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마을에서 빠져나온 윤기철과 정순미는 윤기철의 선배 임승근의 도움으로 옌지의 한 호텔에 숨어든다.
- 둘의 행적을 쫓는 국정원은 북한 쪽에도 정보를 건네는 이중 플레이를 한다.
- 마침내 두 사람은 처음으로 몸을 섞는데….
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장씨가 낮게 말했지만 이미 차 안의 사내들은 앞쪽의 불빛을 보았다. 정순미는 의자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다. 윤기철은 검문소 앞에 세워진 차량 두 대를 보았다. 트럭과 소형 승용차다. 차량 통행이 뜸해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먼 쪽에서 전조등 빛 하나가 보였다.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은 더 뜸하다. 트럭 한 대가 반대쪽 검문소를 그냥 스치고 지나갔다. 거리가 200m쯤으로 가까워지면서 검문을 끝낸 트럭이 떠나고 소형차 한 대가 남았다. 차 안은 조용하다. 엔진음만 울린다. 윤기철이 머리를 돌려 옆에 누운 정순미를 보았다. 입을 약간 벌린 정순미는 잠이 든 것 같다. 문득 혼수상태인지 걱정이 됐지만 그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차가 멈췄다. 머리를 든 윤기철은 소형차가 출발하는 것을 보았다. 공안 두 명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그때 운전사 장씨가 창문을 열고 떠들썩한 목소리로 말했다.
“환자가 있다고 합니다.”
장씨 뒷좌석에 앉은 최영수가 윤기철에게 낮게 말했을 때 차 옆문이 열렸다. 찬 바람이 휘몰려 들어오면서 공안이 상반신을 굽혀 안쪽을 보았다. 정순미는 문 바로 앞쪽에 누워 있다. 그때 최영수가 공안에게 말했다. 중국어라 윤기철은 알아듣지 못했다. 정순미를 내려다보던 공안이 시선을 윤기철에게로 옮겼다. 룸라이트가 켜 져 있어서 공안의 넓은 얼굴이 다 드러났다. 작은 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장씨는 창가에 선 공안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그때 공안이 윤기철에게 물었고 최영수가 중국어로 대답했다. 공안이 최영수의 말을 듣더니 윤기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패스포트.”
윤기철이 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 내밀자 손전등으로 여권을 비춰본 공안이 윤기철의 얼굴과 대조했다. 그러더니 다시 정순미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어느새 장씨는 창가의 공안과 이야기를 그쳤고, 차 안에 정적이 3초쯤 덮였다. 이윽고 정순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공안이 최영수에게 말했다. 아직 손에는 윤기철의 여권이 쥐어져 있다. 최영수가 머리를 흔들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윤기철은 어금니를 물었다. 그때 뒤쪽이 환해지면서 트럭 한 대가 도착했고 공안이 시선을 다시 윤기철에게 옮겼다. 공안이 여권을 내밀면서 말했다.
“오케이.”
윤기철이 여권을 받자 공안이 시선을 다시 정순미에게 옮기더니 상반신을 차 밖으로 뺐다. 곧 옆문이 닫혔고 운전석 옆에 서 있던 공안이 뒤쪽 트럭으로 다가갔다. 장씨가 시동을 켜면서 말했다.
“살았다.”
차가 100m쯤 달렸을 때 최영수가 심호흡을 하면서 말했다.
“공안이 ‘누워 있는 여자가 탈북자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윤기철의 시선을 받은 최영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운이 좋았지요. 아마 귀찮아서 놔둔 것 같습니다.”
어깨를 늘어뜨린 윤기철이 소리죽여 숨을 내뱉었다. 귀찮아서 놔둔 바람에 한 생명이 살았다.
휴대전화가 울렸으므로 윤기철이 서둘러 집어 들었다. 발신자는 임승근이다. 중국 시각은 9시 52분, 윤기철이 휴대전화를 귀에 붙였다.
“응, 형.”
“지금 어디냐?”
“가는 중이야. 근데 순미 씨가 아파.”
“어디가?”
“몸살에 배탈 같은데 심해.”
윤기철이 옆에 누운 정순미를 보았다. 차는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중이다. 북상할수록 차량 통행이 잦아졌지만 장씨는 속력을 더 내었다.
“어때? 검문소는?”
임승근은 그것이 걱정인 것 같다. 숨을 고른 윤기철이 대답했다.
“하나 남았는데 그냥 돌파할 거야.”
“돌파하다니?”
“순미가 아파서 걷고 피하고 할 여유가 없어. 그냥.”
“야, 그런다고 모험을 해?”
오히려 임승근이 걱정을 했다. 앞자리에 앉은 최영수가 힐끗거린다. 그때 임승근이 물었다.
“너 무슨 호텔이라고 했지?”
“국제호텔.”
“몇 호실이야?”
이젠 숨길 이유가 없었으므로 윤기철이 바로 대답했다.
“412호실.”
“알았다. 몇 시쯤 도착할 것 같냐?”
“앞으로 세 시간쯤.”
그때 정순미가 꿈틀거리더니 눈을 떴으므로 윤기철이 서둘러 말했다.
“전화 다시 할게.”
방으로 들어선 윤기철은 잠이 든 정순미가 깰세라 조심스럽게 화장실로 들어섰다. 오전 3시 반이다. 술기운이 올랐지만 샤워를 하고나자 개운해지면서 온몸에 나른한 피로가 몰려왔다. 팬티 차림에 가운만 걸쳐 입고 화장실에서 나온 윤기철이 방 안의 불을 껐다. 방이 어두워지면서 창밖의 빛살이 흘러들었다. 주위는 조용하고 가끔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타이어 마찰음만 울렸다.
심호흡을 한 윤기철이 정순미의 옆쪽에 누웠다. 더블베드인데 가운데 한 사람이 넉넉하게 누울 만한 공간이 남았다. 천장을 향하고 누운 윤기철이 소리죽여 긴 숨을 뱉었다. 이제 만나기는 했다. 그러나 앞길은 첩첩산중이다. 몇 시간만 자고 일어나서 시내에 나가 정순미의 옷과 신발까지 모두 사와야 한다. 화장품도 잊지 말라고 임승근이 알려주었다. 한국 관광객으로 위장하려는 것이다. 선글라스가 필수이고 가능하면 고급 제품, 튀는 옷차림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바로 베이징으로 가는 교통편을 찾아야 한다. 베이징에서 상황을 점검한 후 서쪽 국경까지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것이다. 국경에서 3국으로 넘어가다가 잡히거나 중국 땅 안에서도 검문에 걸리면 여지없이 북한으로 추방된다. 그 과정이 한 달이 걸릴지 반년이 걸릴지 기약할 수 없다. 그때 정순미가 부스럭거리면서 윤기철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과장님.”
갈라진 목소리로 정순미가 불렀다. 머리를 돌린 윤기철은 정순미의 반짝이는 눈을 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어서 정순미의 맑은 눈이 드러났다. 잠에서 깬 얼굴이 아니다.
“어떡해요?”
정순미가 묻자 윤기철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뭘?”
“미안해서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뭐가?”
“저 때문에 회사요….”
“솔직히 개성공단 공장은 좌천이야. 자르기 전에 발령을 내는 곳이라고. 미련 없어.”
정순미가 입을 다물었고 둘은 시선만 마주쳤다. 그때 다시 침을 삼킨 윤기철이 입을 열었다.
“내일, 아니 오늘 오전에 이곳을 떠나야 돼. 이 좁은 바닥은 위험해.”
대충 사연을 알고 있는 터라 정순미는 시선만 주었고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놈들이 나도 알고 있다고 봐야 해. 그래서 형이 베이징까지 같이 가주기로 했어.”
“…죄송해요.”
“나한테만 죄송하면 돼.”
“국경을 넘어요?”
“응.”
“같이요?”
“응.”
“왜요?”
정순미의 시선을 받은 윤기철이 세 번째 침을 삼키고는 한쪽 손을 뻗었다.
“일루 와.”
그러자 정순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상반신을 일으켜 윤기철의 옆으로 다가와 누웠다. 윤기철이 뻗친 한쪽 팔로 정순미의 어깨를 감아 안았다. 정순미가 얼굴을 윤기철의 가슴에 묻으면서 몸까지 바짝 붙였다. 방 안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둘의 숨소리가 크게 울렸다.
“해도 돼?”
윤기철은 제 목소리가 갈라진 것을 들었다. 입 안이 바짝 말라서 침도 고이지 않는다. 그때 정순미가 윤기철의 허리를 감아 안으면서 대답했다.
“해요.”
상반신을 일으킨 윤기철도 먼저 정순미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정순미가 눈을 감고 기다렸다. 윤기철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가자 닫혔던 입술이 열렸다.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두 손을 엉거주춤 늘어뜨리던 정순미가 윤기철의 허리춤을 움켜잡았다가 내린다.
윤기철이 입술로 정순미의 입을 열려고 비벼보았지만 가쁜 호흡만 뱉어낼 뿐 이가 열리지 않았다. 참지 못한 윤기철이 정순미의 가운을 젖혔다. 그러자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의 알몸이 드러났다. 윤기철은 팔을 등 뒤로 돌려 브래지어의 호크를 풀었다. 정순미의 가쁜 숨결이 윤기철의 볼에 닿는다. 숨결에서 사과향이 맡아졌다.
곧 정순미의 젖가슴이 통째로 드러났고 윤기철의 입술이 젖가슴을 물었다. 먼저 입을 크게 벌려 젖가슴을 가득 물고 젖꼭지를 혀로 문지르자 정순미가 어느덧 두 손으로 윤기철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가쁜 숨소리가 방안을 메운다.
계속해서 신음하던 정순미가 움켜쥐었던 윤기철의 어깨를 끌어당기면서 잇새로 더 굵게 신음을 뱉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돼서 두 알몸이 부딪칠 때마다 물 때리는 소리가 난다. 그 순간 윤기철은 폭발했다. 정순미와 맞춘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윤기철은 정순미가 성 경험이 별로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전위 자세로만 끝냈는데, 만족했다. 정순미의 몸은 뜨거웠고 탄력이 강했으며 빈틈없이 받아들였다. 몸을 떼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정순미를 껴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정순미도 윤기철의 어깨를 감아 안은 채 가쁜 숨을 고른다. 그때 윤기철이 정순미의 입을 맞추고 나서 말했다.
“이젠 좀 부담이 덜어졌어?”
정순미가 눈의 초점을 잡고 바로 앞에 떠 있는 윤기철의 시선을 잡았다. 다시 윤기철이 정순미의 입을 맞췄다. 백 마디 말보다 이것이 낫다. 그때 정순미가 몸을 비틀면서 윤기철의 어깨를 밀었다.
“좀 씻고 올게요.”
윤기철이 옆으로 몸을 비켰고 정순미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때 정순미가 시트를 움켜쥐더니 머리를 들고 윤기철을 보았다.
“먼저 씻으세요. 난 조금 후에.”
침대에서 일어선 윤기철이 잠자코 알몸으로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 순간 윤기철은 숨을 들이켰다. 피다. 피가 묻어 있다.
“여긴 패전한 일본군 상황실 같군.”
담배를 종이컵에 던져 넣은 박도영이 말했다. 상황실 안은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벽시계가 오전 5시 반을 가리킨다. 상황실 안에는 박도영과 이인수 둘이 남았다. 한정철이 본부 요원들을 끌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곳 상황실 철수를 뜻하는지 어쩐지도 말해주지 않았으므로 터줏대감 둘이 지키는 셈이다.
“어떻게 알게 됐을까요?”
두 번째 질문이지만 답답해진 이인수가 건성으로 물었다. 시선도 상황판을 향해 있다.
“처음부터 우리를 믿지 않았던 게지.”
다시 담배를 꺼내 문 박도영이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뜬금없이 체크나 하고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았단 말야. 자네라도 믿겠나?”
“그나저나.”
머리를 돌린 이인수가 박도영을 보았다.
“본사에서는 어떻게 할까요?”
“쫓겠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박도영이 소파에 등을 붙였다.
“우리를 제외하고 말야. 본사는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것이지.”
“좆같이.”
“윤기철이는 대담한 놈이야. 우리만큼 윤기철이를 아는 사원이 없어.”
박도영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본사에서는 생각을 바꿔야 해.”
“어떻게 말입니까?”
“나 같으면 둘을 인도해서 입국시키겠다.”
“에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물론 시치미를 딱 떼는 거지.”
“저쪽이 속겠습니까?”
“다 알면서도 속는 척하는 게 정치고 외교다. 그래야 폼도 나고.”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린 박도영이 잇새로 말했다.
“시발놈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주눅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 시발놈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이인수는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하지만 공감한다는 표시로 긴 숨을 뱉었다.
오전 10시 반, 임승근이 사온 옷으로 갈아입은 정순미는 다른 사람 같았다. 필수품인 선글라스에 등산모, 등산화에다 고급 배낭까지 멘 정순미는 영락없이 돈 많은 한국 관광객이었다. 더구나 옅게 화장까지 한 터라 임승근은 연신 감탄했다. 마치 제가 창조해낸 생물처럼 정순미를 이리 보고 저리 보아서 정순미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과연 여자는 꾸미기 나름이야.”
방을 나오면서 임승근이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말했다.
“제수씨가 저렇게 섹시할 줄 그 누가 알았단 말이냐.”
정순미의 얼굴이 빨개졌으므로 윤기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형, 그만해.”
“시발. 지금 말하지만.”
엘리베이터에 오른 임승근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엘리베이터에는 셋뿐이다.
“너희들 어젯밤에 내지르는 소리 때문에 나, 한숨도 못 잤다.”
정순미는 윤기철의 등 뒤로 숨었고 임승근이 입을 벌리며 웃었다.
“형 정말 그럴 거야? 무슨 소리를 냈다고 그래?”
눈을 치켜뜬 윤기철이 임승근을 노려보았다. 긴장을 풀어주려고 그러는 줄은 알았지만 받아들이는 정순미가 너무 당황하는 것이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2층 식당층에서 멈추자 윤기철과 정순미가 먼저 내렸고 임승근은 로비층으로 내려갔다. 정순미는 선글라스를 고쳐 쓰면서 다섯 걸음 뒤쪽에서 따른다. 임승근은 프런트에서 체크아웃을 하려고 내려간 것이다.
북측 체포조가 국제호텔로 돌아오지 않은 윤기철을 찾아다닐 것은 분명한 터라 호텔에서 활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윤기철은 임승근의 옷으로 바꿔 입었고 변장용 도수 없는 뿔테 안경을 썼다. 임승근이 사온 것이다. 2층 식당층 계단을 내려가면 시장과 연결된 후문이 나온다. 혼잡한 계단을 내려가면서 힐끗 뒤를 보았더니 정순미가 세 걸음쯤 뒤로 다가와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정순미의 입술 끝이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후문으로 나온 윤기철이 시장 인파를 헤치고 대로에 들어섰다. 길가 상점 앞에 멈춰 선 윤기철의 옆으로 정순미가 붙어섰다. 그때 택시 한 대가 다가와 속력을 줄이더니 뒷좌석에 탄 임승근이 소리쳤다.
“야! 타!”
윤기철은 택시 뒷문을 열고 정순미를 먼저 태웠다. 그러고는 윤기철이 따라 오르자 뒷좌석이 꽉 찼다. 배낭은 운전사 옆자리에 쌓아놓고 택시는 출발했다. 택시가 속력을 냈을 때 윤기철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전 10시 45분이다. 임승근이 대절한 택시는 고속도로를 달려 북쪽의 둔화(敦化)까지 갈 예정이었다. 옌지에서 바로 고속버스나 열차를 타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둔화에서는 열차로 지린(吉林)까지, 지린에서 베이징까지는 고속버스를 탈 예정이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이인수가 두 번째 물었을 때 박도영이 어깨를 올렸다가 내리고는 입을 열었다.
“윤기철이 정보를 저쪽으로 다 넘긴 모양이다.”
“…”
“저쪽과 중국 공안에게 협조 요청을 하면 들어줄 테지, 범법 사실은 만들면 되니까.”
저쪽이란 북한이다. 숨을 들이켠 이인수가 앞에 놓인 엽차 잔을 들어 벌컥거리며 삼켰다. 둘은 사무실 근처 커피숍에 마주 앉아 있었는데 상황실이 폐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오후 12시 10분, 박도영은 방금 본사에서 돌아온 것이다. 주위를 둘러본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저쪽은 이제 윤기철과 정순미 둘을 쫓고 있어. 우리가 윤기철을 내준 것이지.”
“뭘로 내줬답니까? 뇌물로 바친 건가요?”
불쑥 되물은 이인수가 외면하고 말을 맺었다.
“좆같은 놈들.”
“한정철이 윗선의 지시를 받는 모양인데 그것이 누군지 모르겠다.”
“어디 그런 놈이 한둘입니까?”
“하지만 우군도 있었다.”
머리를 돌린 이인수가 박도영의 두 눈에 생기가 떠 있는 것을 보았다. 시선만 주는 이인수를 향해 박도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고위층이다.”
“누굽니까?”
“그건 못 밝혀.”
“여기가 북한 점령지입니까? 왜 못 밝히세요?”
“이 시발놈이.”
“답답해서 그럽니다.”
“상황실은 폐쇄되고 난 상황 점검차 중국으로 파견된다.”
숨을 죽인 이인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황실을 놔두고 커피숍으로 불러낸 이유를 이제야 안 것이다. 상황실에는 정리하려고 한정철이 보낸 요원이 와있다. 목소리를 낮춘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윤기철과 정순미의 동향을 체크하라는 애매한 지시를 받았다.”
그러고는 박도영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너하고 같이 간다.”
폴크스바겐 택시는 요란한 소음을 내며 고속도로를 달린다. 속도계를 보았더니 시속 150㎞가 넘었다가 내려갔다가 한다.
“지미 시발놈. 돈을 달라는 대로 주었더니 신바람을 내는구먼. 이거, 기를 죽일 수도 없고.”
혼잣말로 투덜거린 임승근이 정순미 건너편의 윤기철을 보았다. 셋의 몸이 딱 붙어 남자 둘은 모로 앉은 모양새가 됐지만 둘 다 체격이 크다.
“야, 열차가 4시에 출발해서 6시에 지린에 도착.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고속버스는 10시에 출발이다. 우리, 지린에서 하룻밤 쉴까?”
“아니, 그냥 가.”
윤기철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형이 분위기 부드럽게 하려고 농담해주는 건 고마운데 이거, 심각해, 형, 우린 잡히면 죽어.”
정순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몸을 뒤로 딱 젖혀서 등받이에 기대 두 남자의 머리가 정순미의 가슴 앞쪽으로 모인 꼴이 됐다. 정순미의 가슴 앞에서 임승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시발놈. 그래도 나는 네가 부럽다.”
“가능하면 빨리 국경을 넘어야 해.”
“이 사실을 먼저 언론에 터뜨리면 어떨까? 국정원이 널 팔아먹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리 생각하고 있었는지 임승근의 입에서 말이 술술 나왔다.
“지금이 어떤 세상이냐? 인권단체, 여야가 함께 나서서 떠들어댈 것 같은데, 국정원은 박살이 나고.”
“안돼.”
윤기철이 한마디로 말을 잘랐다. 정순미는 가슴 안의 두 머리를 보면서 숨을 죽이고 있다. 눈을 치켜뜬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나 살려고 한국 정부를 깨뜨릴 순 없어. 법을 어긴 건 나야.”
“이런 병신.”
“내가 국정원에서 수당까지 받았다고.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거였어.”
그때 임승근이 힐끗 정순미를 보더니 상체를 세우고 문 쪽으로 비켜 앉았다. 머리를 든 윤기철이 정순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
“미안.”
몸을 세운 윤기철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후회는 안 해. 이 말까지 들었어야 하는데 내가 좀 늦었군.”
“얀마, 농담 마.”
이번에는 임승근이 정색하고 나무랐다.
“그 연놈들은 이미 옌지를 빠져나간 지 오래야.”
김태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에 선 오병환을 보았다.
“동무 생각은 놈들이 어디로 갔을 것 같나?”
“일단은 옌지에서 멀어지겠지요.”
오병환이 바로 대답했다. 탈북자 체포조로 5년을 복무한 오병환이다. 김태영의 경력이 2년쯤 더 됐지만 이제 알 건 다 안다. 오후 12시 50분, 둘은 옌지시 국제호텔 로비에서 마주보고 서 있다. 오병환이 말을 이었다.
“다롄이나 지린 쪽으로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쪽 교통편이 많은데다 한국 관광객 사이에 끼어들기가 쉬우니까요.”
“그년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잡으라는 지시다.”
김태영의 이맛살이 버릇처럼 찌푸려졌다.
“지림, 다롄, 창춘까지 정보원을 풀어, 두 연놈의 인상착의를 보내고 여관까지 다 수색하라고 전해.”
“예, 사장님.”
몸을 돌리는 오병환에게 김태영이 말을 이었다.
“평양에서 중국 공안에 두 연놈의 신상 내역을 통보해줬다는 거야. 공안이 잡으면 바로 연락이 되겠지만 우리도 서둘러야 돼.”
임승근이 두 목소리를 들었다면 귀에 익다고 할 것이다. 바로 국제호텔 화장실에서 들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김태영도 발을 떼었다. 어젯밤부터 국제호텔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다가 허탕을 쳤다. 그래서 국제호텔을 본부로 삼고 시내를 수색했지만 10명 남짓한 병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이제 평양에서 공안에 협조 요청까지 한 데다 요원을 증강한다는 것이다. 해볼 만하다.
지린역 근처의 식당 방 안에 둘러앉은 셋이 저녁을 먹는다. 오후 7시 10분, 둥근 식탁 위에는 요리가 여러 개 놓였지만 셋은 깔짝대기만 한다. 특히 정순미의 얼굴은 상기됐고 지친 표정이다. 이윽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임승근이 윤기철을 보았다.
“오늘 지린에서 쉬자.”
“그래 형.”
윤기철이 순순히 대답하자 정순미가 둘을 번갈아 보았다.
“아뇨, 괜찮아요. 버스에 타기만 하면 되는걸요, 뭐.”
“거기서 앓으면 빼도 박도 못한다고.”
임승근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방 잡고 올 테니 여기서 좀 기다려.”
정순미가 배탈기는 나았지만 몸에 열이 나고 기력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임승근이 방을 나갔을 때 외면하고 있던 윤기철이 정순미에게 말했다.
“내가 어젯밤에 그랬기 때문이 아냐?”
그 순간 정순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외면하던 정순미가 머리를 내저었다.
“아녜요.”
“미안해.”
“그만해요.”
“처음인지 몰랐어.”
피 묻은 시트는 둘둘 뭉쳐서 구석에 박아놓고 호텔을 나온 것이다. 윤기철이 정순미를 지그시 보았다. 택시를 타고 둔화에서 내린 다음 열차로 지린까지 오는 동안 말할 여유가 없었기도 했다.
“난 좀 단순한 인간이야. 순미를 안고 싶었고 그래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던 것 같아.”
“그러지 마요.”
정순미가 머리를 돌려 윤기철을 보았다. 물기에 젖은 두 눈이 번들거렸고 얼굴은 붉게 상기됐다. 그 순간 윤기철은 숨을 들이켰다. 욕정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어젯밤 정순미를 안은 것은 부담감을 덜어주려는 의도가 많았다. 정순미가 대가를 주었다는 의식을 갖도록 시도했던 것이다. 그때 정순미가 말했다.
“그동안 계속 생각했어요.”
윤기철이 숨을 죽였고 정순미는 말을 이었다.
“제가 그럴 가치가 있는 여자인가 하고요.”
“…”
“제 목숨까지 구해주셨는데, 저 때문에 다 버리고 여기 오셨는데….”
마침내 정순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정순미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 부담을 덜어주시려고 대가를 받는 듯이 어젯밤 그렇게 하신 것도 알아요.”
“이런.”
“하지만 전 행복했어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선 윤기철이 정순미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주었다. 엉거주춤한 자세였는데 정순미가 두 팔을 벌려 윤기철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윤기철이 정순미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가 떼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해. 그래서 다 엎어놓고 온 거야. 이유는 그것뿐이라고. 내가 단순한 놈이라고 했잖아?”
“셋을 둔화까지 태워다준 택시 운전사를 찾았습니다.”
오병환이 휴대전화를 귀에 붙인 채 소리쳐 김태영에게 보고했다. 김태영의 사무실 안이다. 오병환이 말을 이었다.
“여자의 인상착의가 비슷합니다. 선글라스를 끼었지만 같다고 합니다.”
“남자가 둘이야?”
자리에서 일어선 김태영이 오병환 옆으로 다가가 섰다. 오병환은 지금 정보원의 연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예, 그런데 남자 둘은 윤기철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데요.”
오병환이 잠깐 듣고 나서 다시 말했다.
“둔화역 근처에 내려준 때가 2시 반쯤 됐다고 합니다.”
“…”
“돈이 많은 한국 관광객 행세를 했다는 겁니다.”
“역 근처라고 했지?”
김태영이 사무실 벽에 걸린 중국 지도를 보면서 물었다.
“둔화에서 열차를 타고 떠났군.”
벽시계가 오후 7시 10분을 가리킨다. 머리를 든 김태영이 말했다.
“둔화로 가자.”
쫓는 것이다. 김태영의 경험에 의하면 중국 땅에서 흔적이 발견되면 결국은 잡힌다. 땅이 넓어서 숨을 곳이 많은 것 같지만 그 반대다. 울타리가 넓을 뿐이어서 시간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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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좀 나아?”
생수에 적신 수건을 이마 위에 덮어주면서 윤기철이 물었다.
“네, 조금 나아요.”
정순미가 물기로 덮인 눈으로 윤기철을 보았다.
“고마워요. 과장님.”
“과장님 소리는 그만해. 나 이제 회사 끝났다.”
쓴웃음을 짓고 윤기철이 말하자 정순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떡해요.”
“어떡하긴? 회사가 어디 한둘인가?”
“모른 척하고 다닐 수 없어요?”
“나하고 같이 한국에 돌아가면 다 알게 될 텐데 어떻게?”
“…”
“걱정 마.”
윤기철이 손을 뻗어 정순미의 손을 쥐었다. 뜨거운 손이다. 정순미가 윤기철의 손을 마주 쥐었으므로 윤기철은 숨을 들이켰다. 손바닥에 금방 땀이 배었지만 둘은 고쳐 쥐었다. 그러다가 또 고쳐 쥔다.
“어디 갔어?”
화장실에서 돌아온 박도영이 방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상황실 안에는 이인수 혼자 남아 있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한정철과 요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실장님은 내일 아침 일찍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인수의 시선이 벽시계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후 11시 15분이다. 중국 시각으론 10시 15분일 것이다.
“요원 한 명도 옆방으로 보냈습니다. 할 일도 없는데 둘씩이나 앉아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렇군.”
털썩 소파에 앉은 박도영이 하품을 했다. 맞는 말이다. 지금쯤 윤기철은 위험을 무릅쓰고 북상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쪽에서 전혀 도움을 주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전화질만 하기에도 멋쩍다. 그것을 아는지 한정철도 재촉하지 않은 것이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문 박도영이 정색하고 이인수를 보았다.
“이곳은 윤기철의 상황을 파악하는 곳이고 또 다른 상황실이 회사에 있어.”
이인수는 시선만 주었는데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예상하고 있었다는 얼굴이다.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북측하고 연락을 하는 것 같다.”
“당연하지요.”
어깨를 늘어뜨린 이인수가 힐끗 상황판을 보았다. 옌지와 조중 국경 근처의 미관에 꽂힌 빨간 깃발이 초등학교 벽에 붙은 작품처럼 보였다. 외면한 이인수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사람 사는 데서 가끔 이렇게 신선한 일도 일어나야지요. 그래야지 어디 숨이 막혀서 살겠습니까?”
대답이 없었으므로 머리를 든 이인수는 박도영이 빈 담배를 입에 문 채 상황판을 응시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눈의 초점은 멀다. 갑자기 커피 생각이 난 이인수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보다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지금은 작전 중이다.
“이번에는 그냥 통과하지.”
멀리 검문소가 보이자 운전사 장씨가 말했다. 이제는 차량 통행이 잦아져 앞차와의 거리를 떼어놓느라고 장씨는 브레이크를 자주 밟는다. 국경에서 멀어질수록 검문 강도가 약해지는 것이다. 최영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대충 통과시키더구먼.”
오후에 남하할 때 장씨가 공안에게 담배를 준 곳이다. 이곳만 통과하면 검문소는 없다. 윤기철이 머리를 돌려 정순미를 보았다. 정순미는 의자 등받이를 조금 올린 채 누워 있었지만 이제는 잠에서 깨었다. 아직 열은 가시지 않았어도 정신이 조금 든 상태다.
“잠 깼어?”
“네.”
“우린 부부야, 알아?”
윤기철이 다시 정순미의 손을 쥐고 흔들었다. 앞쪽 최영수가 머리를 돌려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게 하십시다. 장형, 알았지요?”
“알았슴다.”
차의 속력을 줄이면서 장씨가 대답했다.
“그리고 우린 모르는 일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실 거요.”
문제가 생기면 빠지겠다는 말이다. 그때 차가 속력을 줄이더니 검문소로 다가갔다. 밤 10시 40분이다. 검문소 앞에는 10여 대의 차가 멈춰 있었지만 곧 출발했다. 공안이 차 안만 들여다보고 나서 손짓으로 보내는 것이다. 앞쪽에 승용차 두 대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공안이 손을 내밀어 신분증을 받아 보더니 곧 출발시켰다.
“어, 그자식이 어디 갔나?”
장씨가 혼잣말을 했는데 담배를 준 공안을 찾는 것 같다. 그때 순서가 돌아와 공안이 장씨가 열어놓은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소리쳐 묻는다. 장씨가 따라서 소리치듯 대답했고 최영수가 웃으며 손을 들었다. 공안의 시선이 윤기철과 정순미를 훑고 지나갔다. 그러더니 장씨에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최영수가 소리 내어 웃더니 대신 대답하고는 공안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담배를 받은 공안이 웃음 띤 얼굴로 한걸음 물러서면서 가라고 손짓을 했다. 장씨가 소리쳐 인사를 하고는 차를 발진했을 때 최영수가 윤기철에게 말했다.
“저놈도 탈북자 둘 싣고 오느냐고 묻는군요, 글쎄.”
중국어를 알아듣는 정순미는 웃음만 띠었지만 윤기철의 얼굴은 굳어졌다. 최영수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탈북자 넷이라고 했지요. 농담으로 넘겼지만 심장이 철렁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이젠 검문소는 다 지나갔지요?”
내려가면서 보았지만 확인하듯 윤기철이 묻자 장씨가 백미러에서 시선을 맞췄다.
“예, 없습니다. 이제 40㎞ 남았습니다.”
밤 11시가 돼간다. 그때 장씨가 윤기철에게 물었다.
“돈 쓰지 못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두 분이 나눠 가지세요.”
윤기철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약속대로 합시다.”
“고맙습니다.”
먼저 최영수가 웃음 띤 얼굴로 인사했다.
“우리도 보람이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 옌지에 가서 다시 상의를 하시지요.”
장씨가 백미러에 대고 열심히 말했다.
“이젠 돈 내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힘껏 도와드리지요.”
“차를 대기했습니다.”
문 밖에서 들리는 한국어를 임승근은 건성으로 들었다. 호텔 신문철에서 가져온 이틀 전 스포츠 신문을 펴든 임승근은 지금 변기에 앉아 있다. 오후 11시 5분, 그때 다시 사내가 말했다.
“412호실 키는 프런트에 맡기지 않았습니다.”
“알았어.”
다른 목소리가 대답한 순간 임승근은 숨을 죽였다. 신문을 펴 든 채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화장실 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임승근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진동 설정한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었을 때는 11시 15분이다. 발신자는 임승근, 차는 옌지 전방 12km 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어깨를 늘어뜨린 윤기철이 휴대전화를 귀에 붙였다.
“어, 형. 고생 많아.”
“어디냐?”
“옌지 12km 전방이야. 이제 30분쯤이면 도착하겠어.”
“너 그 호텔로 가지마. 위험해.”
임승근의 굳은 목소리를 들은 윤기철이 숨을 들이켰다. 휴대전화를 귀에 딱 붙인 윤기철이 물었다.
“왜?”
“내가 국제호텔에서 금방 나왔는데.”
임승근이 화장실에서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해주고 나서 길게 숨을 뱉었다.
“이거 진짜 기삿감이라니까. 너 내 호텔로 와. 내 방으로 오란 말이야.”
“…”
“동양호텔이지만 그 친구들이 잡히면 불지 모르니까 옌지호텔에서 내려달라고 해. 동양호텔은 옌지호텔 아래쪽이다.”
윤기철도 길게 숨을 뱉었다.
“고마워 형.”
휴대전화를 귀에서 뗀 윤기철이 앞에 대고 말했다.
“잠깐 옌지호텔로 갑시다. 거기서 누구를 만나기로 해서요.”
“알았습니다.”
장씨가 부담 없이 대답하고 최영수는 벌써부터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명함을 꺼냈다.
“이건 내 가게 전화번호입니다. 휴대전화 번호도 적혀 있어요.”
“지금쯤 옌지에 도착했겠지?”
문득 머리를 든 박도영이 물었을 때는 12시 반이다. 옌지는 11시 반이 됐을 것이다. 휴대전화 게임을 하던 이인수가 충혈된 눈으로 박도영을 보았다.
“도착했을 겁니다.”
박도영이 외면했고 이인수는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이인수의 휴대전화에서 게임 종료 신호음이 울렸다. 다시 박도영이 상황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윤기철은 우리한테 도움을 요청하지 않겠지?”
이인수가 시선을 들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뻔한 것을 왜 묻느냐는 표정을 짓는다. 그때 박도영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깊게 연기를 빨아들인 박도영이 왼쪽 공간을 향해 길게 내뿜었다.
“도움을 주기는커녕 밀고를 해버린 처지가 돼버렸으니.”
혼잣소리처럼 박도영이 말을 잇는다.
“그 시발놈들이 윤기철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텐데.”
“…”
“전화하기가 겁나는구먼.”
“…”
“너 안 죽었냐? 하고 묻는 거 같아서.”
다시 길게 연기 내뿜는 소리를 듣고 난 이인수가 휴대전화를 내리고는 박도영을 보았다.
“이 방법밖에 없었을까요?”
이번에는 박도영이 눈만 껌벅였고 이인수가 말을 이었다.
“좀 부끄럽습니다. 아니, 많이요.”
“…”
“정순미가 탈북했으면 회사에서 특별팀이라도 만들어서 별도로 보호해줬어야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못합니까?”
“…”
“쉽게 일하려고, 책임질 일은 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이 우리 회사에 진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야 간단하게 정의 내리지마.”
담배를 신문지 위에 비벼 불을 끈 박도영이 정색했다.
“국제관계, 특히 남북관계는 우리 같은 졸자들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다. 수많은 변수를 다 짚어야 된다.”
“변수는 무슨.”
“이 자식이.”
입맛을 다신 박도영이 다시 시계를 보았다. 12시 45분이다. 박도영은 시선을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에 주었다가 서둘러 옮겼다.
현관 밖까지 나와 기다리던 임승근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윤기철의 앞을 가로막듯 섰다. 임승근이 시선을 옆에 선 정순미에게로 옮겨졌다.
“안녕하세요.”
두 손을 모으고 선 정순미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머리칼을 차 안에서 잘 다듬었지만 곧 헝클어져 내렸다.
“으음.”
정순미를 응시한 채 임승근이 신음부터 뱉었다.
“이 여자를 위해 다 내놓고 온 거냐? 응? 목숨까지 걸었어?”
“형, 왜 이래?”
윤기철이 이맛살을 찌푸렸고 정순미는 머리를 숙였다. 그때 임승근이 말했다.
“내가 스위트룸으로 방을 옮겼으니까 셋이 잘 만해. 가자.”
몸을 돌린 임승근이 앞장서 가면서 머리만 비튼 채 정순미에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정미선 씨, 과연 기철이가 온몸을 던질 만하군요.”
“형, 정순미야.”
“이름이야 어떻든.”
어깨를 편 임승근이 현관 안으로 들어서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부럽다야. 이 미친놈아.”
“형, 약은?”
“감기약, 설사약, 해열제, 진통제, 피임약까지 다 사놨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남녀가 돌아보았으므로 임승근은 입을 다물었다.
오전 3시 반이 됐을 때 상황실 문이 열리더니 한정철이 들어섰다. 서두른 듯 노타이 셔츠 차림에 머리는 부스스했다. 자다가 바로 나온 것 같다. 상황실 소파에 누워 있던 박도영은 기척에도 깨지 않았지만 의자에서 졸던 이인수가 놀라 일어섰다.
“연락해봐.”
대뜸 소리치듯 말한 한정철이 눈으로 박도영을 가리켰다.
“저 친구 깨워.”
“일어났습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박도영이 말했다. 한정철은 요원 둘까지 데리고 왔으므로 상황실 분위기가 팽팽해졌다.
“무슨 일입니까?”
휴대전화를 집어 든 이인수를 보면서 박도영이 한정철에게 물었다.
“이 사람아, 무슨 일이긴?”
버럭 소리친 한정철이 벽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아직까지 호텔에 들어오지 않았단 말야! 벌써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 아닌가? 안 그래?”
“아직 도착을 안 했습니까?”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린 박도영이 한정철을 보았다.
“특보님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건 알 필요가 없고.”
한정철이 말을 잘랐을 때 소파에서 일어선 박도영이 이인수에게 손짓을 했다.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려던 이인수가 손을 늘어뜨렸다. 박도영이 의자에 앉은 한정철 앞으로 다가섰다. 상황실 분위기가 수상해지면서 모두 몸을 굳히고 박도영을 보았다.
“뭔가?”
한정철이 묻자 박도영이 시선을 준 채 대답했다.
“제가 이번 작전의 상황실장이올시다. 제가 모르는 일이 있습니까?”
“당신은 윤기철하고 연락만 하면 돼.”
뱉듯이 말했지만 한정철은 외면한 채 박도영의 시선을 받지 않는다.
“나머지는 회사에서 판단하는 거야.”
한정철의 시선이 이인수에게로 옮겨졌다.
“뭘 하나?”
스위트룸은 방 두 칸에 응접실, 방마다 화장실이 딸렸고 욕조는 안방에만 설치돼 있었다. 임승근은 윤기철과 정순미에게 안방을 내주었는데 미리 잘라 말했다.
“이 상황에서 네가 응접실에서 잔다든가 나하고 잔다든가 하는 개지랄을 떨면 아예 공안에다 신고를 해버릴 테니 둘이 안고 자.”
그래놓고 제풀에 제가 성내었다.
“내가 지금 무슨 꼴인지 모르겠네. 같이 자는 것에까지 신경을 쓰다니. 천하의 임승근이 옌지 땅까지 와서 뚜쟁이 노릇을 한단 말인가?”
사설을 들으면서 방으로 들어온 윤기철이 정순미에게 말했다.
“더운물로 씻고 나와. 그동안 내가 먹을 걸 좀 준비해놓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머리를 숙여 보인 정순미가 욕실로 들어서는 걸 보고 윤기철은 방을 나왔다. 그러나 임승근과 함께 먹을 것을 준비해놓고 방에 들어갔더니 정순미는 침대 구석에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호텔 가운으로 갈아입고 누운 정순미는 깊은 잠에 빠져서 기척을 크게 내어도 깨어나지 않는다. 혼수상태인가 걱정이 돼서 가까이 들여다보았더니 호흡이 깊고 고르다. 더운물에 상기된 피부는 윤기가 흘렀고 붉은 입술은 생기를 띠고 있었으므로 윤기철은 다시 방을 나왔다.
오전 2시 반, 방에 비치된 위스키와 맥주를 섞어 마시던 윤기철이 문득 임승근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 휴대전화 나한테 줘.”
“응?”
눈을 치켜뜬 임승근이 입맛을 다시더니 한 모금 폭탄주를 삼켰다.
“내 휴대전화를 갖고 가겠단 말이지?”
“서울에서 다시 하나 사. 이 번호는 취소하지 말고. 형하고 연락하게.”
“제기랄.”
윤기철은 임승근의 전화를 받고나서 자신의 휴대전화와 정순미한테 주었던 휴대전화까지 분해해서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화장실에서 임승근이 목소리를 들은 사내들은 북한의 탈북자 체포조다. 그리고 그들에게 정보를 준 사람은 바로 박도영, 이인수 팀일 것이었다.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는 것은 그들에게 따라오라고 깃발을 흔드는 것이나 같다. 그때 임승근이 정색하고 윤기철을 보았다.
“이건 대박이야. 국정원이 북한 쪽에 정보를 흘려서 정순미를 잡도록 했다는 것 말이다.”
“그랬는데 내가 눈치채고 딴 데로 샜다는 줄거리인가?”
“내 휴대전화를 쓴다면 나도 주연급이 되겠는데. 본의 아니게 말이다. 이건 실명으로 나갈 계획이거든.”
“잘됐네. 형은 매스컴 타는 거 좋아하잖아? 기사 쓰고 주인공도 되고.”
한 모금 폭탄주를 삼킨 윤기철이 조금 충혈된 눈으로 임승근을 보았다.
“형, 나 아침 일찍 옌지를 떠날 거야. 일단 위험한 이곳은 떠나야겠어.”
“어디로 갈 건데?”
“베이징.”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제3국을 통한 한국 입국을 알아봐야지.”
“그럼 베이징까지는 같이 가자. 같이 탈출 루트를 연구해보고.”
술잔에 위스키를 따르면서 임승근이 말을 이었다.
“너 내 여권이 필요할 거다. 네 여권으로 호텔 체크인 했다가는 바로 걸릴 테니 말이다.”
맞는 말이었으므로 눈만 껌벅이는 윤기철을 향해 임승근이 쓴웃음을 지었다.
“방 두 칸짜리 스위트룸이 없으면 넌 참아야겠다. 안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