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br>레나타 살레츨 저, 박광호 역, 후마니타스
인간은 누구든지 예측하지 못했던, 그리고 순응하고 싶지 않았던 요인들에 이끌려
현재의 처지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새뮤얼 존슨 ‘라셀라스’ 중에서
그건 나의 선택이 아니야!
얼마 전 부다페스트에서 노트북컴퓨터를 잃어버린 나는 한 달 넘게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다. 처음에는 노트북을 유레일 기차 선반에 올려놓고 깜빡해버린 나 자신을 무던히도 원망했고, 나중에는 온갖 e메일과 전화를 동원해 아무리 간절한 ‘SOS’ 신호를 보내도 답장이 없는 헝가리 철도청에 분노했으며, 그러다가 비로소 주인 없는 노트북을 발견하고서도 기차역이나 경찰서에 알리지 않은 이름 모를 사람에게 분노했다.
분노의 시간이 지나가자 상실의 시간, 걱정의 시간이 도래했다. 내 노트북에 저장된 그 수많은 자료는 다 어디로 갔을까. 내 온갖 자료, 특히 수년 동안 모아둔 소중한 사진들, 무엇보다도 미처 백업하지 못한 원고나 아이디어 메모가 가슴을 찢어놓았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걱정이었다. 그런 걱정을 할 때조차 나는 ‘사람다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실의 시간이 지나가자 미쳐버릴 것 같은 불안의 시간이 도래했다. 그곳에 담긴 나의 개인 신상 정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곳에 저장된 공인인증서를 누가 복사하면 어떡하지? 주민등록번호도 어딘가에 저장돼 있을 텐데. 국적도 나이도 신분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이제는 내 얼굴과 내 정보를 다 알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그 소름끼치는 불안의 시간을 견디며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노트북을 새로 산 것이 아니라 공인인증서를 폐기한 것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그저 잃어버린 노트북과 똑같은 노트북을 삼으로써 상실감을 최소화하려 했을 것이다. 외국에서 공인인증서를 폐기하는 법을 몰라 온갖 관청에 다 전화를 해보고, 결국 엄청난 국제 전화 요금을 감당하며 무사히(?) 인증서를 폐기했다.
물론 그런다고 그 쓰라린 상실감과 불안감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공인인증서를 폐기하는 그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잠이 오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것은 노트북이라는 사물이었는데, 나를 미쳐버리게 한 것은 그 잃어버린 물건이 아니라 도난당한 정보였다. 나는 이미 내 정보에 대한 ‘선택권’을 상실했다.
레나타 살레츨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모든 것을 내 스스로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자본주의의 신화를 파헤친다. 제목부터가 가슴을 찌른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내게 이렇게 묻는 것만 같다. 너는 정말 네 삶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거니? 선택다운 선택을 해본 적이나 있는 거야? 네가 주체적인 선택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의 시스템이나, 아니면 ‘타인의 시선’이라는 무언의 압력에 굴복한 수동적인 적응은 아니었어?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이 책의 원제가 ‘선택의 폭정(暴政·The Tyranny of Choice)’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우리는 선택가능성이라 불리는 폭력적인 시스템 속에서, ‘내가 내 삶의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끝없이 ‘내가 뭔가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강박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구나. 처음부터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어.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던 네 환상이 바로 이 사회가 주입한 승자들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을까. 나는 어느새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사회의 선택을 망각하다
레나타 살레츨은 우리의 삶이 ‘개인의 합리적 선택’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의문부호를 붙인다. 그는 질문한다. 왜 의료보험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의료보험 개혁 법안 통과를 반대할까. 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까지 ‘내가 선택에 실패해서 내 삶이 이렇게 됐다’는 생각에 시달리는 것일까. 사람들은 대학은 물론 직업, 직장까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랑, 결혼, 출산의 문제까지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의 문제라고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
하지만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물어보자. 당신의 직업을 선택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직장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됐나요. 그 당시 주변에 있던 수많은 이성 중에서 왜 하필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됐는지요. 이런 질문에 똑 부러지게,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렇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매우 결정적인 부분을 ‘개인의 합리적 선택’만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하지만 일이 잘못됐을 경우, 내 삶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는 이런 자괴감에 빠져든다. 내가 뭔가 잘못 선택한 거야. 나에게는 오래전 선택권이 있었는데, 나는 제비를 잘 못 뽑은 거야. 나는 남자를 고르는 능력이 없어. 나는 내 재능을 판별할 능력이 없어.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며 자기파괴적인 우울로 치닫곤 한다. 그 모든 결정은 ‘개인의 합리적 선택’으로 좌지우지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곧잘 우리는 친구들에게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묻고, 웨이터에게 추천 메뉴를 묻기도 하며, 리뷰에서 사람들이 선택한 것을 따르기도 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라면 주방장이 추천하는 메뉴를 그냥 선택할지 모른다. (…) 그러나 요리가 나오면, 남들이 주문한 요리가 탐나고 또다시 잘못 선택했다는 느낌이 든다. 레스토랑에서의 메뉴 선택과 같은 단순한 선택조차도 그런 불안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런던의 어느 유명 레스토랑이 한 가지 메뉴만 제공하기로 결정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현재 그 레스토랑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선택지에 압도되어 있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 중에서
레나타 살레츨은 ‘선택의 합리성’이 아닌 ‘선택의 고통’에 주목한다. 음식점의 메뉴 하나를 고르는 데도 속 편하게 ‘후회 없는 선택’을 하지 못하는 우리, ‘짬짜면’이라는 엄청난 발명품을 만들어도 ‘그냥 짜장면만 먹을걸 그랬나?’하고 후회하는 우리, 달콤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가도 ‘이 시럽 한 스푼에 칼로리가 얼마지?’하고 자문하며 마음 놓고 커피 한 잔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우리의 불안을 해부한다. 그 불안에는 ‘우리의 무능력’이 아니라 이 모든 세부사항을 끊임없이 선택하느라 정신없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거대하고도 정교한 선택의 시스템이 가로놓여 있다. 우리가 물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효율성이라는 추상적 가치가 우리 일상을 지배하도록 만드는 가치의 전도가 가로놓여 있다.
선택의 여지는 남아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수많은 질문에 덧붙여 나 자신의 질문도 덧붙여 보았다. 왜 복지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까지 부자들의 증세에 반대하는 것일까. 왜 한 번도 자본가가 돼보지 못한 사람들이 ‘자본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일까. 왜 권력의 중심에 한 번도 서보지 못한 사람들이 권력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일까. 그 또한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이 ‘믿고 선택한 정치가들’이 사람들의 믿음에 부응한 적은 많지 않다. 게다가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의 선택’은 그 선택에 동의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의 분노와 울분에 발 디딘 채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진정으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엄청난 자유를 누린 적이 거의 없는 셈이다.
이 책은 무한한 선택이 가능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무한한 선택이 우리의 선택 불가능한 삶을 가리고 있는 거대한 장막임을 일깨운다. 그러나 살레츨의 결론은 비관적이지 않다. 우리가 ‘개인의 선택’에 집착하는 그 수많은 시간을, 그러니까 음료수와 화장품과 인테리어 소품을 고르는 데 바치는 시간을, 자동차와 카메라와 시계를 고르는 데 바치는 시간을, ‘나만의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으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으로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 개인의 선택에 보내는 수많은 시간을 ‘사회의 선택’‘공동체의 선택’에 활용해보자는 것이다.
‘기회균등의 시대’라는 환상, ‘모든 것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은 우리가 사회의 변화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빼앗아왔다.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한 스스로를 비판하는 동안, 이 사회가 수많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 사유를 할 시간이 없었다. 사회를 비판하기보다는 점점 더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데 열중하는 사람들, ‘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평생 자기계발의 환상에 빠져 쉴 새 없이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현대인에게, 저자는 눈길을 ‘나’에게만 고정하지 말고 ‘사회’와 ‘공동체’로 돌려보자고 제안한다.
선택은 늘 변화와 연결돼 있다. 우리는 개인적인 변화도 가능하지만 사회적 변화도 일으킬 수 있다. 환경을 변화시키는 결정도 할 수 있고, 신용평가기관을 바꾸겠다고 할 수도 있다. 기업이 우리를 통제하도록 하는 대신에, 우리가 기업을 통제하겠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에겐 변화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 과거에 우리가 한 국가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인민으로서 어떤 선택을 했듯이 우리는 장차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선택권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