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핵국가 지위’ 획득…제2의 체제경쟁 시작
현재 협상은 ‘북한 비핵화’ 아닌 ‘對美 위협’ 제거
남북경협 빌미로 친중세력 재부상할 수도
“신뢰 문제 일으킬 것”
문재인 대통령은 폭스뉴스와의 대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핵을 버리는 대신 경제 발전을 추진하겠다는 전략적 마인드를 가진 인물로 평가했으며 북한의 비핵화 의지는 미국이 주장해온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는 북한의 본래 주장과도 거리가 있는 언급으로서 향후 미국과 국제사회에서 심각한 신뢰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 북·미 중재는 현재의 불안한 평화를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을 것이다.북한은 4월 20일 열린 노동당 중앙위 7기 3차 전원회의 결정서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의 승리 △핵·미사일 개발 완성에 따른 핵·미사일 실험의 모라토리엄 선언 △책임 있는 핵국가 입장에서 핵 군축 차원의 비핵화 협상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결정서는 30년 동안 진행한 핵무기 보유국가 전략을 총결산 및 총화한 역사적 문서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체제가 핵을 버리고 경제 발전 노선을 추구하며 비핵화에 대한 CVID에 동의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노동당 중앙위 결정서와도 다른 내용일 뿐만 아니라 4·27 판문점선언, 6·12 북·미 정상회담 합의문, 9월 평양 공동선언의 어디에도 없는 내용이다. 북한은 지금껏 한반도의 비핵화에 대한 추상적 선언만 해왔을 뿐이다.
“핵무기 없는 조선반도를 만들고 싶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도 한반도 비핵화론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는 ‘북한의 비핵화’와는 다른 ‘한반도 비핵화’에 기초한 것으로 노동당 중앙위 결정서의 “책임 있는 핵국가 입장에서 핵 군축 차원의 비핵화 협상을 하겠다는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이 밝힌 북한의 입장은 평양이 내놓은 본래의 주장과도 거리가 있고 나아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과장해 홍보한 것이다. 폭스뉴스의 안보 평론가 고든 창은 “문재인 대통령의 참모들 일부는 친북적이고 북한이 한국을 흡수·통합하는 것을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 바 있다. 북한의 비핵화 입장과 관련해 사실에 정확히 기초하지 않은 내용을 한국이 과장해 홍보하는 것은 한미 간 신뢰 문제를 일으키고 친북 논란을 증폭시킬 것이다.
“투 트랙으로 대응해야”
북·미 협상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판단과 결합돼 겉으로 보기에 긍정적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 협상에서 북핵의 동결과 비확산, 미국에 위협이 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그것에 탑재될 핵무기 제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북한도 이에 대해서는 전향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태도다. 나아가 북한이 친미비중(親美非中) 국가인 베트남처럼 국가 전략의 대전환을 추진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는 것도 미국에 중요한 유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은 완전한 비핵화와 중장거리 미사일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미국은 국익 우선주의에 따라 북한과 대화하며 북한 또한 자신들의 전략에 따라 협상한다.
한국 또한 우리의 국익에 부합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투 트랙 대북 전략이 요구된다. 북한의 비핵화를 두 단계로 나눠 추진하는 전략을 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핵을 가진 북한에 대한 종합적 대응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1단계는 동결과 비확산 및 대미 위협인 ICBM과 그와 결합된 핵무기의 제거, 즉 현재 진행되는 북·미 협상의 내용과 관련해 평양의 비핵화 태도에 대한 과장 홍보가 아닌 사실에 기초한 객관적 협상 지원과 중재를 하면서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2단계인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개혁·개방과 시장경제 확산에 기초한 북한 체제의 선진화(Regime Evolution)를 통해 실현하는 것으로, 이 역시 한미 간 전략적 인식의 공유에 기초해 공동으로 추진해야 한다.
요컨대 핵을 가진 북한을 상당 기간 상대해야 하는 현실을 냉철히 인식하고 이에 대한 종합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때까지 독일과 같은 수준으로 미국과의 핵 공유제를 추진하는 것, 역전된 남북 간 안보 역학 관계를 보완할 자강적 안보 전략 실행 및 새로운 한미동맹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
9월 평양선언까지 드러난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에서 정권 초기 우려된 친중 문제는 잠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친중 문제는 보수인 박근혜 정부와 진보인 문재인 정부에서 공통적으로 우려가 제기된 사안이다. 그 배경은 북핵 및 북한 문제 해결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인식,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중국이 G2로 떠올랐으며, 세계 패권 구도에서 미국을 추월할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과 연관된다. 이러한 인식은 역사적·이념적·정서적 차원에서의 반미친중(反美親中)과도 관련이 있다.
잠복한 친중세력 재부상 가능성
박근혜 정부는 2016년 1월 4차 핵실험 이전까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에 대한 전략적 모호성 정책을 취했으며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 전승절 기념행사 때 톈안먼 광장 망루에 오르는 등 친중 행보를 보였다. 4차 핵실험 후 사드 배치를 결정하면서 박근혜 정부 친중정책은 좌초한다. 문재인 정부는 초기 노영민 주중대사의 친중사대적 ‘만절필동(萬折必東)’ 발언, 이해찬 중국특사의 조공외교 논란 등을 통해 우려감이 컸으나 현재 친중 문제는 잠복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친중정책이 표출되지 않는 핵심 배경은 트럼프 행정부가 진행하는 대(對)중국 무역전쟁과 패권경쟁 과정에서 중국에 대한 공격이 심화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 경제의 문제점과 세계 질서에서 중국이 가진 힘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한국 사회의 친중 문제가 약화 혹은 잠복한 것으로 분석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국가주의 자본 통제와 공정한 자유주의 무역 질서와 관련해 중국 손보기에 나선 상태다. 미국의 중국에 대한 포위 및 고립 작전이 본격화하고 있다.
한 가지 변수는 문재인 정부의 남북경협 추진이다. 문재인 정부가 대북제재와 관련해 한미동맹의 균열을 감수하고 남북경협을 추진하면서 한중 협력을 추구할 경우 문재인 정부의 친중세력과 친중정책이 다시 수면으로 부상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통일보다 평화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는 취지로 말하면서 “평화가 먼저 이뤄지면 남북 간 자유로운 왕래와 경제협력으로 이어질 것이며 통일도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 평화의 선결 조건이 비핵화다”라고 밝혔다. 이 같은 발언은 진보 진영 다수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전례 없는 자신감 바탕으로 평화 무드 조성한 평양
한반도의 전쟁 위험은 상당 부분 해소된 것으로 평가된다. 2017년 9월 6차 핵실험 전후로 북·미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전쟁 발발 가능성은 15% 내외였다. 그러나 현재는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6·12 북·미 정상회담, 6·19 북·중 정상회담 등을 통해 전쟁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든 상태다.북·미 관계가 다시 악화돼 최대 수준의 제재 또는 대북 선제타격을 고려할 경우에도 한반도 정세의 조건은 그 실행이 훨씬 힘들고 리스크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
9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대북제재 완화를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전쟁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한국은 지난해까지 대북제재에 협조하는 동시에 북한 폭격론 등에 방관자적 입장을 취했다면, 수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거친 현재는 추가 제재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고, 북폭론의 경우에도 적극적 반대의 입장에 설 것이다. 이 같은 한반도 정세의 변화는 북폭의 가능성을 거의 소멸시키면서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는 상황이다.
현재 한반도 평화의 본질은 ‘북한이 주도하는 불안한 평화’라는 근본적 문제점과 한계를 안고 있다. 지난해 가을의 6차 핵실험과 ICBM 발사 성공은 ‘게임 체인저’였다. 이후 북한이 동북아 정세의 대변동을 주도하고 있다. 올해 신년사에서 남북 관계의 전향적 개선을 선언한 후 평창올림픽 참가, 남북 정상회담 등을 이끌어냈다. 4월 20일 노동당 중앙위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의 승리를 선언한 후 북한은 연쇄 정상회담을 통해 실질적인 핵국가, 전략국가의 지위를 확보해나가고 있다. 평양은 남북 관계에서도 전례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평화 무드를 조성한다.
김정은이 올해 신년사에서 대단히 이례적으로 ‘통일’을 12번이나 언급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2016년 36년 만에 개최한 노동당 당대회의 내용과 올해 신년사의 내용은 김정일 체제와 김정은 체제의 차이를 보여준다. 김정일 체제가 체제 수호 중심의 핵국가 전략인 ‘파키스탄 모델’을 추구했다면, 김정은 체제는 핵 보유를 기반으로 한 친미비중(親美非中)의 ‘신(新)베트남모델’을 추구하며 나아가 북한 주도 한반도 통일을 추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30년 간고분투(艱苦奮鬪) 끝에 획득한 ‘핵국가 지위’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와 한중 수교 이후 체제 경쟁은 한국의 승리로 끝난 것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북한이 30년 동안 간고분투(艱苦奮鬪)하면서 획득한 핵국가 지위가 한반도 정세를 근본적으로 변동시키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한국이 많이 앞서 있지만 안보적 역학 관계에서는 북한 우위로 역전된 것이다. 한반도 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화했으며 판이 바뀌었음을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북한은 36년 만에 열린 2016년 당대회와 4월 중앙위 전원회의 등에서 사상강국, 정치강국, 군사강국을 실현했기에 경제강국을 성취해 사회주의 강국의 목표를 완성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올해 신년사에서는 한반도 통일을 주도하겠다는 의지까지 표명했다.
김정일 체제와 다른 김정은 체제가 핵국가 지위를 지렛대로 한반도 통일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표출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반도 정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불안한 평화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핵국가 북한이 주도하는, 북한의 의지에 의존한 평화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통일 역시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통일인지 사회주의에 기초한 통일인지 본격적 경쟁 국면에 진입했다.
문재인 정부와 한국의 다수 진보 진영 전문가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견해는 주관적 바람(Wishful Thinking)일 뿐이다. 보수 일부의 북폭론도 마찬가지로 주관적 바람이다. 무엇보다도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는 북한 노동당의 전략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한반도 정세의 본질은 제2의 남북 간 체제 경쟁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고 헌법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세력은 한반도 정세의 위중함을 인식하고 건국, 산업화, 민주화 과정에서 장점을 증명해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구해우
● 1964년 전남 화순 출생
● 고려대 법대 졸업, 고려대 대학원 법학박사
● 민화협 청년위원장
● SK텔레콤 북한담당 상무
●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
● 중앙대 북한개발협력학과 겸임교수
●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 국정원 북한담당기획관(1급)
● 現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 저서 : ‘김정은 체제와 북한의 개혁개방’ ‘통일선진국의 전략을 묻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