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라이라마 5년 동행 취재하며 카메라에 담아
- 티베트 망명정부 근무자와 결혼…“이 生은 티베트 위해”
- 딸 인서에게 ‘뗀진빼마’ 이름 하사한 달라이라마
- 망명정부 현실 한국에 알리는 게 소명
2010년 인도 누브라밸리에서 법회 후 외신기자들과 함께 한 달라이라마. 두번째 줄 오른쪽이 필자.
대학 시절, 어머니의 출가를 라디오 드라마로 제작하겠다며 순천행 무궁화호에 녹음 장비를 싣고 선암사로 향하던 나는 강인해 보이려고 부단히도 애쓰던 스무 살이었다. 자아와 마음의 본질을 찾는 데 도취한 열정 넘치는 청년으로 비치고 싶었던 게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나의 본질’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졌고 단편영화 제작을 통해 답을 찾고 치유하려고 노력했다.
출가를 했음에도 전과 변함없이 자식을 챙기시던 어머니를 통해 접한 불교는 따뜻했고, 인자한 시각으로 인간을 직관하게 하며,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힘을 키우는 자량(資糧)이 됐다. 그렇게 어머니는 나에게 지친 영혼의 쉼터이자 유일한 치유의 안식처였다.
철저히 ‘자아’의 관점으로 바라본 세상은 일상을 개인화했고, 결국 내가 바뀌어야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도 변하지 않는다는 관념을 고착시켰다. 그러나 굳어지고 싶지 않았다. 변화 속에서 유연해지고 싶었고 그렇게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지극히 사랑한 탓에 정작 산문 안에 귀의하지 못했다.
이내 출가는 내 길이 아니라고 받아들이게 됐다. 그 계기가 된 때는 2009년 이른 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불교 국제영화제(Biff)를 참관하면서 또 다른 세상, 참된 인간에 대한 진정한 물음표를 접한 후부터다. 그렇게 나는 두 번째 인도 여행을 위한 배낭을 꾸렸다.
서른의 열병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위한 구상과 불교영화 수집을 위해 인도를 다시 찾는다는 명목이었으나 사실 나는 서른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조직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가치를 잃어버릴까 염려되는 삶의 패턴에 젖어 점차 궁극의 열정이 도태되는 걸 방관하고 싶지 않았다.
델리에서 남쪽, 목적지는 카르나타카주였다. 9년 전 대학 초년 시절 배낭여행으로 왔던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별천지였다. 남인도 문곳에 재건된 티베트 불교사원 대붕과 간덴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수천 명의 학승이 불교를 수학하는 사원마을은 14대 달라이라마(텐진가초)의 원력으로 인도 망명 이후 인도에 성공적으로 재건한 티베트불교 승가대학이다.
한국의 대학원에서 응용불교학을 수학하고 불교언론사 현장에서 접한 한국 불교의 실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다. ‘금강경’의 첫 구절, ‘가사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굽혀 법을 구한다’는 묘사가 눈앞에서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해가 지자 선선해진 사원 마당에선 논쟁이 벌어졌다. 금을 연마하듯 불법의 진리 또한 의문과 의심을 내어 정수만을 체득해야 한다는 인명학 수업이었다.
그리고 인도의 수도 델리를 거쳐 북쪽으로, 달라이라마가 수립한 티베트 망명정부 소재지인 다람살라로 향했다. 고열과 설사병으로 온몸이 무기력했으나 다람살라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다람살라행 야간 버스에 12시간을 의지했다. 히말라야 설산의 끝자락, 스며드는 한기에 어렴풋이 바라본 창밖은 한적한 산골마을이었다.
해발 1800m. 거의 한라산 정상 높이에 터를 마련한 티베트 망명정부는 1959년 3월 10일 중국의 티베트 침공에 항거하는 티베트 민중봉기 후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라마가 세운 티베트 난민지구다. 인도 전역의 46개 티베트 난민마을을 총괄해 책임 관리하는 중앙정부가 이곳 다람살라에 있다. 12만여 명의 티베트인이 그들의 살길을 위해 잠시 머물거나 정착하는 곳. 영국의 인도 점령 당시 군인들의 휴양지였으며 인도가 독립한 뒤 버려졌으나 달라이라마와 티베트인들이 재건한 이후 전 세계 여행자들과 지식인들의 영적 안식처로 변모한 곳. 망명 이후 인도에 난민으로 살면서 곧 티베트가 독립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기다린 것이 오늘로 55년이다.
티베트에 홀리다
병세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도끼로 머리를 찍는 듯 고통이 왔다. 아귀의 업보를 치르는 듯 음식을 삼킬 때는 목 줄기가 타들어가듯 아팠다. 명상과 호흡으로 다스리려 해봤지만 말초적 고통을 제어하기에도 역부족일 만큼 스스로의 근기가 미약했다. 약을 먹기 위해 수프를 먹는 것으로 속을 달래며 나름대로 치유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 달라이라마가 티베트 새해(로사) 외부 일정을 마치고 다람살라로 복귀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여느 여행자들과 어울려 달라이라마의 입성 환영 행렬에 동참했다. 호위 차량들 속에서 달라이라마의 모습은 한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에서 뵌 온화한 미소 그대로였다. 시대의 성인과의 눈맞춤은 고작해야 3초가량 됐을까. 흥분한 여행자들 속에서 나도 덩달아 환희심이 났다. 그 순간, 마치 지구의 자전이 멈춘 듯 고요의 적정에 들었고 나를 포위했던 고통은 오간 데 없었다.
귀국 후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를 받은 지 사흘 만에 기적처럼 회생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내가 왜 다람살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지를.
그리고 반년 후. 다람살라는 나의 집이 됐다. 티베트어를 공부하고 달라이라마의 정기 법문을 들으며 좋은 스승을 만나면 출가하고 싶다는 미련도 살짝 일으켜 보았다. 2009년 9월 한국인 불자들의 청으로 달라이라마의 법회가 열릴 때 적을 두고 있던 불교언론사에 법문을 중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중국 베이징에서 8년 만에 달라이라마 특사와 중국 정부 간의 외교 회담이 열렸으나 그 내용이 한국 언론에 자세히 보도되지 않았으니 심층 취재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를 계기로 다람살라에 거주하는 유일한 한국인 기자의 삶이 시작됐다.
베이징 특사 회담을 마치고 다람살라 티베트 망명정부로 복귀한 달라이라마 특사단의 기자회견이 열린 2010년 2월 2일. 나는 작은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참석했다. 그 현장에서 나는 티베트의 현실과 달라이라마, 그리고 티베트 망명정부의 삼합을 체감했고 이후로 홀린 듯이 티베트 불교문화와 망명정부의 현실을 한국에 알리는 길에 몰입하게 됐다.
‘불교의 지혜와 방편’
막상 객원기자 이름으로 불교언론사에 기사를 보내도 내용이 편집되거나 때로는 실리지 않았다. 기를 쓰고 취재한 원고료로 4만 원이 입금된 적도 있다. 10년이 넘도록 다람살라에서 한국인을 위한 법회를 주관해오신 진옥스님(경주 동국대 티베트 대장경 역경원 원장)이 카메라를 사는 데 보태라며 미화를 얼마 주신 것을 가지고 전문가용 카메라 장비를 정식으로 구입했다.
취재를 위한 경비는 대부분 사비로 충당해야 했고 통장 잔고는 항상 부족했다. 한국에 기사를 송고하면 원고료를 받았지만 활동 경비로 쓰기엔 역부족이었다. 취재 기사를 보내면 대부분 실어 주었지만 먼저 취재를 요청하지는 않는 구조였다.
그나마 정기적으로 매달 월간 ‘붓다’에 달라이라마의 법문을 기고한 것이 만 4년이 돼간다. 티베트불교에 큰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정우스님(서울 구룡사 회주, 조계종 군종특별교구장)의 은덕이다. 이 모두가 인내와 소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고 주변의 애정 어린 관심이 없었다면 진즉에 그만둬야 했을 일이다. 취재 일정은 철저히 혼자 계획해야 했고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버텨내는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티베트 망명정부 외교부에서 근무하는 패기 넘치는 남자다. 망명 3세대로 인도에서 태어난 무국적자다. 우리는 다람살라 인근의 산을 오르면서 티베트의 현안을 함께 고민하고 공감하기를 즐겼다. 자연스럽게 티베트 망명정부 젊은이들의 현주소도 접하게 됐다.
“이번 생은 티베트를 위해 살아보자”고 결심한 우리는 양가의 허락을 얻어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리고 아빠를 쏙 빼닮은 건강한 여자아이를 낳았다. 달라이라마께서는 티베트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성장할 우리의 딸 인서에게 직접 ‘뗀진빼마’(불교의 지혜와 방편을 의미하는 티베트어)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다.
임신 7개월 즈음이던 2011년 9월, 멕시코 법문 취재를 가게 됐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의 팬인 나로서는 달라이라마의 법문도 듣고 칼로의 생가 코야칸에서 그녀의 그림도 직접 보고 싶다는 바람이 컸다.
법회 일정 중 할리우드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가 운영하는 재단의 주관으로 티베트 사진전이 열렸고 아침 일찍 전시회에 참석해야 했다. 무리해서였을까. 100여 명의 귀빈과 외신 언론이 함께한 자리, 달라이라마 입장 5분 전에 극심한현기증을 느낀 후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기절한 시간은 7초가량. 배 속의 아이에게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으나 다행히 아이는 안전했다. 그날 눈밑으로 깊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초췌한 몰골로 달라이라마의 공식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그 순간을 살아라.’ 스스로에게 당부하는 나만의 결심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내가 항공료를 지원할 테니 티베트 민주주의 망명정부 수립 기념식에 함께 갑시다.”
2010년 8월 한국인법회가 열린 다람살라에서 달라이라마를 친견했을 때 달라이라마로부터 깜짝 제안을 받았다. 기자로서의 자부심이 일어난 순간으로 기억된다. 한국의 격동사와 유사한 경험을 한 티베트의 현대사를 공감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불교계 기자로서 미약한 환경에 처한 탓에 막상 한국에는 티베트 망명정부 수립 50주년 행사를 크게 알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큰 후회로 남는다.
9월 1일 오전 델리 공항에서 벵갈로르행 에어인디아 편에 오르자 달라이라마께서 환한 미소로 반겨주셨다. 그 자리에서 오른쪽 무릎을 꿇고 달라이라마의 손에 경의를 표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비행기로 남인도 세라 사원으로 향했고 유럽연합(EU)의 내빈들이 초청된 기념식에서 주옥같은 사진을 촬영하는 영광을 누렸다.
“김치를 매일 맛보겠네요”
달라이라마가 자진해 정치적 지도자 직무에서 은퇴하고 민주주의 방식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 3대 총리 시롭상상게 박사가 민주정부 총리직에 임명된 2011년 8월 8일. 티베트 망명정부가 반세기 역사를 딛고 민주주의로 도약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동참했다. 이날의 체험 역시 오랜 시간 내 몸과 마음을 전율케 하는 감동으로 회상될 것이다.
2010년 말 중동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은 인권과 자유가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실제인가를 방증했다. 재스민 혁명은 정권 교체를 수반하며 곳곳으로 확산됐고 마침내 중국으로까지 불씨가 번지며 지금 홍콩을 달구고 있는 우산혁명에 이르렀다. 일련의 민중봉기는 독재정권하에 만연한 부조리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였다.
그러나 여기 독재, 강압과는 반대가 되는 인물이 있으니, 국민 모두가 “떠나지 말아달아. 부디 우리 곁에서 숭고한 지도자로 머물러달라”며 말려도, 굳이 본인은 더 이상 머물러선 안 된다고 사양하며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내려놓은 이가 바로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라마다. 머무르고 떠남의 때를 잘 아는 지도자는 드물다. 간덴포당이라고 하는 티베트 정교(政敎)일치의 역사 370년은 오늘 14대 달라이라마에 이르러 완전한 민주주의 정부를 향한 개혁을 위해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첫 해외 취재로 2010년 4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개최된 마음과생명연구소 주관 ‘이타주의 경제학’ 포럼에 참석했을 때, 달라이라마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물으셨다. “일본에서 왔소?” 긴장한 탓에 “아닙니다. 한국에서 온 기자입니다”라고만 답하고 말았다. 달라이라마는 의아해하며 한참을 생각하고는 “그렇군요”라고 답하고 가던 길을 가셨다.
한국에도 티베트사무소가 있지만 현재까지 정식 인가를 받지 못한 상태로 운영되고 있다. 동북아시아를 총괄하는 대표부는 일본 시부야에 있고 달라이라마는 1970년대 이후로 매년 일본을 방문한다. 최근 7월에야 한국에서 달라이라마 방한 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우려해 지금까지 달라이라마의 한국 방문이 성사되지 못했고 전망도 불투명한 현실이다. 몽골 방문을 위해 한국 항공편을 수속해야 했지만 이마저 거절당한 일도 있다.
달라이라마의 법회를 취재중인 필자.
달라이라마를 친견하는 자리에서 필자의 딸에게 ‘뗀진빼마’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지구의 70억 인류가 신앙하는 다양한 종교가 있지만, 그 가운데 10억이 무종교인입니다. 그렇기에 종교를 넘어 우리는 인류 공동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마음의 평화와 연민의 자질을 키워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윤리라고 칭합니다. 우리는 종교가 지닌 모든 형식과 체제를 거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의 평화와 연민은 거부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이는 21세기 대화의 시대를 여는 가장 혁신적이고 개혁적인 불교 리더 달라이라마가 선포한 인류의 보편적인 책임이다. 여든의 노장은 새벽 3시에 일어나 3시간의 개인 명상을 끝낸 후 하루 종일 대중을 친견하고 법문하는 일정을 소화한다. 매년 가을 다람살라 정기법회 시즌이 되면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 국가의 불자들과 대만, 한국, 몽골의 불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달라이라마가 다람살라에 머무는 기간은 1년 중에 고작 3개월이 전부다. 대부분의 시간은 인도 전역과 해외 법문에 할애한다.
그 가운데 달라이라마의 주관으로 창립된 마음과생명연구소는 이미 30년이 됐다. 이 연구소는 불교를 통해 과학과 심리학 정신분석학 심지어 예술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경계 없이 교류하고 접점을 모색하는 작업을 펼친다. 달라이라마는 현대 과학과 불교가 만나 가능한 대화에 흥미를 가졌다. 현대의 과학 지식이 과거 불교 경론과 대론했을 때 오류 때문에 그 정당함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붓다의 말씀에 근거한 논전이라 하더라도 오늘의 언어로 수정되고 재증명돼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깨어 있는 종교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수용일 것이며 이 시대의 진정한 통섭이다.
인류의 진정한 과제
역대 달라이라마 가운데 가장 역동적인 삶을 사는 관세음보살(자비와 연민을 상징)의 화신. 세속 나이 12세 때 티베트의 법왕으로 옹립돼 16세에 자유를 잃고 19세에 국가를 빼앗겼으며 24세에 중국의 침공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55년의 세월을 인도에 투숙하는 가장 오래된 손님의 신분으로 전 세계에 인간의 가치를 설법하는 그는 “나의 이름이 단지 달라이라마일 뿐, 티베트 불교를 수행하는 단순한 승려”라며 법문 여행을 위한 가방을 꾸린다. 그의 소박한 적색 가방 안에는 눈물을 닦기 위한 손수건과 법문이 열리는 무대의 뜨거운 조명을 가리기 위한 모자, 그리고 투명한 유리 염주가 전부다.
나는 ‘인류의 공존과 종교 간의 화합 그리고 티베트의 현안 해결’에 대한, 그의 일생에 걸친 서원을 지지한다. 여든의 노장이 전하는 평화의 메시지 속에 담긴 티베트의 현안에서 오늘 우리가 담론해야 할 인류의 진정한 과제를 본다. 티베트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우리가 처한 인간의 보편적인 갈등 상황이 종식되는 것임과 동시에 진정한 인류애가 증명되는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러한 면에서 티베트 망명정부에서 5년간 보고 들은 바를 근거로 생생히 기록한 ‘달라이라마 마음의 고향을 찾아’(참글세상 출판)는 ‘나’를 재해석하고 확장해 진정한 ‘우리’를 모색하는 시대의 창이 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다람살라의 첫 몬순을 겪는 사이 카메라 렌즈에 닦아낼 수 없는 곰팡이가 생겼을 때 혼자 울었던 경험이 내가 티베트인들의 가슴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달라이라마가 늘 염려하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민주화가 바르게 정착되기를. 그리고 보다 가까운 미래에 그들이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달라이라마의 열반 이후 티베트인들이 겪게 될 절망과 혼란을 부디 그들 스스로 딛고 일어서는 힘을 키우는 데 미약하게나마 조력이 되기를.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것을 비로소 성취하는 날에 우리가 서로 부둥켜안고 어울려 환희의 춤을 추기를. 어머니의 연민으로 그들과 함께 선 이 길 위에서 살아 있는 모든 생명과 더불어 여여(如如)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