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는 미국 팰로앨토의 한 사립 추모공원에 묻혔다. 그의 양부모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유가족이 잡스의 묘 위치를 비밀에 부치면서, 해마다 그의 기일이 되면 세계 각지에서 그의 매장지를 놓고 관심이 높아진다. 팰로앨토 현지에서 잡스의 흔적을 찾아봤다.
스티브 잡스가 묻힌 팰로앨토 알타메사 추모공원 정문.
그러나 이 추모공원에 세계 각지의 추모객이 몰려오기 시작한 건 2011년 10월 이후다. 그해 10월 5일 세상을 떠난 애플 공동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이곳에 묻혔기 때문이다. 잡스 7주기인 올해도 그를 찾는 추모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가 ‘세상에 일으킨 변화(a dent in the universe)’에 경의를 표하려는 팬들이다. ‘세상에 일으킨 변화’라는 표현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들의 스토리를 다룬 영화 ‘실리콘밸리의 해적들(Pirates of Silicon Valley)’에서 잡스 역을 맡은 배우의 대사에 등장했다. 이후 잡스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표시 없는 무덤
알타메사 추모공원 내 스티브 잡스 방명록.
공원 입구에서 20m 정도 거리에 있는 관리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중년의 여성 직원 한 명이 뭔가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문의 사항이 있다며 잡스 무덤 얘기를 꺼냈더니 곧바로 “그건 알려줄 수 없다. 우리도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예상한 반응이긴 했다. 유족 요청에 따라 잡스가 묻힌 장소는 추모공원의 극비 사항이 됐기 때문이다. 그가 묻힌 장소를 아는 직원도 극히 소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추모객이 얼마나 찾아오느냐고 다시 묻자 직원은 “몇 명이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계속 찾아온다”고 짧게 답했다. 잡스가 묻힌 곳이 대략 공원의 어느 부분인지만이라도 알 수 없느냐고 묻자 성가신 듯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유족이 비공개를 원했기 때문에 그의 묘지는 표시 없는(unmarked) 무덤이다. 여기에는 그렇게 표시 없는 무덤이 많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그중 하나가 잡스의 무덤이라는 것뿐이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잡스가 작가 월터 아이작슨에게 집필을 부탁한 공식 전기 ‘스티브 잡스’에는 그가 자기 장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잡스는 죽기 얼마 전까지도 장례 절차에 대해 이렇다 할 얘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아내 로렌은 남편이 화장을 원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1년 10월 3일, 그러니까 사망 이틀 전 잡스는 자신이 죽거든 부모가 묻힌 묘지 가까이에 매장해달라고 얘기했다. 갓난아이 잡스를 입양해 사랑으로 보살피고 키운 부모 폴과 클라라가 이미 알타메사 추모공원에 묻힌 뒤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들 묘지 근처엔 빈자리가 없었다. 이후 유족의 요청에 따라 잡스는 묘비는 물론 아무런 표시조차 없이 공원 어딘가에 묻혔다.
관리사무소에서는 그의 흔적을 찾는 이들을 위해 방명록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놓인 책상 위에는 ‘유족의 요청으로 잡스 씨가 묻힌 장소는 공개하지 않으니 양해 바란다’는 문구와 함께 방명록이 놓여 있었다. 내용을 살펴봤다. 중국인으로 보이는 한 추모객은 이렇게 썼다. ‘스티브,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이곳에 와서 당신이 잠든 곳을 방문할 수 있는 건 내게 행운이네요. 나 역시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머리 좋은 천재를 넘어선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부디 영면하시길.’
인도 뭄바이에서 왔다는 한 추모객은 이곳을 방문하는 게 자신의 버킷리스트였다며 남다른 소회를 전했다. ‘어느 누구도 당신만큼 내게 영감을 주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삶과 제품에 실천한 간결함(simplicity)과 집중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당신이 일으킨 변화에 감사합니다. 부디 평화롭게 지내길 기도합니다.’ 브라질에서 왔다는 추모객은 ‘모든 세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줘 감사합니다. 내가 여기에 온 건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남겼다. 애플 로고 모양으로 한입 베어 문 사과를 그린 뒤 감사하다는 말을 써놓은 방문객도 있었다. 스스로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라고 밝힌 한 추모객은 ‘당신은 내게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려줬습니다’라고 썼다.
방명록을 몇 장 들춰보니 미국은 물론 독일, 이탈리아, 터키, 중국, 인도, 필리핀, 한국 등 세계 각지에서 그를 추모하는 이가 찾아오고 있었다.
공원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니 잡스를 추모하려고 공원을 찾는 이들은 안 될 줄 알면서도 어떻게든 그의 묘지를 식별하려 노력한다고 했다. 드넓은 공원의 묘비 사이를 다니며 아무 표시가 없지만 누군가 꽃을 가져다 놓은 곳을 살피고 다니는 것이다. 잡스의 유족 등이 실수로 뭔가 단서를 남겨두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잡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정원에 사과나무가 늘어선 스티브 잡스 집 전경.
알타메사 추모공원 내 잔디 위에 놓인 꽃다발. 아무 표시도 없는 곳에 꽃다발이 수북이 놓여 있어 필자는 잠시 이곳이 스티브 잡스가 묻힌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왼쪽). 지난해 스티브 잡스 집에서 아이들에게 나눠준 핼러윈데이 선물. 초콜릿과 사탕, 생쥐 인형 등이 들어있다.
잡스를 추모할 수 있는 좀 더 직접적인 장소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팰로앨토 자택이다. 잡스의 아내 로렌과 자녀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이 집은 알타메사 추모공원 못지않게 실리콘밸리의 성지가 돼가고 있다.
10월 5일 오전 11시 20분. 팰로앨토 웨이벌리가(Waverly St.) 2101번지에 있는 ‘잡스 집’을 찾았다. 정원에 있는 여섯 그루의 사과나무엔 먹음직스러운 사과가 매달려 있었다. 한적한 주택가에 있는 집 주변은 조용했고, 개를 끌고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주민만 이따금 눈에 띄었다.
지난해 핼러윈데이 당시 괴기하게 꾸며진 스티브 잡스 집 풍경. 잡스의 유족들은 핼러윈데이가 되면 사과나무가 있는 정원을 음산한 분위기의 무덤, 비석 등으로 꾸미고 유령으로 분장한 배우들을 배치해 방문객을 놀라게 한다.
필자는 핼러윈데이에 딸과 함께 잡스의 집을 여러 번 방문했다. 그때마다 딸이 받은 선물을 보면 사탕, 초콜릿 같은 먹을거리와 더불어 생쥐 인형이 포함돼 있었다. 지난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애플이 최초로 상용화한 컴퓨터 주변 기기가 마우스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우스는 잡스가 1979년 실리콘밸리 최고의 연구기관 중 하나인 제록스의 팰로앨토연구소(PARC)를 방문했을 때 연구소에서 개발한 제품을 보고 ‘창조적 모방(?)’을 했다는 게 정설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보면 생쥐 인형은 잡스를 기리며 유족이 마련하는 귀여운 선물인 셈이다.
애플은 회사 차원에서 ‘Remembering Steve’라는 이름의 추모 블로그를 운영한다. 10월 초 살펴보니 세계 곳곳에서 100만 명 넘는 사람이 잡스를 추모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알타메사 추모공원이나 그의 자택을 직접 찾지는 못해도 잡스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이 적잖은 셈이다.
상상하고 실현한 사람
잡스의 생애를 다룬 전기 ‘비커밍 스티브 잡스’를 보면 아내 로렌은 2011년 10월 17일 스탠퍼드대 캠퍼스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남편을 이렇게 표현했다.“많은 장애를 걷어내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 실제를 명확히 보는 것만도 충분히 대단한 일인데 스티브는 그것보다 훨씬 놀라운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현실에 없는 것, 현실에 있을 수 있는 것, 현실에 있어야 할 것을 명확히 간파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의 정신은 한순간도 현실의 포로였던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지요. 그는 현실에 부족한 것을 상상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나섰습니다.”
잡스는 많은 이가 인정하듯 아이폰과 더불어 한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남았다.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넘어도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이 줄지 않는 건 로렌의 표현대로 한순간도 현실의 굴레에 갇히지 않은 채 상상하고 실현하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