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호

“사고 원인 다 밝혀졌고 유병언 죽었는데 뭘 더?”

세월호 특검 무용론

  • 이정훈 |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14-10-23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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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찰의 ‘빈손 특검’ 만들기
    • 웬만한 건 검찰이 다 조사
    • 유병언 해외재산 찾기 쉽지 않아
    • 세월호 사건 직후 구성했어야
    “사고 원인 다 밝혀졌고 유병언 죽었는데 뭘 더?”

    10월 6일 세월호 참사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조은석 대검 형사부장. 그러나 세월호 참사 사건은 새로 구성될 특검을 통해 또 한 번 수사 받아야 한다.

    10월 6일 대검찰청이 세월호 참사 사건에 대한 종합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검찰 수사 종결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또 한 번 조사받아야 한다. 특검팀이 꾸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특검은 세월호 참사 직후 구성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 등이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고 그 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진상조사위원회에서 특검을 추천해야 한다”고 주장해 구성되지 못했다. 그 사이 검찰은 세월호 수사를 마무리했다.

    검찰과 특검은 경쟁 관계일 수밖에 없다. 한발 늦게 구성되는 특검은 검찰 수사를 재검토해 미비한 것과 잘못된 것, 그리고 검찰이 찾아내지 못한 것을 찾아내 추가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검찰 수사가 허방인 것이 밝혀진다면 검찰은 ‘물 수사를 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반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검찰 수사를 재탕한 것과 같은 결과를 내놓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특검은 물론이고 특검을 추천한 진상조사위, 특별법을 만든 정치권 모두가 비판 받는다. 르윈스키 사건을 수사했으나 이렇다 할 것을 내놓지 못해 ‘특검 무용론’을 불러일으킨 미국의 스타 특검을 재현하는 것이다.

    세월호 특검은 동일한 형사사건에 대해서는 두 번 심리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칙과 충돌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에 관련된 사람들은 대부분 피고가 돼 재판을 받았거나 지금 받고 있다. 특검은 이 재판에서 선고가 이뤄진 후 구성된다.



    따라서 특검은 검찰이 발견하지 못한 혐의를 찾아내야만 이들을 기소할 수 있다. 검찰은 이를 의식한 듯 특검을 빈손으로 만들기 위해 ‘싹쓸이 수사’를 했다. 11개 청(지검+지청)을 동원한 수사로 399명을 입건하고 158명을 기소했다.

    ‘빈손 특검 만들기’는 검찰의 지상목표였던 것 같다. 김진태 검찰총장은 “우리는 한다고 했는데 놓친 것이 있어 특검이 찾아낸다면, 그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며 최선을 다했음을 내비쳤다.

    이 같은 검찰의 의지가 부작용을 낳았다는 시각도 있다. “검찰이 특검은 물론이고 세월호 참사로 고통 받는 청와대까지 의식해 과잉 수사를 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이 논란은 특히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인 유병언(사망) 씨 관련 재판에서 뜨거워질 전망이다.

    돈 먹는 하마?

    세월호 특검은 고검장 대우를 받는 특별검사 1인에 지검장 대우를 받는 특검보 4인 정도로 구성될 전망이다. 고검장과 지검장은 차관급이니 이들에게는 ‘차관에 준하는’ 사무실과 부속실 직원, 자동차 등이 제공된다. 수뇌부인 이들은 지휘만 하고, 실제 수사는 검찰에서 파견한 검사와 수사관 등이 맡는다. 민간 변호사도 수사관으로 참여할 것이지만 과거 특검의 사례를 보면 검찰 측 인사들이 수사를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검찰에서 나온 이들이 수사를 주도한다는 점은 ‘재탕 수사’ 가능성이 높다는 암시다. 이들도 사무실을 차지하고 검찰 수사 자료를 검토한 후 관련자들을 불러 수사할 것이니 여기에 또 적지 않은 세금이 들어간다. 그런데도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특검은 그러잖아도 부족한 국고를 축낸 ‘돈 먹는 하마’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빈손 특검’은 오래전부터 예상됐다. 그런데도 만들기로 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수용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한 달 뒤인 5월 16일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세월호 가족대책위 대표 17명을 만난 자리에서 “특별법은 저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검경 수사 외에 특검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월호 특별법에 따라 구성될 진상조사위가 특검과 별도로 수사권 등을 갖는 데는 반대했다. 이러한 박 대통령의 결정이 정부 여당의 공식 의견이 됐다. 여야는 진상조사위의 권한에 대해서는 이견이 크지만 특검 설치에는 뜻을 같이하니 특검은 ‘얼마를 쓰더라도’ 설치될 수밖에 없다.

    특검은 과연 무엇을 밝혀낼 것인가. 특검 수사는 검찰 수사를 토대로 할 것이니 그 답은 검찰의 종합수사결과를 보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검찰은 세월호 참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수사했다. 첫째가 세월호 침몰의 직접 원인 부분인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청해진해운은 2012년 이 배를 일본에서 수입한 후 수리와 증축을 통해 239t의 무게를 늘렸다. 좌우 불균형도 발생시켰다. △사고 직전 세월호는 최대 화물 적재량의 2배가 넘는 과적을 했다. △과적을 하면 배가 물속으로 많이 가라앉으니, 과적한 무게(1065t)와 비슷한 무게의 평형수를 빼냄(1376t)으로써 배가 물속에 들어가는 선을 맞췄다. 과적을 하며 평형수를 줄여 복원력이 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컨테이너와 차량 등의 화물을 제대로 고박하지 않았다. △사고가 난 맹골수로에서 조타할 의무가 있는 선장은 침실에 있었고, 항해사와 조타수는 과도하게 변침(變針)을 해 그러잖아도 복원력이 약한 배를 쓰러지게 했다(자동차 운전에 비유하면 무게 중심이 높은 차를 심한 굽이 길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과도하게 핸들을 돌려 전복시켰다는 뜻).

    현장지휘관 임무 안했다

    “사고 원인 다 밝혀졌고 유병언 죽었는데 뭘 더?”

    4월 16일 전복된 세월호. 해경의 123정이 다가가자, 이준석 선장 등 세월호 선원들이 제일 먼저 123정으로 건너와 구조됐다.

    세월호 전복 침몰의 직접 원인은 누가 수사해도 명백하기에 추가할 것이 없어 보인다. 때문에 특검은 부차적인 요소를 찾는 데 주력할 것 같은데, 검찰은 이를 의식한 듯 사건의 본질이 아닌 부차적인 부분도 파고들어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청해진해운 관계자가 공무원이나 검사기관원에게 금품을 건넨 사실을 밝혀내 금품이나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 그리고 해운 비리 전반으로 수사를 확대해 88명의 ‘해피아’를 구속기소했다.

    해양경찰청의 부실한 대응도 따지고 들어갔다. 현장에 출동했던 목포해경 123정의 미숙한 대처와 그곳에서 선박 관제를 담당하는 진도 VTS (Vessel Traffic Service)의 잘못된 운영을 거론했다. 검찰은 123정에 대해서는 OSC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했다. On Scene Commander의 약자인 OSC는 ‘현장지휘관’으로 번역된다.

    검찰은 123정 정장인 김모 경위가 그날의 OSC였다고 단정한다. 관련 법령에 따라 123정은 세월호가 참사를 당한 ‘진도 연안 3구역’에서 해상경비와 해난구조, 해양오염 감시, 해양범죄 조사, 대(對)간첩작전 등 해양경찰이 해야 하는 모든 임무를 책임지는 지서(支署) 격이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전복은 단원고 학생 최모 군이 당일 오전 8시 54분 휴대전화로 119에 신고 함으로써 알려졌다. 그리하여 123정이 출동했는데, 그때 목포해경서와 그 상위 기관인 서해지방해경청은 ‘해상수색구조 매뉴얼’에 따라 “김 정장이 OSC로 지정됐다”고 거듭 통보했다. 그러나 김 정장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검찰의 판단이다.

    현장지휘관이 해야 할 첫 번째 임무는 사고 선박과 교신해 긴급조치를 취하는 것인데, 그것부터 하지 않았다. 세월호의 이모 항해사가 인근에 있는 배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국제조난주파수(VHF 16번 채널)로 두 번이나 호출했을 때도 그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9시 46분, 세월호에 다가가 선장 이모 씨 등이 제일 먼저 123정으로 건너올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세월호 승객들을 배 밖으로 나오게 하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9시 48분에는 123정 요원인 박모 경장이 세월호 조타실(운전실)에 들어갔으나 김 정장은 박 경장에게 세월호의 장비로 “퇴선하라”는 방송을 하라고 하지 않았다. 비상벨도 누르게 하지 않았다. 10시 10분경 배가 더 기울어져 객실 문 등으로 바닷물이 들어오자, 선미 침실에 있던 김모 군 등 11명이 자기 판단으로 배 밖으로 나왔는데, 이는 퇴선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는 증거다.

    123정은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할 때까지 대공(對空)마이크나 해경헬기에 달려 있는 마이크 등을 이용해 승객들에게 “배 밖으로 나오라”는 방송도 하지 않았다. 한 달 후 이것이 문제가 되자 함정 일지를 조작했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대공마이크로 방송했고, 123정 요원들에게 세월호로 올라가 승객들을 퇴선시키는 조치를 했다고 꾸몄다는 것.

    검찰은 해경의 진도 VTS가 야간에는 소속 요원의 절반 인원만으로 운영됐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들 역시 교신일지를 조작해 근무하지 않은 요원들도 야간에 근무한 것처럼 꾸몄다.

    부차적인 문제도 찾아내

    검찰은 해양경찰과 구난(救難)업체 언딘 사이의 뒷거래 사실도 찾아냈다. 육상교통에 비유하면 언딘은 레커차 업체라고 할 수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곳곳에 레커차가 대기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교통경찰로부터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받으면 달려와 차량을 견인해감으로써 먹고산다.

    사고 소식을 남보다 빨리 알려면 평소 교통경찰과 친해야 한다. 해양사고도 비슷하다. 해양경찰로부터 제일 먼저 정보를 받은 구난업체가 돈을 번다. 언딘은 해경 간부들과 평소 좋은 관계를 유지한 덕분에 사업을 잘할 수 있었다.

    해난 사고 처리 비용은 사고를 당한 선사(船社)가 지불하므로 선사는 보험회사와 상의해 구난업체를 선정해야 한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해경 측은 청해진해운에 전화를 걸어, “현재 사고 현장에 작업 중인 (구난) 업체로 언딘이 있다”고 거짓말을 해, 청해진해운과 언딘이 계약을 맺게 유도했다. 검찰은 이 때문에 청해진해운이 불리한 계약을 맺었다고 판단한다.

    그때 언딘의 김모 이사는 현장 선점을 통한 ‘알박기’를 했다. 영산강에서 수문 작업을 하던 협력업체의 바지선 2003금호호를 뺏다시피 끌어내 사고 현장으로 가게 한 것. 덕분에 2003금호호는 희생자 시신을 수습하는 유일한 잠수 작업 바지선으로 인정받았다. 한발 늦게 현장에 온 다른 바지선은 언론사의 취재 지원용 등으로 지정됐다.

    그런데 생존 가능자를 수색하려면 잠수사를 많이 투입해야 하고 이를 위해선 큰 바지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2003금호호로는 수색은커녕 맹골수로의 빠른 조류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자 언딘은 “경남 고성군 천해지조선소에 의뢰해 건조 중인 리베로호가 크니 그것을 투입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베로호는 진수만 하고 안전검사를 받지 못했기에 출항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적법하게 출항하려면 한 달이 걸릴 터였다.

    맹골수로에서 가까운 전남 해역에는 적법하게 동원할 수 있는 대형 바지선이 22척 있었다. 그러나 해경 본청의 최모 차장은 관련 법령을 임의로 해석해 천해지조선에 리베로호를 출항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천해지조선이 반발했다. 안전검사를 받지 않은 배는 조선소가 소유권을 행사하므로 불법 출항에 대한 책임도 조선소가 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실종자 가족 대표들은 생존자 구조를 위해 우수한 바지선의 출동을 강력히 요구했으므로 서해지방해경청은 당장 동원이 가능한 현대보령호를 제시했다. 그러나 최 차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목포해양경찰서를 통해 천해지조선소에 구난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목포해경 관계자가 “적법한 명령이 아니다”라고 반발했으나, 최 차장은 이를 묵살했다. 그리고 4월 23일, 30시간 먼저 현장에 와 있던 현대보령호를 빼내고 리베로호가 투입됐다. 이렇게 상세한 수사를 한 것은 검찰이 그만큼 집요했다는 뜻이다.

    의욕에 불탔던 구원파 수사

    검찰의 투지는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인 유병언 씨를 향하면서 정점에 올랐다. 유씨는 장인인 권신찬 목사(작고)와 함께 구원파를 만들었고, 권 목사가 타계한 후엔 단독으로 구원파를 이끌어왔다. 구원파는 교회 안에서만 신앙하는 것을 부정한다. 예수도 교회에서만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는데 후대 사람들이 교회를 만들어 요란하게 치장했다고 비판한다. 교회를 부정하니 목사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에겐 ‘광야에서든, 집에서든,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곳이 곧 교회다.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라고 주장했기에 구원파로 불리게 됐다. 이들은 목사라고 해서 성경을 가장 잘 풀이한다고 단정할 수 없기에 모두 열심히 성경을 읽어 각자 이해한 것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목사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성경을 잘 해석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게 됐다.

    유씨는 사업가다. 그런데 성경 이해가 남달랐기에 목사가 아님에도 구원파의 리더가 된 경우였다. 하지만 장인은 구원파를 만들기 전에 목사가 됐기에 목사로 불렸다. 유씨는 그러한 장인과도 각을 세웠다고 한다. “당신도 결국은 신도로부터 추앙받으려는 목사 아니냐”고 비판했던 것. 그러나 결별은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신도들은 권 목사와 유씨를 동시에 따르다가, 권 목사가 타계하자 유씨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권 목사의 딸이자 유씨의 부인인 권모 씨는 ‘아버지의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 크게 다투고 별거하게 됐다. 권 목사 타계 후 권씨는 권 목사 설교 녹음집을 들고 해외에 나가 있는 구원파 조직을 찾아가 선교했다고 한다. 유씨가 거처한 안성의 금수원에서는 권씨의 어머니도 생활했다. 서울에서 살아온 권씨는 안성에 가면 남편의 거처는 들르지 않고 친정어머니만 보고 왔다고 한다.

    일종의 무교회주의 단체였던 이들은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기독교 단체들이 ‘이단 시비’를 제기하면서 성장세가 멈췄다. 그리고 1987년 발생한 오대양 집단변사 사건의 주범이라는 의혹을 받으면서 큰 위기를 맞았다.

    이 사건은 한때 구원파에 몸담았다가 독립한 박순자 씨가 직원들이 공동 생활하는 오대양이라는 회사를 만들었으나, 사업에 실패해 고액의 부채를 갚지 못하게 되자 직원들과 함께 집단 자살한 사건이다. 오대양사건에서는 이들이 끌어온 돈이 어디로 갔는지가 문제가 됐다. 오대양은 고율의 이자를 주고 돈을 끌어왔기에 ‘빌려온 돈이 이자로 거의 다 나갔다’는 계산이 나왔으나, ‘오대양 뒤에 유병언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를 믿지 않게 됐다.

    “정권으로부터 탄압받았다”

    이 소문이 확산되자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오대양의 돈이 유씨나 구원파로 간 사실은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자 검찰은 과거 검찰 수사에서 무혐의 처분을 내린 다른 사건들을 엮어 기소했다. 그런데도 법원이 이를 유죄로 인정해, 유씨는 상습사기 혐의로 4년형을 살았다. 이에 대해 유씨는 평생 억울해하면서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오대양과 나는 아무 연관이 없다. 오대양 돈이 한 푼이라도 내게 온 적이 없다. 나는 상습사기를 한 사실도 없다. 그런데 내 반대파가 만든 이상한 여론과 그 여론을 잠재워야 했던 정권에 의해 억울하게 징역을 살았다. 나는 5공을 비롯한 권력 실세와 가깝게 지낸 적도 없다. 5공 시절 그들에게 바른말을 했다가 세무조사와 한강유람선 사업을 뺏기는 탄압만 당했다. 나는 정치인들과는 가깝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사고 원인 다 밝혀졌고 유병언 죽었는데 뭘 더?”

    청해진해운의 실질 소유주였던 유병언 씨 변사체가 발견된 전남 순천시 서면 신촌리 야산. 유씨가 객사함으로써 검찰과 특검은 더 이상 수사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대양 출신 생존자와 그에게 상습사기 혐의를 씌우게 한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이 구원파에 들어오려고 했을 때 전혀 반대하지 않았고, 세월호 사건이 나기 전까지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

    오대양이라는 거대한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구원파 리더가 세월호의 실소유주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의 흥미를 자극했다. 세월호 사고 이면에 뭔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나 검찰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청해진해운은 해운업계의 나쁜 관례에 따라 세월호를 운영했을 뿐이다. 해피아와 유착하고, 화물을 과적하고도 제대로 고박하지 않고 부주의하게 운항하다 304명이 사망·실종하는 엄청난 사고를 낸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본 세월호 사건은 한마디로 ‘돈 먹는 하마’다.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특별법에 따라 세월호 참사를 수습하는 데 6214억 원가량이 소요될 것 같다는 보고서를 국회에 낸 적이 있다. 그러나 기업체와 민간이 낸 각종 지원금과 해군과 해경 등이 자체 예산으로 집행한 구조비용 등을 보태면 1조 원이 넘을 수도 있다. 여기에 특검과 진상조사위의 운영비용 등이 추가될 것이다.

    정부는 일단 국고로 비용을 지출한 후 청해진해운에 구상권을 청구해 충당하기로 했다. 청해진해운은 보험금과 자체 자금 등으로 이 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청해진해운은 주식회사라, 주식을 소각하고 회사를 해체하면 책임을 물을 길이 없다. 그렇다면 이 회사의 실질 소유주인 유병언 씨의 재산이라도 압류해야 한다. 그런데 유씨는 청해진해운의 주식을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검찰은 유씨가 실질적으로 경영권을 행사한 정황을 찾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찾아낸 것이 유씨와 그의 일가가 계열사로부터 상표권료, 고문료, 경영자문료, 사진 대금 등의 명목으로 가져간 1836억 원이다. 검찰은 이 돈을 유씨가 불법 갈취한 것으로 보고 전액 환수하기로 했다. 검찰은 환수가 가능한 돈을 1334억 원으로 판단하고, 5차례 추징보전 명령을 내려 86%인 1157억 원을 동결했다.

    검찰은 유씨와 그 일가, 회사 등에 청구할 구상권 금액이 4031억 원이 될 것으로 추정한다. 1157억 원은 29%밖에 안 된다. 검찰은 나머지 71%에 해당하는 2874억원을 더 찾아내야 한다. 그러려면 유씨를 잡아 조사해 숨겨놓은 다른 재산을 찾아내야 한다. 검찰이 유씨 체포를 목표로 삼으면서 ‘오대양 그림자’에 둘러싸인 구원파와 그는 전 국민의 관심을 받게 됐다.

    유씨 검거는 인천지방검찰청이 맡았다.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인천지검은 어이없는 실수로 유씨를 눈앞에 두고도 검거에 실패했다. 검찰이 헛발질을 하는 사이 유씨는 객사(客死)해버렸다.

    검찰은 국내에 있는 유씨와 그 일가의 재산은 다 찾아냈다고 보고 해외재산을 추적하려 했다. 그런데 유씨의 죽음으로 일이 어렵게 됐다. 미국검찰이 ‘재산 관리인’으로 보고 강제 송환시켜준 김혜경 씨가 입을 열거나, 프랑스에서 범죄인 인도 재판을 받는 유씨의 장녀 섬나 씨가 강제 송환되고, 행방이 묘연한 차남 혁기 씨 등이 들어와야 실마리를 잡을 것으로 보인다.

    공방 예상되는 추징금 재판

    구원파는 자살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제대로 수색했다면 인천지검은 얼마든지 유씨를 검거할 수 있었다. 그들은 무교회운동을 할 정도로 혁신적인 신앙을 하기에 불법행위는 꺼렸다고 한다. 해경 본청으로부터 여러 차례 지시와 명령을 받고서야 리베로호를 출항시킨 천해지조선만 봐도 그렇다. 천해지조선은 구원파의 계열사다. 천해지 측은 한 식구가 사고를 당했는데도 해경청의 지시가 부당하다며 한때 리베로호 차출을 거부했다.

    검찰은 유씨와 그 일가의 해외재산 조사는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사를 종결한다고 밝혔다. 이는 추징 가능한 해외재산이 그리 많지 않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해외재산을 추징하려면 재판을 해야 하는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들이 불법으로 재산을 마련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유씨 등이 상표권과 고문료, 경영자문료, 사진 대금 등으로 계열사의 돈을 가져갔다고 본다. 하지만 일부 법률 전문가들은 이것이 횡령이 아니라 적법한 거래일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적잖은 재벌과 기업인이 이런 방법으로 돈을 가져간다고 말한다.

    “재벌이 지배하는 지주회사는 사업장이 없다. 그런 지주회사가 계열사에 투자한 주식 배당금만으로 수입을 잡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계열사 중에는 적자를 보는 곳도 많아 배당금 수입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상표권 거래를 많이 사용한다. 삼성이나 현대차, SK그룹 계열사는 모두 삼성, 현대, SK가 들어가는 회사명을 사용한다. 이 이름을 붙이느냐 마느냐에 따라 매출이 달라지니 지주회사는 이들에게 상당한 상표권료를 요구할 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노예계약이 아니면 모든 계약을 인정한다. 상표권료를 매출액의 10%로 잡든 50%로 잡든 당사자 간에 합리적인 합의가 이뤄졌다면 인정하는 것이다.

    고문료, 경영자문료도 지주회사가 돈을 챙기는 상투적인 방법이다. 계열사는 회장님의 말씀에 따라 투자를 하고 경영 방침을 결정하니, 지주회사는 계열사로부터 고문료와 경영자문료를 상표권료처럼 적법하게 챙길 수 있다. 지주회사는 적법성을 보장받기 위해 이 거래를 전부 국세청에 신고한다. 그러니 지주회사는 횡령이 아니고 적법한 거래에 따른 수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유병언 씨는 ‘아해’라는 이름으로 사진을 찍어왔다. 계열사들은 이 사진을 고가로 구매했다. 검찰은 구원파 계열사가 거액을 주고 유씨 사진을 매입한 것은 불법으로 본다. 그러나 일부 법조인들은 부적 거래를 예로 들어 검찰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부적을 만드는 데 들어간 원가는 100원도 안 될 것이다. 글씨를 쓴 공임을 보태도 1만 원, 10만 원을 넘기 힘들다. 그런데 이 부적을 1000만 원이나 1억 원에 팔았다면 그는 사기를 친 것인가, 아닌가? 결론은 ‘아니다’다. 부적은 원가가 아니라 부적에 신묘한 힘이 있다고 보는 것이기에, 1억 원으로 평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술품에 대한 가치도 유사하게 결정된다. 계열사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어 지불했다고 하면 유씨 사진 거래는 사기로 인정하기 어렵다.”

    이런 재판에서 진다면 검찰은 과잉수사를 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재판이 끝난 후 구성될 특검은 무슨 수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유씨가 변사체로 발견된 후 ‘유씨는 객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피살됐다’ ‘순천에서 발견된 사체는 유씨가 아니다, 그는 살아 있다’ ‘유씨는 현 정부 실세와 아주 가까웠다’ 는 등 온갖 소문이 돌았다. 검찰은 이를 유언비어로 판단했다. 검찰은 ‘유씨가 정관계 유력인사를 상대로 골프채 로비를 한 적이 없다’ ‘유씨가 도피하기 위해 마련한 가방에는 로비 리스트나 비밀장부 등이 없었다’라고 분명히 밝혔다.

    “특검 구성은 실기(失機)했다”

    검찰이 유씨의 배후가 없다고 밝힌 것은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검이 이를 재조사하려면 유씨의 신병 확보가 꼭 필요한데 그는 사망했다. 그가 살아 있어야 “숨겨놓은 국내외 재산을 내놓으라”고 몰아치고, “당신을 보호하는 세력을 털어놓으라”고 할 터인데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특검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청와대 책임을 묻는 수사, 이를테면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 등에 대한 조사는 사건의 본질도 아닐뿐더러 소모적인 정치공방만 일으킬 것이다. 때문에 법조계 주변에선 “세월호 특검을 선뜻 맡으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수사를 잘하는 사람일수록 특검을 고사할 것이다”라는 얘기가 나온다. 자칫 국고만 축내고 검찰 수사 재탕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특검을 하려면, 사고 발생 직후 검찰이 수사에 들어가기 전에 했어야 옳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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