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전날까지 정신없이 온갖 일을 처리하고도 급한 불을 다 껐는지, 빠뜨린 일은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나는 모든 일을 서울에 남겨놓고, 여행 가서는 절대 병원 생각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마트폰에 은행용 공인인증서를 깔고 각종 업무 관련 자료를 담은 USB와 OTP 생성기를 챙기긴 했지만, 선물 같은 휴가를 맞이하는 내 모습은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느껴졌다.
최근에 읽은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떠올랐다. 스위스 베른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책의 저자 프라두를 찾고자 충동적으로 리스본으로 떠난다. 익숙하고 안정된 세계를 떠나 어느 날 갑자기 낯선 곳으로 향한 그는, 타인의 발자취와 행방을 좇으면서 이를 통해 자아를 찾아간다.
나를 내려놓기 위한 여행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바꿔놓는 여행의 첫 단추가 된 곳이 바로 베른의 키르헨펠트 다리였다. 그는 아침 출근길에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떨어지려 한 낯선 여인을 구하게 되고, 그 여인의 언어(포르투게스)에 호기심을 느끼던 중에 우연히 서점에 가서 프라두의 책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키르헨펠트 다리에 간다고 해서 뭔가 삶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여행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선물이 될 테니까. 낯선 곳에서 나는 분명히 조금 달라질 것이고, 돌아온 후의 일상 역시 결코 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그레고리우스의 여행이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면, 나의 이번 스위스 여행은 ‘나 자신을 내려놓기 위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족은 스위스에서 서울에서보다 더 많이 자고 더 잘 먹고 푹 쉬는 생활을 이어갔다. 20년 전 대학생 때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가 떠올랐다. 숙소의 공짜 조식을 건너뛴 채 늦잠 자기 일쑤였고, 함께한 친구들이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준비해 교외를 여행할 때도 나는 혼자 남아 숙소 주변을 배회하다가 카페에서 쉬고 근처 미술관을 다녀오곤 했더랬다. 일상에서 바둥거리며 바쁘게 지내는데 여행지에서까지 그래야 하나, 자고로 여행은 쉬엄쉬엄 다니면서 힐링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게 그때부터 나의 여행 신조였던 것 같다.
이번 스위스 여행에서도 하루에 한 군데만 다니면서 체력을 아꼈고, 여행 중간 중간에는 아이들과 함께 트로티바이크(서서 타는 자전거)나 터보건(산악 썰매) 등의 액티비티를 즐겼다. 읽을 책도 다섯 권 챙겨가 그중 세 권을 완독하고 돌아왔다. 가져간 책 중에서는 헝가리 출신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책 ‘문맹’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헝가리혁명 여파로 고국을 탈출하게 된 작가는 이후 스위스에 정착해 새로운 언어인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자전적 이야기인 ‘문맹’을 썼다. 그 책을 읽으며 신의 편애를 받아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누리고 있는 스위스가 4개의 공용어를 사용하는 다언어 국가이고, 다양한 문화가 혼재된 연방국가임을 체감할 수 있었다. 스위스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복잡함과 혼란스러움을, 이방인인 나는 스위스 대자연의 정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리클라이너 소파에 앉아 편안히 책으로 이해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값진 여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기간 내내 날씨가 매우 좋아서 이 역시 귀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융프라우와 피르스트 정상, 그리고 티틀리스산에도 올랐으니 충분히 복을 받았다. 나의 어이없는 실수가 따뜻한 기억으로 바뀐 경험도 했다. 멋진 풍경의 야외 수영장에 반해 스위스 시골 마을 아델보덴의 한 호텔을 예약했는데, 정작 수영복을 챙겨가지 않은 것이다. 오직 수영장 때문에 그곳에서 1박 2일 머물 일정을 잡았던 터라 난감했다. 다행히 호텔에서 수영복을 빌려준 덕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 다양한 사이즈와 디자인의 수영복을 건네주며 골라 입으라고 한 호텔 측의 호의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생각해보면 먼저 그 호텔에 묵었던 여행객들이 두고 간 수영복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 가족에게는 여행 기간의 화창한 날씨와 호사스러운 여유만큼이나 값진, 낯선 곳에서 받은 뜻밖의 선물이었다.
울트라 초특급 일상 복귀
그렇게 여유 있던 나날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 어느새 몸은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 실려 있었다.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딱히 없었는데 어느 순간 비행기를 타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실려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 안에서 정신없이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어느새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내일부터는 다시 출근하는 일상을 시작해야 하는구나, 그래도 오늘 당장 출근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하고 생각하는데, 옆에서 큰아이가 초초해하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오늘 학원 수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행 때문에 며칠 빠진 수업을 보충하려면 가능한 한 빨리 학원에 가는 게 좋겠다는 아이의 뜻을 존중(?)해 그때부터 온 가족이 분주해졌다. 오후 2시 52분 비행기가 착륙했는데 아이가 5시 5분 학원에 도착했으니, 정말 ‘울트라 초특급 스피드’를 발휘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평화롭던 스위스에서 갑자기 현실에 돌아왔다는 생각에 두통이 밀려왔지만, 일상에 최대한 빨리 적응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아이의 모습이 내게 힘을 주기도 했다. 남편 또한 옆에서 “그래도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한 마디 거든다. 그렇게 다시 현실의 삶으로 돌아온 지 이제 6일이 됐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불과 일주일 전까지 스위스에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서울 사람’이 된 상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아마도 한동안은 스위스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려보곤 하겠지만, 이제는 잠깐 내려놓았던 삶을 다시 살아야 할 때다. 그레고리우스가 마지막에 다시 베른으로 돌아온 것처럼. 언제 떠나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일상을 위해, 또 언제든 다시 떠날 수 있게 만들어줄 일상을 위해. 그렇게 보험과도 같은 일상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나의 자그마한 진료실을 지킨다.
문경원
● 1977년 출생
● 이화여대 의대 졸업(피부과 전문의)
● 한국존슨앤존슨 자문의
● 선릉 예인피부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