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험사만 시가 대신 취득원가 적용
- 삼성측 “대주주 그룹 지배권 확보와 무관”
거듭된 ‘어닝쇼크’로 주가도 큰 폭으로 하락했다. 7월 30일 140만8000원을 기록한 삼성전자 주가는 10월 13일에는 107만8000원으로 석 달도 안 돼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졌다. 삼성전자의 실적 악화와 주가 하락은 삼성생명에도 악재다. 삼성전자 지분 7.6%를 보유한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주가 하락으로 석 달 만에 3조6000억 원 이상의 평가이익이 감소했다.
자산운용 한도 제한
우리나라는 은행, 보험, 증권, 저축은행 등 금융기관이 자산을 운용할 때 특정 채권이나 주식을 일정 비율 이상 보유하지 못하도록 한도를 정해놓았다. 특정 채권이나 주식에 과도하게 투자했다가 투자 실패로 금융기관 전체가 부실해지는 것을 막고, 대주주 등 특수관계인이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현행 보험업법에 따르면 보험사가 자산을 운용할 때 특정 유가증권에 총자산의 3% 이상을 투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법엔 한 가지 모순이 있다. 보험사의 자산운용비율을 산정할 때 분모가 되는 총자산에선 보유한 유가증권을 시가로 평가하지만, 분자가 되는 유가증권은 취득원가로 계산하는 것. 이처럼 분자와 분모의 계산 방식을 달리하면 실제로는 총자산의 3%를 초과해 보유해도 3% 이내로 보유한 것과 같은 착시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총자산이 100만 원인 A보험사가 총자산 3% 이내에서 자산을 운용토록 한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 B회사 주식 100주를 1주당 300원에 취득했다(100주×300원=3만 원). 나머지 자산 97만 원은 현금으로 보유했다. 주당 300원에 취득한 주가는 시간이 흘러 3000원이 됐다(100주×3000원=30만 원).
A보험사의 자산운용비율을 낼 때 총자산은 시가를 적용해 127만 원(현금 97만 원+30만 원)으로, 유가증권 평가액은 취득원가를 적용해 3만 원으로 계산한다. 이렇게 하면 A보험사의 유가증권 보유 비율은 2.3%로, 총자산 3% 한도 규정을 준수한 것이 된다. 그런데 A보험사가 보유한 유가증권을 시가로 계산하면 총자산 대비 유가증권 보유 비율은 23.6%로 크게 높아진다.
이처럼 자산운용비율 산정 때 분모와 분자에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다. 4월 7일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 의원 14명이 발의한 보험업법 개정안이 그것.
이 법안을 대표 발의한 이종걸 의원은 10월 14일 ‘신동아’ 인터뷰에서 “은행, 증권, 저축은행 등 금융기관이 자산운용비율을 계산할 때 모두 시가평가 방식을 적용하는데, 유독 보험회사만 취득원가로 산정해 자산운용비율 한도 제한이 유명무실해졌다”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 보험업법 개정안을 제출했다”고 말했다.
▼ 보험업법 개정안을 발의하게 된 배경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분모와 분자에 다른 기준을 적용해 자산운용비율을 계산하는 경우는 없다. 은행, 증권, 저축은행 등 다른 금융기관은 모두 분모와 분자에 모두 공정가격(시가)을 적용한다. 그런데 보험만 기준을 달리 적용한다.”
▼ 법안이 통과되면 국내 최대 보험사인 삼성생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삼성그룹 지배구조가 흔들릴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국내 기업인 삼성생명이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를 품고 있어서 생긴 문제다. 삼성전자 주식의 현실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현재의 산정 방식에 기대 지배구조를 유지하려 할 게 아니라, 이번 기회에 새로운 지배구조로 바꾸는 것이 앞으로의 삼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법이 통과되더라도 삼성이 받게 될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5년 동안 순차적으로 초과 지분을 팔도록 규정했다.”
▼ 국회 논의는 어떻게 진행되나.
“(법안이) 제출된 순서대로 국회에서 처리하다보니, 상임위 상정이 늦어졌다. 12월 정기국회 이전에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 국회 통과 가능성은.
“상임위에서 논의하는 과정에 의원들이 뭐가 문제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봐도 문제가 있기에 무난하게 통과될 것으로 예상한다.”
14개 순환출자 구조
보험업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삼성그룹 지배구조는 일대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현재 삼성그룹은 계열사 간에 14개의 순환출자 구조를 가졌다. 삼성물산을 매개로 7개의 환상(環狀)형 출자구조가 형성됐고, 삼성생명이 4개, 삼성화재해상보험이 3개의 순환출자 구조를 이룬다. 순환출자 매개 회사 중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회사가 이건희 회장이 대주주(20.8%)인 삼성생명이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7.6%를, 삼성전자는 삼성카드 지분 37.5%를 보유했다. 삼성카드는 제일모직(구 삼성에버랜드) 지분 5.0%를, 제일모직은 삼성생명 지분 19.3%를 갖고 있다. 삼성생명을 축으로 한 이 같은 순환출자 구조는 삼성생명 대주주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 등 삼성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촘촘해 보이는 삼성의 순환출자 구조는 보험업법이 개정되면 급격히 취약해질 수 있다. 지금까지는 보험사 자산운용비율 산정 때 취득원가를 적용했기에 총자산의 3% 넘게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하고도 한도에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공정가격(시가)을 적용하면 최소 10조 원 이상의 삼성전자 주식을 매각해야 할 처지가 된다.
이에 대해 삼성생명 측은 “보험사는 기본적으로 보험 계약기간에 맞춰 자산을 장기 보유하는데, 매입하는 시점에 먼 미래인 10년, 20년 후의 가격을 예측해 한도 초과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며 “보험사가 보유한 계열사 유가증권이 총자산의 3%를 초과하는지 여부는 유가증권을 매입할 당시 기준(취득원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시가로 평가하면 유가증권을 수시로 매매할 가능성이 커지고, 이는 자산운용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현재 삼성생명이 보유 중인 삼성전자 주식은 2000년 이전에 매입한 것으로, 매입 당시 총자산의 3%라는 규정에 맞게 운용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주식을 매입한 뒤 주가가 상승해 성공적인 투자로 인정받기도 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기준을 바꿔 매각을 강제하면 자칫 법의 소급적용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시가 기준을 적용하면 취득 후 주가가 오른 우량한 주식은 투자한도 때문에 처분해야 하고, 반대로 주가가 떨어진 주식은 투자한도가 늘어나는 문제가 생겨 비합리적이다.”
한편 삼성 측은 지배구조 변동 문제에 대해선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주식 보유는 우량 주식에 장기 투자하는 것으로, 대주주의 그룹 지배권 확보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며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