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동네 뒷산에 오르는 것 같은 편안함. 한택식물원의 첫인상이 그랬다. 하지만 비봉산 자락 전망대에 올라 식물원 전체를 조망하니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마다 거기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한 남자의 집념이 한국 식물원의 역사를 썼다.
가을 문턱에 선 10월 초, 용인 한택식물원 모란작약원 앞에 서니 문득 이 노랫말이 떠올랐다. 지난봄 화려한 자태를 뽐내던 모란과 작약은 사라졌지만 저 땅 밑에선 복수초가 또 내년 봄을 기약하고 있을 것이다. 복수초는 이른 봄 얼음을 뚫고 피어나 얼음새꽃이라고도 한다.
“한택식물원은 1995년 중국 베이징식물원과 상호교류협약을 맺고 모란 350품종, 작약 80품종을 기증받아 이 정원(모란작약원)을 조성했습니다. 작약 사이사이에 복수초, 산개불주머니를 심고 곳곳에 피나무와 팥배나무를 심었어요. 이른 봄 복수초가 필 때에는 나뭇가지에 잎이 하나도 없어 햇살을 받기 좋고, 반그늘을 좋아하는 작약이 피는 5월 무렵이면 나뭇잎이 무성해져서 그늘을 만들어줍니다. 복수초에 이어 노란 산개불주머니가 나오고 그다음 모란과 작약이 경쟁하듯 꽃을 피우고 어느새 나무 그늘이 깊어질 때면 복수초는 휴면에 들어갑니다. 이처럼 한택식물원의 정원은 생태계의 순환에 맞춰 조성됐습니다.”
왜승마
참취
상록인동
과남풀
용왕꽃
소 키우다 식물에 미쳐
생태원 산책길
산딸나무
이택주 한택식물원장. 역대 대통령 대부분이 한택식물원을 한 번씩은 방문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민정수석과 대통령비서실장 시절 네 차례나 다녀갔다. 이 원장은 반디지치(지치과 여러해살이풀)에 대해 진지하게 묻던 문 대통령의 모습을 기억했다.
결심한다고 식물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식재할 식물이었다. 우리나라 식물원이라면 당연히 우리 식물이 있어야 하는데 자생식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키우는 사람도 없었다. 그때부터 이 원장은 직접 전국을 돌며 야생화를 채집했다. 설악산 만주바람꽃, 울릉도 두메부추, 한라산 고산술패랭이, 주왕산 둥근잎 꿩의비름. 이 땅의 자생식물이 하나둘 비봉산 자락으로 옮겨졌다. 현재 한택식물원이 보유한 식물 9700여 종 가운데 자생식물만 2400여 종에 달한다. 또 ‘천리포수목원은 목련, 한택식물원은 산딸’이라 할 만큼 한택의 대표종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산딸나무는 약 250품종을 보유하고 있어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다. 6~7월에 흰꽃이 피고 딸기 모양의 빨간 열매가 달려 산딸나무라 불리는 이 나무는 자생식물인 데다 관상 가치도 커서 최근 도심 공원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좀개미취
멸종위기 식물 너의 이름은…
가시연꽃
가시오갈피
각시수련
개병풍
매화마름
삼백초
섬시호
나도승마
노랑만병초
단양쑥부쟁이
대청부채
독미나리
백부자
산작약
이 원장이 비봉산 자락에 첫 삽을 꽂은 지 내년이면 40년이다. “야생화가 뭐냐”고 하더니 이제는 꽃이름을 줄줄 읊고 사진 찍어 올리는 자칭타칭 야생화 전문가들이 넘쳐난다. 격세지감이다. 하지만 이 원장이 보기엔 아직도 멀었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식물을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일 거요.” 뜬금없이 내뱉은 이 말엔 뼈가 있다. 1990년대 초 한창 전국을 다니며 채집하다 보니 ‘북한도 우리나라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직접 북한으로 가서 채집할 수 없다면 우회하는 방법을 찾았다. 중국이었다. 삼고초려 끝에 베이징식물원 원장을 만나 컴퓨터를 기증하고 상호교류협약을 맺은 뒤로는 비교적 쉽게 북한 접경지역의 식물들을 채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렵사리 국내에 반입한 그 식물들은 다 죽고 말았다. 고산식물이라 생태적으로 맞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러기에 이 원장은 “야생화 이름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 그걸 어떻게 키우는지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식물원은 단순히 예쁜 꽃의 전시장이 아니라 생태교육의 현장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곳에선 9월 29일부터 10월 28일까지 들국화·단풍 페스티벌이 열린다. 지난여름 무더위에 시달려 일찍 잎을 떨군 나무가 많지만 그래도 계절의 순환에 따라 숲은 어김없이 물들기 시작했다. 단풍과 국화마저 떨어지면 숲은 침묵에 들어간다. 눈이 오면 드문드문 찾아오던 관람객의 발길마저 끊긴다. 하지만 식물원의 겨울은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암석원 연못.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낙우송은 방송에 자주 소개돼 유명해졌다.
숲에는 벌써 첫서리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