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현지 르포

포탄 50만 발 날아든 戰場 中-대만 교류 앞마당으로

관광지로 거듭난 요새 진먼다오(金門島)

  • 진먼다오=모종혁 | 중국 전문 칼럼니스트

포탄 50만 발 날아든 戰場 中-대만 교류 앞마당으로

2/4
푸젠성에 속한 대만 영토

진먼다오는 대만인조차 쉽게 들어가지 못하던 섬이다. 국민당 정권은 대륙에서 공산당에 패배해 대만으로 도망간 뒤 1945년 5월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로부터 무려 38년간 계엄 통치를 유지하며 일당독재로 전횡했다. 아버지 장제스(蔣介石)로부터 대권을 물려받은 장징궈(蔣經國) 전 총통은 더는 폭압적인 방식으로 대만을 이끌어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1987년 7월 계엄령을 해제하고 민주화를 전격 단행했다. 뒤이어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결성한 민주진보당(民進黨)이 합법화했고, 국민당과 민진당의 양당 체제가 확립됐다.

그러나 대만 본토와 달리 진먼다오는 5년 후인 1992년에야 계엄령이 풀렸다. 1982년 이전까지는 군인, 군속 등 군 병력과 섬 주민만 진먼다오에 들어갔다. 민간인은 국방부의 허가를 받은 군인 가족, 주민 친척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1982년 이후에도 진먼다오 여행은 단체관광객으로 제한됐다. 1993년 대만 행정원이 완전 개방을 결정하면서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해졌다.

흥미롭게도 진먼현 정부는 대만 중앙정부 직할의 자치현이다. 행정구역은 푸젠성 취안저우(泉州)에 속해 있다. 즉, 진먼다오는 대만 정부가 통치하지 않는 대륙에 적(籍)을 두고 있다. 대만 헌법은 중국 대륙을 자국 영토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려면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진먼다오를 살펴봐야 한다. 그해 10월 1일 공산혁명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위에서 신중국 건국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2주 뒤 중국군의 화동야전군 10병단 장병들이 샤먼에 집결했다. 목표는 단 하나. 국민당이 도망간 대만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샤먼 앞 진먼다오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했다. 진먼다오에 교두보를 마련해야 대만을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병단 병사들은 샤먼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기에 어느 때보다 사기가 높았다. 국민당 패잔병들이 진먼다오를 지키고 있다고 여겼기에 마음도 가벼웠다. 그러나 현지 상황은 전혀 달랐다. 진먼다오에는 대만 본토에서 건너온 18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18군 사령관 후롄(胡璉)은 중일전쟁에선 용맹을 떨친 명장이다. 비록 국공 내전의 화이하이(淮海)전투에서 대패했지만, 임전무퇴의 자세로 진먼다오에 뼈를 묻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10월 24일 야음을 틈타 10병단 장병들은 수백 척의 목선에 나눠 타고 샤먼을 출발했다. 병사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진먼다오로 향해 갔다. 상륙부대가 구닝터우(古寧頭) 해안가에 이르렀을 무렵 샤먼의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며 지원했다. 중국군은 기세당당하게 배에서 내렸다. 그러나 엄청난 포탄과 기관총 세례가 그들을 맞았다. 그뿐만 아니라 해안가 곳곳에 부설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뢰가 10병단 병사들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중국군의 상륙작전은 3000여 명의 전사자와 7000여 명의 포로만 남긴 채 사흘 만에 막을 내렸다.

세계 최장 포격전

첫 진공에 실패했지만 중국은 진먼다오 점령을 포기하지 않았다. 1950년 9월 미국 국무장관 존 덜레스가 대만을 방문하자 10일간 진먼다오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1953년 6·25전쟁이 끝난 뒤에는 병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해 포병, 해군, 공군으로 체계화한 본격적인 공격 준비를 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마오쩌둥은 진먼다오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마오는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했다.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이 미군 첨단 병기의 쓴맛을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한동안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났던 진먼다오가 다시 지옥의 수렁으로 빠진 것은 1958년 8월 23일이다. 그날 샤먼의 중국군은 459문의 대포를 동원해 진먼다오 전역을 포격했다. 그뿐만 아니라 80여 척의 군함과 200여 대의 전투기를 출동시켜 대만군을 타격했다. 육해공에서 동시에 펼쳐진 공격으로 진먼다오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하루 만에 부사령관 3명을 비롯해 수백 명의 대만군 장병이 전사했다. 수일간 반경 10㎞ 이내의 해협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양국 함정의 해전과 전투기의 공중전도 불꽃을 튀겼다.

대만의 동맹국 미국은 즉각 7함대 전체와 6함대 일부를 대만해협으로 출동시켰다. 항공모함 7척, 순양함 3척, 구축함 40척 등 미 해군의 대규모 선단이 대만으로 집결했다. 일본 주둔 해병대 3800명도 수십 대의 수송기에 나눠 타고 대만에 도착했다. 금방이라도 중국군과 대만·미국 연합군 간의 전면전이 벌어질 기세였다. 그런데 중국군은 진먼다오로 진입하는 대만 군함과 비행기만 공격했다. 미 해군 함정도 섬으로 들어가는 시늉만 했을 뿐 이내 선수(船首)를 돌려 대만 본토로 향했다.

포탄 50만 발 날아든 戰場 中-대만 교류 앞마당으로

1949년 중국군이 상륙작전을 벌이다 대패한 구닝터우 해안가로 가는 길에 세워진 기념문. 모종혁



2/4
진먼다오=모종혁 | 중국 전문 칼럼니스트
목록 닫기

포탄 50만 발 날아든 戰場 中-대만 교류 앞마당으로

댓글 창 닫기

2019/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