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호

“한국생활 힘들 때 헐버트 박사(고종 외교자문) 묘지 찾아가 위로 받았죠”

‘비정상회담’ 똘똘이 스머프 타일러 라쉬

  •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입력2014-10-22 17: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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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예인? 그냥 방송 출연하는 대학원생
    • Mom 부를 때 ‘엄마~’
    • 미국인 유학생, 한미 관계 증진에 좋은 자산
    • 공자가 말하길 ‘스스로 한계 짓지 말라’
    “한국생활 힘들 때 헐버트 박사(고종 외교자문) 묘지 찾아가 위로 받았죠”
    “처음 인천공항에 착륙할 때 비행기 창밖을 보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렸다.”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수교를 맺은 후 프랑스 공사가 수집해 가서 아직 돌려주지 않고 있다.”

    “논어에 따르면 부모와 떨어져 사는 게 효(孝)가 아니다. 그러나 금의환향(錦衣還鄕)하지 못하는 것 역시 도리가 아니다.”

    타일러 라쉬(Tyler Lasch·27)가 화제의 예능 프로그램 ‘비정상회담’(jtbc)에서 남긴 어록이다. 다른 출연자들이 외모, 위트, 개인기 등을 앞세운다면 타일러의 브랜드는 해박한 지식, 고급 어휘 구사, 논리정연한 말솜씨다. 그의 프로필을 읊자면 이렇다. 미국 명문 시카고대 졸업, 6개 국어 구사, 한국 정부 국비 장학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석사과정 재학…. 이 ‘엄친아’급 스펙의 미국 청년은 어쩌다 한국에 와서 한국을 공부하게 된 걸까.

    ‘엄친아’급 스펙



    인터뷰 약속은 10월 10일로 잡혔다. 전날인 한글날 광화문광장에서 한국어 책을 기증받는 행사를 하는데, 그 준비로 바쁘다고 해서다. 이 행사는 타일러가 창립멤버이자 부회장을 맡은 주한미국인유학생협의회(AISA)가 마련한 것으로, 미국의 한국어 교육기관에 한국어 책을 기증하고 영어나 스페인어 책을 기증받는 국제 도서교환 프로그램 ‘Flybrary’(fly와 library의 합성어)의 일환이다. 목표는 1443권. 한글이 창제된 시점(1443년)과 맞췄다.

    좋은 뜻의 행사이기에 기증도 하고 구경도 할 겸 ‘신동아’를 비롯해 책을 한아름 들고 찾아갔다. 이미 수십 명의 여중·고생이 행사 부스를 에워싸고 타일러를 바라보느라 여념 없었다. “일 열심히 하는 것 좀 봐. 역시 모범생이야” “저런 남자 만나야 하는데!” 심지어 “사랑해요, 타일러!”라고 소리치는 여학생도, 선물이 담긴 쇼핑백을 수줍게 건네는 여학생도 있었다.

    ▼ 어제 보니까 가히 연예인급 인기더라고요.

    “하하. 연예인은 아니죠. 그냥 방송활동을 하는 대학원생으로 봐주세요. 지금은 교과과정을 끝내고 논문을 쓰고 있어요. 내년 2월 졸업이 목표예요.”

    ▼ 몇 권이나 모았어요?

    “3000권이 넘어요. 아직 뜯어보지도 못한 큰 상자도 12개나 되고요. 직접 못 온다고 택배로 보내주신 분들도 있거든요. 절 구경하던 여학생들도 길 건너 교보문고에서 책을 사갖고 와서 기부해줬어요.”

    이렇게 모은 책들은 미들버리대 몰입한국어교육원, 오클라호마주립대, 플로리다주립대 등 미국 고등교육기관에 전달될 예정이다. 타일러는 “제 고향인 버몬트 주(州) 미들버리대학에 한국어 책을 기증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버몬트 출신의 헐버트 박사를 계기로 구한말에 시작된 한국과 버몬트의 인연을 한층 더 끌어올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참고서에서 만난 헐버트 박사

    호머 헐버트(1863~1949)박사는 1886년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조선 땅에 들어와 외교자문관으로 고종 황제를 보좌한 인물이다. 1890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집필했고, 1905년 을사늑약 후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일본의 부당한 행각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한국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안 돼 한국에서 서거한 그는 ‘한국에 묻히길 원한다’는 유언대로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들었다.

    1950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한국 역사의 중요 인물임에도 헐버트 박사가 역사교과서에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5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니 한국인이 헐버트 박사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 헐버트 박사를 어떻게 알아요?

    “한국에 온 첫해에는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집착이 정말 컸어요. 일부러 영어 할 줄 아는 친구들을 피해 다닐 정도였죠. 어떻게 하면 한국인다운 한국어 실력을 갖출 수 있을까 고민하자 한국인 친구가 고등학생용 역사 참고서를 가져다 줬어요. 그 책에서 헐버트 박사를 처음 알게 됐어요. 버몬트는 강원도랑 경상북도, 경상남도를 합친 크기인데 인구는 60만 명밖에 안 되거든요. 그런 깡촌에서, 그것도 구한말에, 조선에까지 와서 훌륭한 일을 하신 분이 있다니 너무 신기했어요.”

    유난히 큰 눈을 반짝이며 시종일관 해맑던 타일러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2011년 8월 한국에 왔으니 벌써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외국인으로서 진입장벽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 ‘너는 이런 건 모를 거야’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외국인이라서야’ 하며 선을 긋는 사람이 종종 있어요. 게다가 미국보다 집도 좁고, 사람도 많고, 길거리에서 남자와 여자가 막 싸우기도 하고요. 가끔씩 한국에 온 게 잘한 선택이었나, 되돌아보곤 했어요.”

    이런 고민에 빠진 어느 날, 타일러는 혼자서 헐버트 박사의 묘지를 찾았다. 시끌벅적한 합정역 부근과는 달리 묘역은 푸르렀고, 한적했고, 평화로웠단다.

    “지금은 인터넷 검색만 하면 다 나오는 세상이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아무것도, 심지어 한국어사전도 없을 때 이 땅에 왔어요. 그럼에도 이 나라가 좋아서 살고 싶고, 기여하고 싶다고 하신 분이세요. 크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조만간 미국 친구들하고 또 가보기로 했어요.”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어에 매력을 느낀 것에서 시작됐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처음 접한 한국어는 영어나 스페인어와는 완전히 달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겨 ‘북한의 1990년대 대기근’을 주제로 학부 논문을 썼다. 졸업 후에는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1년간 근무했다.

    “한국생활 힘들 때 헐버트 박사(고종 외교자문) 묘지 찾아가 위로 받았죠”

    10월 9일 한글날 광화문광장에서 한국어책 기증행사를 벌이고 있는 타일러. 이날 기증된 수천 권의 책은 한국어를 가르치는 미국 고등교육기관에 전달될 예정이다.

    타일러표 외국어 학습 비법

    ▼ 영어 한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6개 국어를 한다면서요?

    “하하하. 이런 걸 침소봉대(針小棒大)라고 하죠? 한국어 실력이 늘면 그만큼 다른 외국어 실력은 줄어들어요. 언어 배우는 걸 좋아해서 학부 때 학기마다 다른 외국어를 공부했어요. 프랑스어는 어릴 때부터 배웠고, 일본어는 말은 못하지만 읽을 줄은 알아요. 스페인어는 독학으로 익혔는데 요즘엔 스페인어로 된 미국 뉴스를 즐겨 봐요. 같은 뉴스라도 영어로 된 것과는 내용이 좀 다르거든요.”

    팬들 사이에선 타일러의 외국어 학습 비법이 화제다. 그가 공개하는 비법은 이렇다. △마음에 드는 단어만 노트에 적는다(그래야 지겹지 않다) △한자도 함께 적어 이해를 돕는다(예를 들어 은퇴(隱退)와 은둔(隱遁) 둘 다에 ‘숨다’(hide)라는 의미가 있음을 이해하게 됨) △평소 생활에서 해당 언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타일러는 외국인 유학생들과 대화할 때도 되도록 한국어를 사용하려 애쓰는 것은 물론, 지메일(gmail.com) 환경을 한국어로 설정해뒀다. ‘Compose’가 아니라 ‘편지쓰기’를, ‘Send’가 아니라 ‘전송’을 누른다.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도, 실수가 엄청 많아도 말을 막 많이 해야 해요. 얼마 전에 어떤 남자 분이 저한테 ‘Can I take my picture to you?’ 하자 옆의 친구가 ‘야! to가 아니고 with라고 해야지!’ 하는 거예요. 미국에선 틀리게 말했다고 그렇게 바로 지적하지 않아요. 영어는 전 세계 사람들이 쓰는 언어니까요. 그러니 영어를 사용할 때 틀릴까봐 부담 가질 필요가 없어요. 부담을 주는 건 우리가 아니라 한국 사회예요. ‘국영수’라고 하죠? 영어를 일종의 평가 잣대로 삼았기 때문이에요. 한국 사람들도 ‘효꽈적’ 아니고 ‘효과적’이라고 발음해야 해, 하는 식으로 매번 지적하진 않잖아요.”

    “한국생활 힘들 때 헐버트 박사(고종 외교자문) 묘지 찾아가 위로 받았죠”

    타일러가 자신의 SNS에 올린 사진. 한국어를 공부할 때는 한글과 한자를 동시에 적어 이해를 돕는다.

    ▼ 얼마 전엔 누나 결혼식에서 김춘수의 ‘꽃’을 영어로 낭독했죠.

    “제가 생각하는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시 같아서요. 사랑이란 내가 그대 삶의 증인이 되는 것, 순수하게 그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누나가 이렇게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오랜만에 미국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이 떠올랐는지 타일러의 표정이 푸근해졌다. “참, 이제 엄마를 ‘엄마!’ 하고 불러요. 원래 ‘Hey, Ma’ 하는데, 이거랑 ‘엄마’랑 발음이 비슷하잖아요. 이젠 ‘엄마!’ 하면 엄마가 자기 부르는 줄 알아요. 하하.”

    ▼ 그래도 한국어 실력의 ‘갑’은 에네스?

    “줄리안도 잘하지만 당연히 에네스 형이죠. 실력이 아주 반짝반짝해요. 전 아무래도 학생이다보니 비속어나 술자리에서 하는 말들은 잘 모르거든요. 얼마 전에 와인 시음회에서 ‘스파클링 와인은 부드럽게 잘 넘어가기 때문에 한국에선 작업주라고도 한다’는 말을 듣고 정말 재밌었어요. 작업주라니, 되게 재미있는 표현이에요. 영어엔 이런 표현이 없거든요.”

    “주변 사람들 말은 씹어라!”

    방송에서 ‘이력서에 사진 붙이는 것은 부당하다’ ‘여태까지 탈모를 안 좋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등 의견을 소신껏 논리적으로 개진하기 때문인지, 혹은 ‘서울대생’ 간판 때문인지 타일러는 팬들로부터 고민 상담 e메일을 자주 받는다고 한다.

    ▼ 가장 자주 오는 고민 내용은 뭔가요.

    “진학 고민이 많아요. ‘인류학을 전공하고 싶은데, 취업하려면 경영학을 하래요’ 라든지, ‘외국어고 독일어과 가고 싶은데 부모님은 중국어과를 가야 나중에 성공한다고 해요’ 같은.”

    ▼ 뭐라고 조언하고 싶나요.

    “음, 이게 너무 미국적인 생각일 수도 있는데요, 저는 ‘네가 중국어를 배우기로 결정했다고 해도 결국 잘하진 못할 거야. 왜냐면 열정이 없으니까’라고 말하고 싶어요. 열정을 가지고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열정도 없이 남들을 이기겠어요. 부모라면 오히려 절대 중국어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기 싫은 것을 강요하는 건, 사실 실패의 레시피(recipe)를 쥐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 말은 씹어라,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라, 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타일러의 솔직, 당당하면서도 논리적인 성격은 그가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았던 웹진 ‘서울리즘’(seoulism.tistory. com)에 쓴 글에서도 드러난다. 그중 하나인 ‘한국인, 미국인보다 키가 작다?’라는 글의 요지는 이렇다(‘서울리즘’은 주한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국 생활에 대한 글을 한국어로 쓰는 온라인 매체다).

    내 키는 159cm다. 한국으로 유학 간다고 했을 때 모두들 이제 아동복을 입지 않아도 되겠다고, 딱 맞는 옷을 구할 수 있겠다며 축하해줬다. 왜냐면 동양인은 서양인보다 키가 작으니까. 하지만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서울지하철 2호선을 탄 순간 깨달았다. 나는 어딜 가나 키가 작구나. 하지만 선입견도 깨졌다. 미국인이 한국인보다 키가 크다는 생각 말이다. 한국을 더 잘 알고 싶고 한국인들과 어울리고 싶기에, 나는 선입견이 깨질 때마다 기분이 무지 좋다. 내 작은 몸에 딱 맞는 옷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천국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할지라도.

    -2013년 11월 15일 타일러

    “내 고향 버몬트는요…”

    ▼ 한국 남자들은 자기 키를 정확하게 밝히는 걸 꺼리거든요. 유명해지기 전에 쓴 글이지만, 공개하는 게 여전히 괜찮나요.

    “괜찮죠! 내가 이렇게 생긴 건데요 뭐. 키에 대해 거짓말하면 자신감이 생기나요? 거짓말에서 나온 자신감은 거짓 자신감인데? 전 방송용 비주얼이 아니죠. 키도 작고 머리숱도 없고. 하지만 매력이 외모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란 걸, 전 알아요.”

    또 다른 글에서 타일러는 연방제가 미국을 이해하는 키워드라고 말한다. 주마다 법률에서부터 역사교과서까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미국의 국어(國語)는 무엇인가요?’ ‘사립학교가 좋나요, 국립학교가 좋나요?’란 질문에 딱히 대답할 게 없다(타일러에 따르면 국어는 없지만 주어(州語)가 정해진 주가 있으며, 국립학교는 없고 주마다 주립학교는 있다고 한다). 타일러도 자신을 미국인이 아닌 ‘버몬트 사람(Vermont native)’이라고 소개한다.

    미국은 알아도 버몬트는 모르는 한국인을 위해 고향을 소개해달라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 쏟아낸다.

    “독립심과 진보정신이 강한 곳이에요. 미국은 1776년 독립선언을 하고 연방제를 택했는데, 버몬트는 이듬해 따로 버몬트공화국을 세웠어요. 독자적으로 나라를 운영하다가 1791년에야 연방에 가입합니다. 버몬트는 1777년에 맨 먼저 노예제를 폐지했을 정도로 진보적이에요. 동성혼이 가장 먼저 합법화한 곳도 버몬트죠. 미국에선 유럽과 달리 유전자변형식품(GMO) 표기 의무가 없는데, 버몬트에서 미국 최초로 표기를 의무화하겠다고 해서 거대기업 몬산토가 소송을 걸었다는 뉴스를 얼마 전에 봤어요.

    자연적으로는 뉴잉글랜드 내륙지방에 위치하고 산맥이 두 개 있고 단풍나무가 많아요. 그래서 한국에서도 가을만 되면 고향으로 돌아간 느낌이에요. 버몬트 사람들도 단풍 든 산으로 등산을 많이 가거든요. 유명인물로는 30대 미국 대통령인 캘빈 쿨리지를 배출했고, 수려한 자연경관이 많은 영감을 주기 때문에 문인도 여럿 배출했어요.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을 쓴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소설가 존 어빙과 자메이카 킨케이드가 버몬트 사람이에요. 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이 ‘정글북’을 쓴 곳도 버몬트고요.

    참! 버몬트 고속도로에선 옥외광고를 볼 수 없어요. 자연경관을 해친다고 해서 불법이거든요. 무지 유명하고 맛있는 아이스크림 벤앤드제리스(Ben&Jerries)도 버몬트 거예요….”

    “공자 왈 ‘스스로 한계 긋지 말라’…”

    타일러는 네트워크 이론을 국제정치학에 적용하는 김상배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유학생 유치 정책을 통한 네트워크 외교’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아이패드를 열어 몇 가지 통계를 보여줬다. 한국으로 오는 외국인 학생은 과거엔 어학연수 등 단기 체류 비중이 높았지만 최근 들어 학·석사 등 정규과정 비중이 더 높아지는 추세다. 타일러는 “한국도 선진국과 같은 유학 형태로 바뀌는 것”이라며 “이런 추세를 잘 활용해야 하는데 놓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한국에 미국인이 공부하러 온 건 1960년대 박정희 정권 때부터예요. 현재는 매년 3000여 명이 새로 유학비자를 받아요. 이 많은 인재가 그냥 흩어지는 게 너무 아까워서 올봄에 AISA를 만들었어요. 교환학생으로 잠깐 왔다 간 친구들도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 하거든요. 삼성전자나 네이버 ‘라인’에서 일하고 싶다는 친구, 한국 방송국 작가가 되고 싶다는 친구도 있어요.”

    ▼ 유학생이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굉장히 많아서…(웃음). 하나만 들자면 유학생이 적극적으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해요. 이번 한글날 행사를 예로 들자면, 한국에선 이력서 경력란에 ‘한국어책 기증 행사 지원 업무’라고 적으면 되지만, 미국에선 ‘어디서 몇 시간 동안 어떤 행사를 했고, 책을 몇 권 모았고, 그걸 어디로 보냈는데, 내가 기여한 바는 이렇다’ 하는 식으로 아주 자세하게 적어야 해요. 그래서 한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여러 경험을 쌓아야 하는데, 유학생을 인턴으로 뽑아놓고 아무 일도 안 시키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식이면 미국 가서 취업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든요.”

    외교관을 꿈꾸던 젊은 청년에게 방송 출연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SNS에 올린 한 장의 사진이 인터넷 기사가 돼 널리 퍼지고, 생애 첫 영상광고도 찍었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요즘엔 늘 모자와 선글라스를 챙겨 다닌다.

    ▼ 졸업 후 계획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방송 출연 이후 많은 게 달라져서요. 아… 또 공자를 얘기해도 되나?(웃음) 논어에 ‘스스로의 한계를 긋지 말라’는 말이 있어요. 미래에 대해 지금 뭔가를 정하는 건 스스로 한계 긋는 것이 될 수 있어서….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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