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호

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 | 송상현 회고록

“엄정한 재판관, 능란한 외교관, 현실적 국제정치가로 살았다”

  • 입력2018-11-11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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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형사재판소 수장으로 선출됐을 때 하늘이 주신 마지막 기회로 알고 신명을 다해 일했다. 그 과정에서 과로로 건강을 몹시 상하기도 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독재자 개인을 단죄하는 동시에 피해자를 보호하고 구조하는 회복적 정의와 치유적 정의도 아울러 실현한다. 유엔에 필적할 만큼 성장해 인류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보루로서 그 사명을 다할 것으로 확신한다.

    2014년 12월 22일 고려대병원 특실에 입원해 해를 넘기는 통에 매년 받던 세배 손님을 이번에는 거절했다. 늘 오는 분들에게 미리 통보해 헛걸음하지 않도록 조치했다. 세배 손님을 받지 않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의사 소견은 면역 시스템이 바이러스와 싸우는 대신 내 몸과 싸우는 바람에 섭취한 단백질 상당 부분이 오줌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1월 4일로 예정된 몰타 출장을 취소하고 며칠 더 병원에서 요양했다. 비싼 벌금을 문 채 비행 일정을 바꿔 1월 11일 헤이그로 돌아갔다. 임기 말인 터라 1~2월 일정은 단출했다.

    “지나간 길에 표지 남기는 개척자”

    2014년 국제형사재판소를 방문한 서울대 법대 교수들. 왼쪽에서 네 번째가 나다.

    2014년 국제형사재판소를 방문한 서울대 법대 교수들. 왼쪽에서 네 번째가 나다.

    제자들이 ‘내 마음의 영원한 등대’라는 제목의 책을 준비했다. 나중에 ‘잊지 못할 스승 송상현 선생’이라는 부제가 붙어 출간됐다. 2월 말 제자들이 쓴 원고가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널리 중지를 모으지 못한 채 원고청탁서만 띄웠는데도 100여 편의 옥고가 답지했다는 것이다. 감사한 일이다. 나의 귀국을 환영하는 제자들이 나와 관계된 사제 간 일화를 모았다. 김건식, 정상조 학장이 기획한 사업이다. 이러한 출판 계획이 알려지자 나의 영국인 비서실장을 비롯해 국제형사재판소에서 근무할 때 나와 가깝게 지내던 직원들도 기고했다. ‘내 마음의 영원한 등대’에 실린 고마우면서도 나에게는 과분한 제자들의 글 중 몇 대목을 소개한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 | 고백하자면 나의 법과대학 생활은 형편없는 지경이었다. 어릴 때부터 관심을 가지기는커녕 부모님과 학교의 강권으로 진학한 학과에서 배우게 된 법학이라는 학문은 딱딱하고 어렵기 그지없었다. 그때 길을 보여주신 분이 선생님이었다. 그때 내가 선생님을 찾아뵙지 않았다면…. 내 인생의 행운 중 하나가 4학년의 어느 날 송상현 선생님의 연구실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법조계라는 ‘가지 않은 길’을 뒤로하고 새로운 길로 기운차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이재환 변호사 | 올해는 교수님 사정으로 댁에 세배를 가지 못했다. 살짝 걱정도 됐지만 국제적으로 바쁜 일정 탓이라고 추측하며 마음을 달랬다. 한 해의 시작은 항상 교수님 댁에 언제 세배 갈지 약속을 정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세배를 가면 교수님과 사모님께 꾸벅 절 한 번 하고는 진수성찬을 대접받았다. 특히 사모님이 준비해주신 조랭이 떡국과 보쌈김치는 다른 곳에서는 먹어볼 수 없는 진미였다. 이와 같은 염치없는 행사를 그것도 동부인해 30여 년간이나 했으니, 참 사모님에게는 눈치 없고 염치없는 제자들이다. 한때 내가 주장해 낮에 제자들만 세배하고 식사는 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그것도 한두 해 만에 사모님 음식에 중독된 자들이 반대해 원래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교수님이 작은 나무들을 가려주시는 큰 나무의 기둥과 잎이라면 사모님은 그 큰 나무를 지탱하시는 큰 뿌리 같은 분이다. 

    김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 선생님은 지나간 길에 표지를 해두는 개척자다. 학회를 만들어 훌륭하게 키운 후 후학들에게 넘겨주고 당신은 또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 달려 나가신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선생님께 소중한 지혜를 얻곤 한다.



    신중함과 냉정함

    신희택 서울대 교수 | 선생님께서는 우리 나이가 환갑이 넘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계속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주고 계시는 것 같아 경외스럽기도 하다. 선생님께서 환갑이 넘은 연세에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직에 도전하시고 또 그 후 10여 년간 헤이그에서 지내시면서 열정적으로 국제사회에 봉사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항상 숙연하게 우리 자신의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심희기 연세대 교수 | 선생님의 인생을 나 나름대로 한마디로 형상화하면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과 로컬라이제이션(지역화)을 합성한 글로컬라이제이션이라는 단어가 적절할 것 같다. 국제적인 지식, 커리어, 경쟁력이 있으면서도 한국의 독특한 역사, 문화, 풍토를 거의 그대로 간직하시고 실천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필자가 생각해낸 단어가 바로 이것이다. 

    이상중 변호사 | 선생님의 제자 사랑 뒤에는 후덕하고 어여쁘신 소녀 같은 사모님이 계시다는 것을 제자들은 너무 잘 안다. 몇 년 전 자제 분들이 선생님의 칠순 잔치를 마련하고 제자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사모님께서 평소 보이시던 조용한 모습에서 벗어나 멋진 대중연설을 하셨다. 그때 필자의 모임을 제자들 중 가장 열정적으로 선생님을 사랑하는 모임으로 소개하셨지만 제자들이 드린 사랑은 선생님 부부로부터 받은 사랑에 훨씬 못 미친다. 선생님은 늘 등대처럼 내 마음에 빛을 비춰주시는 존재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진성 전 헌법재판소장 | 대학 시절부터 선생님의 훌륭한 인품과 넓은 식견을 좇으려 애를 쓰고 있으나 그 1만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여러 가지로 모자란 후학이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르기란 요원하다. 

    이철우 연세대 교수 | 송상현 교수님은 매우 직설적인 분이지만 과거사를 이야기하는 데에서는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운 것 같다. 이는 가족이 겪은 비극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외람되이 추측해본다. 당신 조부께서 해방정국 최초의 정치적 암살에 희생된 것은 그 가족에게만큼이나 민족에게 비극이었다. 고하의 신중하고 냉정한 태도는 작금의 정치적 공론장을 보면 볼수록 그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송상현 교수님은 그러한 신중함을 다른 방식으로 구현한다. 폴리페서가 창궐하고 진영 논리가 난무하는 시대에 어느 정치 세력과도 유착하지 않고 어느 진영의 관점도 일방적으로 취하지 않는 냉정함으로 그 정신을 구현하신 것이다.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 | 위대한 선각자는 시대를 앞서가기 때문에 그 길을 따르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 그 길을 따르려 하다가는 오히려 낭패를 당하기 일쑤다. 그래도 그런 분이 있기에 우리들의 사표가 될 수 있다. 그런 분이 있기에 우리는 그런 분의 그림자만이라도 밟고 살 수 있게 됐다. 

    권오곤 전 유고전범재판소(ICTY) 재판관 | 언필칭 국제법의 수도라고 하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사제지간인 한국 출신의 재판관 두 명이 활동하는 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눈에도 특별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모님께서는 이런저런 일로 서울에 많이 다니셨고, 그 바람에 선생님께서 헤이그에 홀로 계신 시간이 많았다. 그럴 때 선생님께서 식사를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해 여쭤보면 늘 다음의 네 가지 중에 하나라고 답변하셨다 “해 먹거나, 사 먹거나, 얻어먹거나 또는 안 먹거나!” 외로운 외국 생활이었지만 선생님께서 헤이그에 계셔서 나로서는 얼마나 도움과 위안이 됐는지 모른다. 가끔 선생님과 나는 한식당이나 클럽하우스에서 만나 남들과는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사정을 실컷 얘기하곤 했다. 그리고 헤어질 때마다 선생님께서는 “오늘 조선말을 실컷 했더니 속이 시원하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옳고, 바른 길”

    신각수 전 주일대사 | 로마규정 당사국이 가장 적은 아시아 지역 출신 재판관으로서 재판소장에 당선되신 것은 재판소 전체를 꿰뚫는 업무 능력과 방대한 조직의 재판소를 본래 취지에 맞도록 이끄는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영준 전 헌법재판관 | 삶의 진로를 정할 때, 유학 갈 때, 전공 분야를 정할 때 항상 교수님을 찾았고, 교수님은 늘 옳은 방향으로 인도해주셨다. 교수님이 가실 곳을 향해 가면 늘 옳은 방향이었고, 교수님이 생각하실 쪽으로 판단하면 늘 바른 길이었다. 

    김건식 서울대 교수 | 선생님은 서울법대의 쟁쟁한 은사들 중에서도 유난히 제자가 많은 분이다. 선생님은 단순히 학자로서 삶을 마치기에는 지도자적 품성을 너무도 풍성하게 타고난 분이다. 거꾸로 정치적인 리더로 성공하기에는 학자적 성향이 너무 강한 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직은 선생님께 딱 들어맞는 자리였다고 생각한다. 간혹 선생님의 근황을 묻는 분들에게 나는 다소 건방진 표현이지만 “물고기가 물을 만났다”고 답하곤 했다, 당초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던 국제형사재판소가 오늘의 위상을 누리게 된 것은 선생님의 뛰어난 역량과 헌신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감사 표시

    국제형사재판소에서의 12년은 보람이 가득하면서도 행복했다.

    국제형사재판소에서의 12년은 보람이 가득하면서도 행복했다.

    3월 3일 소장실 직원들이 비밀리에 준비해온 나에 대한 송별 만찬이 있었다. 평소에 늘 웃음으로 부드럽게 대하고 칭찬과 격려를 아낌없이 해주면서 그들의 사기를 높여줬다. 이것이 나의 통솔 방법이요 리더십의 내용이다. 배경이 천차만별인 직원들이 말을 잘 듣도록 만드는 힘은 칭찬과 감사의 말 외에 더 좋은 것은 없다. 

    이제 떠난다고 하니 모두들 서운한 기분으로 모처럼 고급 식당에서 송별 만찬을 베풀어주었다. 우리 부부를 빼면 15인이 참석했다. 소장실 직원 전원이 참석한 것이다. 이날은 비가 오지 않아 헤이그 시내의 야경 불빛이 현란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비서실장 린 파커가 대표로 일어나 송별사를 했다. 영국 대사 출신인 그는 내가 비범하면서도 난국을 조용히 헤쳐나가는 리더십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나도 간단하게 답사한 후 우리 팀의 수고에 대해 한껏 감사하고 칭찬해주었다. 놀랍게도 나 몰래 여러 가지 선물을 준비해 전해주는 게 아닌가! 그들 모두가 나와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글을 쓴 커다란 카드 한 장도 곁들였다. 선물은 장식품 내지는 과일을 담아 탁자에 놓을 수 있는 커다란 철제 쟁반이었다. 쟁반에 암스테르담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참으로 아이디어가 기가 막히다. 네덜란드는 이 선물 한 가지만으로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겠다. 

    이어서 대외관계담당팀(External Relations team)이 마련한 특별한 선물도 받았다. 그들은 각국 신문에 게재된 나와 관련된 기사와 사진을 선별적으로 골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내가 정말 받고 싶은 선물이었는데, 그들이 어찌 알았는지 책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내 임기 마지막 날 재임 중 한 모든 연설이 담긴 USB를 추가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니 세상에 이렇게 고맙고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또 있을까. 참으로 감격의 순간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잊게 마련이지만 나의 12년 봉사에 대한 그들의 감사 표시는 참으로 잊을 수 없다.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낸 후 기쁜 마음으로 귀가했다.

    네덜란드 ‘기사대십자훈장’

    3월 5일 소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의 연설을 듣기 위한 전체 재판관 회의가 열렸다. 4명의 소장 후보와 2명의 부소장 후보가 공약 문서를 지난주 금요일 내게 제출했다. 나는 즉각 이를 재판관 전원에게 송부해 읽어보게 했다. 원래 국제형사재판소 소장단 선거는 로마 교황을 선출하듯 재판관 전원이 참석한 회의에서 자기 견해를 간단히 표명하고 투표했는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과열됐다. 공약 문서를 돌리고 캠페인을 하는 방식의 정치적 선거로 변질됐다. 

    3월 10일, 소장으로 일하는 마지막 날이다. 여러 사람이 작은 선물을 가지고 잠깐씩 나를 찾아보거나 e메일로 인사를 보내왔다. 오전 내내 이에 대한 답을 하느라 바빴다. 오후에는 법복을 입고 6인의 신임 재판관 선서식을 집전했다. 마지막 공식 업무다. 

    선서식에 이어 재판소가 주최하는 소장 및 재판관의 송별 겸 새 재판관의 취임을 축하하는 리셉션이 구내식당에서 열렸다. 나는 잔뜩 쉰 목소리로나마 마지막 송별사를 했다. 상당수 직원이 눈물을 보였다. 

    저녁에는 베트 코엔데르스(Bert Koenders) 네덜란드 외무장관이 주최한 송별 만찬에 참석했다. 1564년 건설된 풍차를 개조한 식당에서 만찬을 열었다. 식탁에 좌정하자마자 생전 처음 본 장관이 일어나 네덜란드 빌럼 알렉산더르(Willem-Alexander) 국왕이 나에게 최고훈장인 기사대십자훈장(Ridder Groot Kruis)을 서훈하는 것을 자기가 대신 전달한다고 했다. 이 훈장은 한국의 최고훈장인 무궁화대훈장에 해당한다. 이것은 정말 기대 밖의 놀라움 그 자체였다. 서훈은 생각조차 못한 바여서 준비 없이 감사의 말을 하면서 훈장을 귀국 후에도 영구히 잘 보관하겠다고 하자, 외무장관은 내게 네덜란드에 영주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직접화법으로 건넸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귀국을 결심했으므로 우물쭈물 그 자리를 모면했다. 

    3월 21일, 귀국 날이다. 날씨도 화창하다. 큰 여행가방 4개를 포장하고 휴대가방까지 6개의 짐을 2대의 차에 나눠 싣고 저녁 7시 15분경 공항을 향해 떠났다. 네덜란드 왕이 전용으로 쓰는 귀빈실을 특별히 내주었다. 이튿날 오후 3시 40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기철 전 대사가 출영해줬다. 

    공항에 나오지 못한다고 했던 부산에 사는 딸 내외와 외손자 민행이가 귀빈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뜻밖의 기쁨이었다. 외교부에서 내준 의전차량으로 오후 5시경 집에 도착하니 더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었다. 딸의 가족들이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을 현관에서 응접실 계단에 이르기까지 붙이고 ‘환영해요(welcome)’ ‘사랑해요(I love you)’ 등의 문자가 적힌 포스터와 현수막을 집 안 여기저기에 붙여놓고 나를 환영해주었다. 식구래야 장가 안 간 아들과 딸 내외 및 외손자뿐이지만 감동 그 자체다. 딸네는 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김포공항으로 가서 부산으로 귀가했고 우리는 귀국의 첫 밤을 기분 좋게 지냈다.

    인류 평화 위한 보루

    2003년 이른 봄 서울대 법대 교수로서의 정년을 수년 앞두고 나는 갑작스러운 기회에 세계 최초로 신설되는 국제형사재판소의 첫 재판관으로 당선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2년간 봉사하는 행운을 누렸다. 70여 년 동안 세계평화를 유지해온 유엔과는 별도로 출발한 새로운 국제형사정의 시스템에 참여해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형사재판소의 창설이라는 인류의 염원을 달성하는 데 미력이나마 기여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엔이 국제사법재판소와 안전보장이사회의 집단 안전보장 체제를 가지고 세계 평화 유지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에도 이와 별도로 인류 평화를 위협하는 범죄로 무고한 양민을 대량 학살한 원흉이나 독재자를 직접 처벌해 피해자의 한을 풀어줄 방법이 없어서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간극을 메우는 새로운 메커니즘으로 탄생한 국제형사재판소는 전쟁, 침략, 집단학살 및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독재자 개인을 단죄해 응보적 정의를 구현하는 동시에 그 피해자들을 보호하고 구조하는 회복적 정의와 치유적 정의도 아울러 실현하고 있으므로 세월이 갈수록 유엔에 필적할 만큼 성장해 인류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보루로서 그 사명을 다할 것으로 확신한다. 

    나이 70세가 거의 다 되어 그 기관의 수장으로 선출됐을 때 나는 이를 하늘이 내게 주신 마지막 봉사의 기회로 여기고 물불을 가리지 아니한 채 참으로 신명을 다해 조직의 기틀을 잡아갔다. 우선 이 중요한 신생 기관을 어떠한 방향으로 끌고 나갈지와 관련한 궁극 목표와 장기 계획을 수립했고 재판 업무의 공정과 능률, 예산과 인사 및 조직 등 사법 행정사무의 투명한 관리와 운영, 회원국, 비정부기구(NGO) 및 기타 복잡다기한 이해관계자들과의 갈등 해소와 조정 등 실로 엄청난 업무량에 압도됐다. 세계 각국을 공식 방문하는 살인적 일정도 소화해냈다. 소장으로서 엄정한 재판관이어야 하고 능란한 외교관이어야 하며 현실적인 국제정치가가 돼야 하는 복잡하고 힘든 과업을 6년간 열심히 수행했다. 과로로 건강을 몹시 상하기도 했다.

    하루도 편하게 지낸 순간 없어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에서 퇴임하는 날 찍은 사진이다.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에서 퇴임하는 날 찍은 사진이다.

    퇴임할 무렵 주재국인 네덜란드 외교부 장관은 시민권을 줄 테니 귀화해 자기네 정부의 상임 외교고문으로 일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나는 이를 요령껏 거절하고 바로 귀국해 새로운 삶을 즐기고 있다. 문득 지난달 회고록에 인용한 동아일보 김정훈 사회부장(현 편집국장)의 2014년 10월 24일자 칼럼 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 타국 사람의 국제 경험을 자기네 국익을 위해 활용하려는 네덜란드 정부의 접근 방법과 우리 정부의 태도가 퍽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귀국 후에는 25년간 관여해오던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으로서 교육, 영양, 공중보건, 질병, 보호 및 권리 등의 면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전 세계 어린이를 돕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개인적으로 6·25전쟁 때 굶주린 배를 채워주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학용품과 구호품을 지원해준 유니세프의 은혜를 먹고살 만하게 된 오늘날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봉직하는 동안 단 하루도 마음 놓고 편하게 지낸 순간이 없지만 몇몇 순간이 떠오른다. 초창기에는 새 기관의 골격을 세우는 내부 규정을 제정하는 데 부지런히 참여하고 특히 전자법정의 도입 책임을 맡아 이를 설치하는 어려운 임무를 완수했다. 내부적으로 한 지붕 밑에 있는 재판부와 검찰부 및 이 두 조직을 지원하는 행정처 간의 관계, 역할 및 책임이 조약상 불분명해 여러 비능률과 잡음이 있었다. 나는 기관 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지배구조 원칙을 선언해 대외적으로 재판소를 대표하는 얼굴은 소장임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내부 통솔의 원칙을 정립했다. 

    또한 국제형사재판소 신(新)청사 건립을 계획해 회원국들과 긴밀하게 상의하면서 국제적 경쟁 입찰 절차를 통한 설계와 시공을 거쳐 건물을 완공했다. 헤이그에서 가장 좋은 해변에 첨단기술로 건설한 아름답고 쾌적한 청사는 헤이그의 이름난 건축물인 평화궁을 압도하는 명물이 될 것으로 자부한다.

    회복적·치유적 정의

    아시아는 면적이 가장 넓고 인구가 많은 대륙이지만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한 로마조약을 비준한 회원국 수가 가장 적어 아시아 각국을 방문해 가입을 설득하는 등 줄기차게 노력했다. 그 결과 14개국을 회원국으로 포섭했고 아시아 4개국이 추가로 비준했다. 잠시 동유럽보다 회원국 수가 적어 아시아 지역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수도 3인에서 2인으로 줄어든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아시아 지역에서 3인의 재판관을 선출하게 돼 한국, 일본 및 필리핀이 재판관을 배출했다. 

    나는 소장으로서는 유일하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프리카의 분쟁 지역을 두 차례 방문해 국제형사재판소 지역사무소 직원을 격려하고 피해자 마을 여러 곳을 방문해 그들을 위로했다. 사지를 잃은 전쟁 피해자를 위한 의수족 제작소를 세우고 그들에게 이를 장착해 자활하도록 했다. 또한 피해자에게 의료봉사와 직업훈련을 제공했으며 소년병 출신 청소년에게 교육을 받게 하고 ‘미소금융’을 해줌으로써 생업의 기초를 마련해줬다. 강간 피해자의 트라우마 극복을 돕고자 심리 상담과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7년마다 로마조약의 성과를 돌아보고 개선점을 밝혀내는 제1회 리뷰콘퍼런스를 우간다 캄팔라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해 많은 성과를 거뒀다.

    인류의 공통된 소망

    2017년 유니세프 서울사무소 개소식.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나다.

    2017년 유니세프 서울사무소 개소식.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나다.

    국제형사재판소의 기초를 다지고자 유엔, 유럽연합(EU), 미주기구(OAS), 아프리카연합(AU), 영국연방(The Commonwealth) 프랑코포니(La Francophonie·프랑스어를 모국어나 행정 언어로 쓰는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기구), AALCO(아시아·아프리카 법률자문기구) 등과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수많은 NGO는 물론 각 회원국과 주재국인 네덜란드와의 유대를 강화해 전 세계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각 정부와 민간기관 및 그 대표들과 가진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 및 교섭을 통해 그들에게서 배우고 그들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나의 자산이요 행운이다. 그리고 일본, 독일 및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재판관이 돌아가셔서 이분들의 장례를 주관했고,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을 주창하신 아서 로빈손 트리니다드토바고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등 슬픈 시기도 있었다. 

    2015년 나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마련된 문집 증정식.

    2015년 나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마련된 문집 증정식.

    나의 분수에 넘는 전(全)인류적 사명을 수행하는 데 도와주신 분이 많다. 우선 재판관 후보 지명과 선거 후원에서 도와주신 박수길 전 유엔대사와 한승주 전 외무장관이 계시다. 재판관으로 당선돼 대과(大過) 없이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할 때까지 도와주신 외교부와 법무부 그리고 대법원 당국에 감사 말씀을 드린다. 또한 12년간 헤이그를 거쳐 가신 한국대사와 공관원들의 빈틈없는 이해와 협조는 나의 임무 수행에 중요한 기초와 자양분이 됐다. 

    12년간 헤이그에서 중요한 국제기구 책임자로서 일하던 시절의 작은 일부분을 회고록 형식으로 공개한 이유는 국제사회 진출이 화려하고 대접받고 돈과 명예를 쟁취할 수 있는 기회라는 허황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또한 내 나라에서 내 마음대로 편히 살 가능성을 마다하고 국제사회로 진출하는 것은 나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히면서 인류의 공통된 소망인 정의, 평화, 인권, 법의 지배, 민주주의, 개발협력, 기후변화 등의 실현에 기여하고자 국제사회에 봉사하는 힘든 길을 택하는 뜻임을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축적된 경험, 지식, 인맥 등 무형의 자산이 내 나라의 발전과 국격 향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송상현
    ● 1941년 출생
    ● 경기고, 서울대 법대 졸업
    ● 고등고시 행정과(14회)· 사법과(16회) 합격
    ● 미국 코넬대 법학박사
    ● 서울대 법대 교수
    ● 서울대 법대 학장
    ●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 現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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