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니까 청춘이라지만, 요즘 청춘은 정말 아프다. 치솟는 등록금과 취업난에 ‘스펙’ 열풍까지…. 황새 따라갈 엄두를 못 내는 뱁새 대학생들에게 정말 절실한 건 아주 약간의 금전적 여유다.
-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밤 알바’를 거부하지 못하는 대학생의 현실을 알아보기 위해 대학 학보사 기자가 직접 현장에 뛰어들었다.
8월 27일 저녁 7시, 서관 2층 여자화장실에서 단장을 하고 건물을 나서자 한 친구가 “야, 화장이 너무 과한데…”라고 말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면서 “이건 뭐지?”라는 경멸조의 호기심을 잔뜩 드러낸 것이었다. 나는 도발적인 내 얼굴 화장에 만족하며 일터로 출근했다. 고작 이틀 만에 내가 스스로 바뀐 것이다.
-9월 29일 ‘고대신문’ 1면 ‘그는 물었다. 왜 이 일을 하려고 하느냐’ 중에서
9월 29일 오후 8시. 퇴근길 버스에 앉아 있었다. 유난히 지친 하루였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관성처럼 엄지손가락으로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내렸다. 수백 명의 ‘페친(페이스북 친구들)’이 저마다 뽐내듯 올려놓은 일상(日常)과 이상(理想), 그리고 사상(思想)…. 그 사이에 눈에 띄는 게시물 하나가 있었다.
댓글 200개, 조회 수 1만 건
고려대 학보 ‘고대신문’ 페이스북에 올라온 ‘고대신문 여기자의 바텐더 체험기’였다. 고대신문 기자 유민지(21) 씨가 서울 안암동 고려대 앞 토킹바에서 한 달간 바텐더를 체험하고 쓴 기사였다. A4용지 5장 분량쯤 되는 기사를 순식간에 읽어나갔다. 그리고 곧장 모바일로 유씨에게 e메일을 보냈다.
“고대생 바텐더라는, 특수한 상황을 설정해 보여주면서 등록금, 알바 문제까지 건드린 접근이 참 도발적이면서 참신하네요.”
곧이어 카카오톡으로 한 뼘 넘는 답장을 보내온 유씨와 10월 6일, 13일 두 차례 만났다. 한 달 이상 그가 경험한 바텐더 체험기와 함께 대학 언론의 현실, 그리고 요즘 대학생 문화에 대해 찬찬히 이야기를 나눴다.
유씨가 쓴 기사는 인터넷에서 큰 화제가 됐다. 고대신문 기사 최초로 인터넷 조회 수 1만 건을 돌파했고, ‘ㅍㅍㅅㅅ’라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 기사를 링크하면서 댓글이 200개 넘게 달렸다. 반응은 비판과 비난이 공존했다. “성을 상품화했다” “자극적 소재의 옐로 저널리즘” 등 유씨와 고대신문을 비판하는 댓글도 많았다.
이에 유씨는 “비난하는 댓글조차 관심이라는 생각에 반가웠다”고 말했다. 고대신문 주간인 박재영 미디어학과 교수는 “최근 대학 언론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 명맥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운 실정인데, 이처럼 대학 신문에 실린 기사가 사회적인 관심을 끌어낸 것은 이례적이다. 또한 이 기사는 대학 언론 기자가 한 달간 체험해서 쓴 최초의 내러티브 기사”라고 평가했다. 현재 고대신문의 취재기자는 6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3분의 1 수준이다. 고대신문 관계자는 “수시로 수습기자를 모집하지만 합격자 절반 이상이 일주일을 못 버티고 나간다”며 대학 언론의 현실을 전했다.
유씨는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3학년으로 올 초부터 고대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길게 뻗은 두 다리 때문에 실제 키(168㎝)보다 훨씬 커보였다. 허리를 높게 올려 입은 짧은 치마가 큰 키를 더욱 강조했다. 풍성한 웨이브 머리와 뾰쪽한 빨간 입술, 쌍꺼풀 없이 도톰한 눈매가 꼭 홍콩 여배우 수치(舒淇)와 닮아 보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정열적인 느낌이 좋아 스페인어학과를 택했다”고 발랄하게 재잘거렸다.
질문을 받으면 한참 머릿속에서 질문내용을 곱씹은 후 짧게 답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살짝 불편한 듯했다. 앳된 얼굴에 진한 화장을 하고 토킹바 어두운 조명 아래 서 있을 유씨를 상상해봤다. 사실 남자 동료들을 따라 비슷한 업태의 바에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 나와 비슷한 20대 후반 남짓이었을‘언니’들과 웃으며 대화도 많이 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440시간 바텐더 알바비
바텐더의 임무는 손님의 말을 들어주고 맞장구쳐주고 잔을 채워서 술을 많이 파는 것이다. 이런 토킹바는 손님과의 대화가 관건이다. 금지사항도 알려주었다. 손님 옆에 앉으면 안 되며, 손님이 자기를 만지도록 허락해서도 안 된다. 손님이 바텐더에게 술을 강권하면 거부해야 한다. 전화번호를 손님에게 주면 안 된다.
▼ 왜 바텐더 체험기를 쓰기로 했어요?
“사실 우연한 계기였어요. 작년에 한 주간지에서 ‘노동OTL’이라는 특집기사를 본 적 있어요. 기자들이 직접 감자탕집, 공장 등에서 한 달간 일하며 체험한 이야기를 쓴 기사였는데 그 어떤 노동 관련 기사보다 마음에 남았던 것 같아요. 제 친구 중 상당수가 등록금 때문에 ‘야간 알바’를 하거든요. 이유는 단 하나. 시급이 좋으니까. 실제 어떤지 궁금해서 체험기를 쓰겠다고 했죠. 그렇게 한 달 체험이 끝난 후 기사를 쓴 거예요.”
▼ 체험한 곳은 어떤 곳이었나요.
“고려대 앞 12년 된 바예요. 스탠드 좌석이 15개, 4인석 테이블이 7개 정도 있고 양주, 맥주, 와인을 파는데, 양주는 12만 원부터 시작하는…. 고려대생, 대학원생, 교수 그리고 고려대 졸업한 직장인이 많이 찾아요.”
▼ 처음 면접 봤을 땐 어땠어요?
“인터넷 알바 사이트에서 공고를 보고 갔는데, 사장이 제가 ‘고대생’이라고 했더니 싫어하더라고요. 고대생들은 불성실하고 금방 그만둔다며…. ‘등록금이 급하니 열심히 하겠다’고 매달린 끝에 1주일에 4번 일할 수 있게 됐어요.”
▼ 시급은 얼마?
“인터넷 알바 사이트 공고에서는 시급 1만2000원이라 했는데, 실제론 첫달에는 8000원이라고 하더라고요. 이제는 일한 지 한 달 넘어 9000원이에요. 1주일에 4번, 4~5시간씩 일하니 첫달 월급이 65만 원 정도였어요.”
▼ 반년 일하면 390만 원이네요. 이번 학기 등록금은 얼마였나요.
“350만 원이요. 저도 생각했어요. 총 440시간 밤잠 안 자고 바텐더 해야 350만 원을 모을 수 있어요. 근데 생활비도 많이 들고, 스펙 쌓으려면 학원도 다녀야 하고, 지방에서 온 친구들은 월세도 내야 하는데, 어림없죠.”
올해 사립대 평균 등록금은 연간 736만 원. 한 학기로 환산하면 368만 원이다.
▼ 학교생활하며 바텐더 알바하는 것만도 힘들 텐데,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려면 추가 알바를 하거나 장학금을 받아야 하네요.
“그렇죠. 오후 9시에 출근해서 새벽 2시까지 근무하고, 다음 날 9시 오전 수업에 가려니 정말 너무 힘들더라고요. ‘왜 해가 이렇게 빨리 뜨나’ 원망스러울 정도로.”
▼ 바텐더는 바에서 심부름해주고 술 따라주고 이야기만 하고…. 그리 힘들진 않을 것 같기도 한데.
“아유, 아니에요. 서비스직과 일용노동직을 합쳐놓은 일이에요. 손님이 있을 땐 이야기를 하지만, 손님이 없을 땐 다른 일을 해요. 진열장 술병을 닦는 것만 해도 큰일인데 술병 50개를 일일이 닦는 거예요. 무거운 술병을 하도 들었다 놨다 해서 팔이 덜덜 떨렸어요. 마감이 늦은 날은 새벽 5시에 끝나기도 했어요. 수업에 가려면 2시간 반밖에 못 자는 거예요.”
▼ 사실 한 달 체험으로 바텐더의 애환을 얼마나 제대로 느꼈을지 의문이에요.
“제가 이 일을 ‘진짜로’ 하고 있다고 느낀 게, 일이 없는 날은 안 나와도 된다는 연락이 오는데 그러면 맥이 풀리는 거예요. 머릿속에 그날 못 버는 일당이 떠오르고…. 한번은 계산 착오 때문에 사장한테 혼이 났는데 눈물이 핑 돌았어요. 그때 손님이 ‘얼음 좀 주세요’ 하고 절 부르는데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고 ‘네~’ 하고 대답했어요. 어느샌가 감정을 숨긴 채 일하는 게 몸에 뱄어요.”
9월 29일 발간된 고대신문 1758호 1면에 실린 기사 ‘그는 물었다. 왜 이 일을 하려고 하느냐’.
고대 졸업생이라고 했던 한 손님은 내가 예쁘다면서 치근거리다 만취하자 내게 “너랑 자고 싶어”라고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도와주고 나를 키워주겠다고 했다. 그러다 내가 고려대에 다닌다는 걸 알게 되자 그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저으면서 “아, 안되는데…”라고 중얼거렸다. 이런 일을 하는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그렇게 쉽게 보이는 것일까. 이날 집에 돌아와서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울었다.
▼ 불쾌한 경험도 많이 했겠네요.
“기사에도 썼듯, 술 취해서 팔목 잡고 ‘나 이상한 사람 아니다’라며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생떼 부리는 사람, 술 취한 채 내 손등에 뽀뽀를 하려던 사람, 데이트 신청하는 사람, 학생 중에는 ‘학교에서 만나면 손님이 아니라 선배로서 술 사주겠다’는 사람 등이 있었죠.”
▼ ‘진상 손님’은 대개 혼자 와요?
“누구랑 있는지는 관계없어요. 여러 명이 와서 한 명이 저한테 수작 부리는 걸 동영상으로 찍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주로 유부남들이었어요. 특히 새벽 2시 넘어 술 취해 오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해요.”
▼ 많이 속상했겠어요.
“그러려니 하다가도 핑 눈물이 돌고…. 쉽게 생각하다 문득 내가 고대생이라고 고백하면 태도가 바뀌는 사람들 보며 우습기도 하고.”
▼ 왜 고대생이라고 하면 갑자기 점잖은 척들을 했을까요.
“글쎄요. 너무 성적인 면이 강조될 것 같아서 답하기가…. 이유는 여러 가지 짐작할 수 있죠.”
▼ 손님 중에 개인적으로 친해진 사람도 있어요?
“네, 영문과 선배인데 단골이에요. 제 이름도 알고 있어요.”
▼ 여성 바텐더는 어쩌면 성을 상품화해 이윤을 남기는 직업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 남성 손님의 희롱이 당연히 따라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겪은 일들이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성이기 때문에 성적으로 불쾌한 경험을 하는 것, 대부분 일반적으로 겪는 일이잖아요. 같이 바텐더로 근무하는 언니는 휴대전화 판매 대리점에서 근무했을 때 같이 일하는 남자들의 성희롱이 지금보다 더 심했대요. 거기는 여자가 별로 없으니까. 저는 바텐더의 특수성이 아니라 야간 알바를 하는 여대생이 겪을 수 있는 공통적인 불쾌한 감정을 (기사에) 담고 싶었어요.”
▼ 맞아요. 사실 여성은 늘 성희롱이나 차별에 노출돼 있죠. 반면 여성이 직장에서 본인의 성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능력보다는 애교, 살가운 성격, 미모 같은 걸 적극 활용하려는…. 사실 바텐더도 외모가 예쁜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알바잖아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과외 알바’는 옛말
눈밑에 다크서클이 보기 흉할 정도로 짙게 새겨졌고 연신 하품이 나왔다. 비누질을 여러 번 했는데도 온몸에서 담배냄새가 났다. 수업시간에 졸지 않으려면 커피가 필요했다. 학교 근처에서 제일 싼 17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샀다. 이 일을 하면서 모든 것을 아르바이트 시간과 수입으로 환산하는 버릇이 생겼다. 늦잠 자느라 3시간짜리 수업을 빼먹은 날, 그만큼 등록금을 계산해봤다. 바텐더 일 4~5시간에 해당했다.
▼ 같이 일하는 바텐더 중에 대학생이 또 있나요.
“총 5명 중 저 포함해서 2명이 고대생이에요. 고려대 앞에 토크바가 11개인데 거기서 일하는 고대생도 많을 거예요.”
등록금은 치솟지만 과외 아르바이트 수요가 줄어 대학생들은 그나마 시급이 높은 ‘야간 아르바이트’를 선호한다. 한 사립대에 설치된 아르바이트 모집 게시판.
“네. 07학번 언니 하나는 몇 년째 바텐더로 일하고 있어요. 친구들은 대부분 졸업했다고 하더라고요. 바 외에도 야간 알바는 인기가 많아요.”
▼ 학교 수업 때문에 밤밖에 시간이 안 되는군요.
“그렇죠. 야간 알바가 시급이 많으니까.”
▼ 보통 알바는 시급이 얼마나 되죠?
“서울 종로 커피숍에서 알바한 적 있는데 시급 6000원 정도.”
2014년 최저임금은 5510원이다.
▼ 친구들, 과외는 많이 안 해요?
“많이 줄었어요. 학교 커뮤니티에 ‘과외 알바 넘깁니다’ 하는 글이 올라오면 조회 수 폭발하고 1시간 안에 마감돼요. 직업적으로 과외하는 전문 교사가 많아지고 대규모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가 인기 있으니, 풋내기 대학생한테는 과외 수업을 잘 안 맡기는 분위기예요. 요즘 과외 구하기 힘든 점을 노려 과외선생과 학생을 연결해주는 ‘과외 중개업체’가 많은데 수수료를 엄청 떼가요. 거의 첫달 과외비 전부 가져가요.”
▼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대학생도 과외 구하기 쉽지 않구나…. 요즘 과외비 시세는 어느 정도죠?
“서울 강남이 아닌 경우 고등학생 주 2회에 월 35만~40만 원? 중학생은 더 싸요. ‘물가는 팍팍 오르는데 과외비는 제자리’라는 얘기를 많이 해요. 근데 이것도 구하기 정말 힘들어요.”
스펙 열풍의 이면
▼ 80년대 학번만 해도 “과외비로 등록금, 생활비 다 마련했다”는 얘기를 하는데 정말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죠. 사실 05학번인 나도 대학 다닐 때 ‘상대적 박탈감’ 같은 걸 느꼈어요. 같은 과 친구들(고려대 국어국문학과)을 세 부류로 나누자면, 서울 강남 8학군 출신, 특목고 출신, 그리고 저처럼 서울 변두리 일반고나 지방에서 온 친구들이었어요. 용돈, 등록금을 다 부모한테 받아서 해결하는 친구들과, 나처럼 용돈 마련하려고 온 동네 다니며 과외 뛰는 애들은 학교생활이 달랐고 결과적으로 취업도 차이가 났어요. 앞의 두 부류 친구들이 대부분 고시에 합격하거나 로스쿨에 진학하거나 탄탄한 스펙을 앞세워 공기업, 대기업에 들어갔다면, 후자인 친구들은 조금 ‘빠지는’ 직장에 가더라고요.
“그래도 그때는 과외라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힘들어요. 요즘은 요구되는 스펙이 너무 많으니까 그것만 따라가기도 벅차요.”
▼ 어떤 것들이 있죠?
“토익 900점은 기본이고, 한자·한국어 자격증이랑 제2외국어 자격증까지, 어학만 해도 네 가지고, 컴퓨터 자격증이랑 해외 경험, 그리고 학점 등이요. ‘기본 스펙’을 쌓느라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나 스스로 질문할 시간도 없어요.”
▼ 내 생각엔, 대학생들이 스펙에 매달리는 건 열심히 살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것 같아요. 가시적인 성과를 내서 부모에게 칭찬받는 것에만 익숙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정작 본인이 꼭 하고 싶은 건 뭐예요?”라고 물었다. 당차게 대답을 이어가던 그가 이 질문에는 답을 찾느라 한참 고민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며, 그에게 빨리 답을 하라고 다그치기보다 그가 충분히 고민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기성세대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