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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신 피 흘리겠다” 중국 포위전략 선봉 자임

1930년대 빼닮은 아베의 일본

  • 장량(張良) | 중국청년정치학원 객좌교수 · 정치학 박사

“미국 대신 피 흘리겠다” 중국 포위전략 선봉 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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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美, 자위대 북한 출병 관련 日 견해 지지
  • ● 자기애에 빠져 韓 혐오, 中 배격
  • ● 정상회담 때 한국 아픈 곳 건드리기도
  • ● 메이지(明治) 시대로 되돌리려는 아베
1929년 10월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후유증이 신흥제국 일본으로 옮겨갔다. 위기에 처한 일본은 1931년 만주 침략, 1933년 국제연맹 탈퇴 등 팽창을 통해 상황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던 1936년 2월 26일 새벽, 도쿄에 주둔한 일본 육군 1사단 소속 위관급 장교들이 “간신배를 척살하고, 천황(일왕) 중심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존황토간(尊皇討奸)’을 기치로 14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총리 관저, 국회의사당, 참모본부 등을 습격했다.

반란은 곧 진압됐다. 반란 이튿날 계엄령이 선포됐고, 그다음 날인 2월 28일 쇼와 일왕은 반란군의 원대 복귀를 명령했다. ‘천황’의 명령으로 거사 명분을 잃은 반란군 장교 일부는 자결하고 일부는 투항해 사건은 종결됐으나, 극우국수주의로 방향을 튼 일본은 이후 폭주를 거듭했다. 1937년 7월 중국을 침공하고, 1941년 12월 진주만을 기습했으며,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탄 세례를 받고 무조건 항복했다.

자기집착, 국수주의

조세영 동서대 일본연구센터장 등 일본 전문가들은 현재의 일본이 ‘1930년대 일본’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당시 일본 정부의 정책과 현 아베 신조 정권의 정책엔 공통점이 매우 많다. 당시 일본은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설정하고, 공세적 통화정책을 통한 경기부양을 추구하며, 동남아 진출을 강화하고, 매스컴 장악을 기도했다. 또한 무기 수출에 적극적이며, 추신쿠라(忠臣藏) 등 무사도(武士道)를 찬양하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자기애(narcissism)와 자기집착의 시절이었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그때와 유사하게 일본을 찬미하는 서적이 잇달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있다. 자기애, 국수주의(jingoism)에 빠져 이웃 나라 한국을 혐오하고 중국을 배격한다.

‘부자는 남과 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일본식 표현이 있다. 부자는 싸울수록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일본은 한국과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중국과는 동중국해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로 맞서고 있다. 일본은 부자의 심리 상태를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초대국으로 부상(浮上)한 중국과도 싸울 수 있다는 생각이 일본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청년 세대가 좀 더 공격적이다. 센카쿠 열도 영유권을 놓고 중국과 전쟁이 벌어지면 전자·정보통신(ICT) 기술을 총동원하는 현대전이 될 것이며, 일본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국과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일전을 감수하겠다는 혼네(本音, 속마음)를 드러낸다.

패전 이전 영토 70만㎢

11월 2일, 3년 6개월 만에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조기 해결을 위한 논의를 가속화하기로 합의하는 선에서 끝났다. 일본은 남중국해 문제를 거론하는 등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국의 아픈 곳도 건드렸다.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는 동맹국 미국의 체면을 살려주는 정도로 할 일을 다 했다는 태도를 보였다.

중국은 2008년 12월 일본이 점유한 센카쿠 열도에 해양조사선을 잇달아 파견했다. 아소 다로 당시 총리의 지시를 받은 일본 해양경비대는 경비정을 파견해 중국 해양조사선을 강제 퇴거시켰다. 이 사건을 전후해 중국이 희토류 수출을 금지하자 일본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 최강자로 부상한 중국의 자신감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다.

필자는 그해 7월 스위스 제네바의 한 식당에서 주제네바 일본대표부 정무참사관과 오찬을 함께 했는데, 그는 일본 조야 모두 중국의 부상이 동아시아의 불안정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일본 정치인, 외교관, 군인이 1978년 말 개혁·개방 이후 연평균 9.8%의 고도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 2위의 경제대국, 3위의 군사대국으로 떠오른 중국이 기존 질서의 도전자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100여 년간 계속된 전국시대를 끝낸 일본은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과 중국대륙 침공을 시도했다. 17세기 말에는 명나라의 유장(遺將) 정성공군(鄭成功軍)을 지원해 장강(長江) 하류의 난징까지 진출했다. 1854년 페리 흑선에 의한 개항 이후 일본은 중국을 압도하는 실적을 쌓아갔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타이완과 펑후(澎湖) 열도를 획득하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했다. 불과 10년 후인 1905년에는 뤼순(旅順)과 선양(瀋陽)을 포함한 남만주 일대와 동해에서 러시아를 격파해 조선과 남사할린을 장악했으며 관동주(關東州, 지금의 다롄 일대)를 식민지로 확보했다.

일본은 1910년대 초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됐다. 일본의 급속한 팽창에 놀란 미국은 일본 침공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1914~18)을 이용해 북만주와 내몽골, 산둥성, 푸젠성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러시아혁명기인 1918년에는 동시베리아에도 출병했다.

일본은 1945년까지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당시 일본은 독일, 미국, 소련, 영국과 함께 세계 5대 강국의 일원이었다. 일본 열도와 한반도, 타이완, 관동주, 남사할린, 남양군도(南洋群島) 등을 포함한 영토는 70만㎢ 이상에 달했다. 2차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1950년 6·25전쟁으로 부흥했다. 1970년대 말에는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등장했다.

동아시아 동북부에 위치한 도서국가 일본은 인구 1억2500만 명, 국내총생산(GDP) 4조8000억 달러, 면적 38만㎢, 동서 약 3000㎞, 남북 약 5000㎞의 영토 범위를 가진 강국이다. 일본의 영토 범위는 남아시아의 아대륙(亞大陸) 국가 인도에 필적한다. 일본이 △동아시아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과 △도서국가라는 지정학적 위치가 향후 일본의 진로를 결정하리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초대국 중국에 대항해 일본이 선택 가능한 외교안보 정책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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