이나 대자연에 간다면 몰라도, 웬만한 세계적인 도시에 가도 우리는 그리 감동을 받지 않는다. 고층빌딩, 음식, 각종 편의시설 등 우리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들은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삶의 자세, 습관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상의 모습이다. 선진국의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무조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노동시간을 늘리려 하지 않는다. 단지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일하지 않는 시간에 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돈이나 출세, 물질적인 획득을 포기할 만한 중요한 가치, 가족, 여가, 여유, 봉사 등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학교들이 주말이나 특히 연휴 직전에는 숙제를 내주지 않는다. 왜? 숙제 때문에 학생들이 놀지 못할까봐 그런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오히려 주말이나 연휴 직전에는 더 많은 숙제를 내주고, 심지어 꼭 연휴 직후에 시험을 본다. 왜? 주말과 연휴 동안 놀지 말고 공부하라고.
결핍과 성숙 사이
선진국과 우리의 차이는 바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관점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인간행동을 본능적 쾌락주의의 원리를 따르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런 원리를 따르는 대표적인 욕구가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항상성(Homeostasis)의 원리를 따른다. 항상성의 원리는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유지하려는 기본(default)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배고프지 않은 상태, 성욕이 충족된 상태, 편안한 상태, 피곤하지 않은 상태와 같이.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면 불편함을 느끼고 다시 기본 상태로 돌아가려는 동기가 생기고, 결국 이 동기가 인간행동을 지배한다고 한다.
이런 항상성의 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결핍이고 그 결핍된 무엇인가를 만족시키는 것이 중요해진다. 최근 약 200년을 빼면 인류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결핍의 연속이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부족한 식량, 추운 겨울, 더운 여름, 불편한 잠자리, 위험한 맹수들에게 노출돼 살아왔다.
그러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욕구 시스템이 항상성의 원리에 지배받는 것은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얘기가 된다. 특히 한국인에게 근대와 현대사는 모든 것이 결핍됐던 너무 가혹한 시대였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면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조차 결핍됐다. 이러한 지독한 결핍의 경험은 우리의 심리체계에 결여된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성장을 이루어낸 우리 사회는 객관적으로 보면 더 이상 결핍의 시대가 아니다. 계속 결핍의 요소에 관심을 갖고 모든 것을 결핍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미 엄청나게 풍요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단지 풍요가 너무 급작스럽게 찾아와서, 우리의 심리시스템이 쫓아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런 풍요가 상당히 오랫동안 천천히 찾아오면서 그 심리 시스템까지 체계적으로 변화시켜온 선진국들의 관점은 무엇일까. 바로 인간행동 성숙(flourish)의 원리다. 결핍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확인하고 마음껏 발현하려는 동기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다. 기는 아이가 수많은 실패에도 끊임없이 걷기를 시도하고, 굳이 어떤 보상이나 혜택이 없어도 무언가를 완성(master)하거나 향상하려는 노력,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는 시도와 갈등이 바로 이런 원리로 설명된다.
이런 성숙의 사회는 획일적이지 않다. 몇 가지에 불과한 본능적인 결핍에서 비롯되는 소수의 동기가 지배한다면, 그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은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성숙의 사회에서는 각자 개개인이 스스로 찾은 무언가를 추구하니 그 행동이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는 ‘미친놈’이 늘어나게 된다.
평생 돈도 안 벌고, 성공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고, 취업도 안 하고, 학교도 안 가고, 남이 안 하는 뭔가를 평생토록 추구하는 한마디로 ‘똘아이’의 천국이 된다. 아직 결핍의 원리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미친놈들은 처절한 사회적 제재를 받지만, 성숙의 사회에서는 격려와 지지를 받는다. 그런데 바로 이 미친 다양성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하는 창의성이다. 우리 사회가 창의적이지 못한 이유는 꽤 근본적이고 뿌리가 깊다.
놀아야 해결된다
최근 우리 사회가 안은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무엇인지 돌아보자. 자살률의 문제는 빈곤과 같은 경제적 원인으로 쉽게 귀결된다. 실업률도 경기가 나빠서 또는 구직자가 뭔가 부족해서라고 주장한다. 행복지수가 낮은 것도 소득양극화와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로 설명된다. 학습동기가 낮은 것은 공부를 덜 해서라고 한다. 뭔가 부족해서 그러니, 더 채워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더 뭔가를 열심히 하라고 한다.
분기 영업이익이 4조 원이 넘는 삼성전자는 비상 경영을 실시한다고, 그동안 실시해온 ‘work smart’에서 다시 ‘work hard’로 돌아간다. 2014년 추석 연휴에 처음 실시된 대체휴일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관련 토론회를 가보면 경제계는 경제적 어려움과 비용증가를 이유로 반대의견을 내세웠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경제계에서 제시하는 경제지표 중 하나가 제품의 재고율 증가였다. 재고율의 증가는 만들어놓은 상품 중에 팔리지 않는 비율이 증가하는 건데, 그러니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점을 지적했을 때, 경제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은 대부분 꿀먹은 벙어리였다.
과연 지금 한국의 경제 상황, 특히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생산의 문제일까, 더 많이 만들지 못해서 일어나는 문제일까, 아니면 물건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소비하지 않는 소비의 문제일까.
결핍의 원리에 지배를 받는 한국 사람들은 소비행동에도 다양성이 없다. 모두 비슷한 것을 먹고, 비슷한 것을 사고, 더 크고 화려한 것을 많이 소비하려 한다. 대부분이 먹고 마시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다. 주말 오전 대부분의 TV방송은 어디 가서 뭘 먹으면 맛있는지 보여주느라 바쁘고, 지방 곳곳에 찾아가서 먹고 오느라고 (먹는 것 빼고는 별로 하는 것도 없이) 고속도로는 자가용 승용차로 가득하다.
절반이 대학 진학 포기한다면…
경제규모에 맞지도 않는 큰 가전제품을 구매하고 큰 자가용을 유지하면서 쓸 돈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작은 집에서 출발하는 신혼부부조차 커다란 벽걸이 TV에, 김치냉장고를 갖춘다. 이들은 한 번뿐이라고 몇 백만 원을 들여 해외로 신혼여행을 간다. 신혼여행 내용도 엇비슷하다. 사진에 얼굴만 바꿔 끼워도 구분이 안 갈 정도다.
대부분의 국민은 대기업 제품을 구비해 경제적 욕구를 충족한다. 이런 소비를 더 하기 위해 대기업 제품의 가격을 인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큰 TV와 자동차와 해외여행은 필수품이 아닌데도, 마치 갖지 않으면 안 되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결핍의 무언가로 인식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경제는 대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중소기업과 재래시장은 힘들다고 걱정한다. 소규모인 자신들의 상점에는 손님이 없다고 불평한다.
이런 모순 속에서 우리는 더 일해야 한다고 한다. 왜? 그 부족한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다. 더 공부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혹시 우리의 자녀가 결핍에 빠질까봐.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공부하면 실업률이 내려가고, 자살률이 내려가고, 행복해질까. 아니다. 정반대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안 해야 일자리가 늘어난다. 아무도 연장근무, 초과근무를 하려 하지 않고 주말에 근무를 기피할 때, 새로운 사람에게 일자리가 돌아간다. 더 열심히 일했는데도 잘 안됐을 때 사람들은 더 억울하고 좌절하고 자살한다. 오히려 굳이 성공이 중요하지 않고 경쟁에서 이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살률은 내려간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근무시간과 학습시간에 절어 불행한데 더 절어보면 행복해질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면 그건 누가 봐도 미친 소리다. 매년 35조 원이 넘는 돈이 사교육과 대학교육에 들어가는데, 초중고 학생의 절반만 대학진학을 포기해보자. 그냥 쉽게 생각하면 시중에 약 17조 원의 돈이 매년 사교육과 대학이 아닌 어딘가로 쓰이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교육 시장은 고학력이나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으니, 17조 원의 돈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돌아갈 기회가 커진다. 이 17조 원은 대학을 가지 않은 청년들이 동네상권에서 창업해서 성공하는 데 기여하게 될지도 모른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보통 부동산 가격이 비싼 시내에 있는 회사 근처의 대규모 가게에서 대부분의 소비를 한다. 하지만 이들이 덜 일하게 되면, 이들의 소비는 동네, 지방, 소규모 상점으로 옮겨갈 확률이 높아진다. 큰 자동차와 큰 TV, 큰 냉장고 대신, 우리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와 여가를 찾아갈 때, 지금까지 경제적으로 소외돼온 다양한 영역의 소상인들이 돈을 번다. 결핍의 사회에서 성숙의 사회로의 전환만이 모두가 결핍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방안일지도 모른다.
다시 새마을운동?
우리 사회의 리더들은 지난 60년간 죽으라고 열심히 일해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이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바로 결핍의 원리다. 그럴 수밖에 없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태어나서 죽어라 하고 일해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온 우리의 리더들은 아직도 배고프다. 이들의 시선으로는, 노는 걸 좋아하거나 즐기면서 산다거나 성공이나 경쟁에 목매달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은 배고픔을 경험하지 못한 철없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세계경제가 휘청하고, 우리 경제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경기가 나빠지자 이들이 찾아낸 해결방법은 ‘다시 한 번 새마을운동’이다. 창조경제, 국민행복시대를 외치면서, 다시 과학기술 개발과 생산 확대, 교육 확대 같은 정책을 쏟아낸다. 심지어 창의성도 교육시키겠다고 한다.
이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창의성은 교육의 양을 줄일 때 (물론 적정 수준까지, 무조건 지금보다는) 생기는 것이지, 똑같은 교육을 시킨다고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뭔가 더 크고, 좋고, 세고, 빠른 것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우리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대국민 사기라는 것을. 경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출근시간을 당기고, 근무시간을 늘리고, 생산을 늘리고, 학습시간을 늘리라는 자신들이 결핍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졸부라는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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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보다 앞서간다는 선진사회는 모든 국민이 다 부자라서가 아니라 많은 국민이 부자가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성숙한 사회다. 그렇다고 이들은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확인해줄 더 큰 성숙의 가치를 가졌다. 이런 가치는 배워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삶에 마음의 여유가 주어질 때 스스로 찾고 정해지는 것이다. 이미 결핍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새마을운동이 아닌 ‘새마음운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