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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달호 편의점 칼럼

그 많던 주사파는 다 어디로 갔을까

  • 봉달호 편의점주 runtokorea@gmail.com

그 많던 주사파는 다 어디로 갔을까

  • ●90년대 학생운동권의 자기 고백
    ●NL이 장악한 세대, 운동권 = 주사파
    ●80년대 학번들의 ‘행동대장’ 노릇
    ●이악스러운 ‘주체’의 잔불
    ●지금도 광장에서 “기득권 타도” 외치며 유령과 싸워
[뉴시스, 동아DB]

[뉴시스, 동아DB]

나는 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놀랄 건 없다. 내 동생은 중학교 3학년 때 시작했으니까.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당시 정부는 전교조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가입 교사들에게 탈퇴를 명령했다. 교사가 과연 노동자인가, 그렇다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해도 되는가. 국민 정서도 온전히 전교조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만 명 가입 교사 가운데 약 1500명이 탈퇴를 거부해 교직에서 해임됐다. 건국 이후 최대 규모 해직이었다. 전교조에 대한 지지나 반대 여부를 떠나 어제까지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강제로 교단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실망과 분노, 그것이 그 무렵 중·고교생 운동권을 탄생하게 만든 기폭제였다. 벌써 30년 전 일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또래들과 학생운동 무용담을 나누다 보면 약간 애매할 때가 있다. 대학으로는 92학번이지만 운동권 정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공유하고 있어, 때로 “학번을 속인 것 아닌가” 하는 엉뚱한 오해를 받기도 한다.


90년대 운동권은 누구인가

이른바 ‘조국 사태’의 소용돌이 가운데 ‘86세대’가 다시 주목받았다. 80년대 학번, 60년대에 태어난 선배님들 말이다. 한때 ‘민주화의 기수’로 존경받던 그들이 지금은 기득권과 불공정, 사다리 걷어차기, 내로남불의 대명사로 지탄받는다. 후배들은 그들을 “모든 것을 누리고도 피해망상에 빠진 세대” “학생운동 3~4년 경력을 갖고 30~40년을 우려먹는 사골곰탕 같은 세대”라고 비아냥거린다. 그 와중에 ‘90년생’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주목을 받고, X세대, Z세대, 밀레니얼세대, M세대, N세대, Y세대, 에코세대 등 온갖 세대 구분 용어까지 재야에 숨어 있다 다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세대를 따지자면 나는 X세대다. 마땅히 정의하기 어려워 ‘알 수 없는’ 세대라고 마구 정해진 그 이름, X세대. 잘 조직된 군사집단을 보는 듯했던 80년대 학번 선배들도 아니고, 자유로운 영혼처럼 캠퍼스를 활보하고 다니던 00년대 학번 후배들도 아니고, 그사이에 끼어 있던 ‘끼인’ 세대, 애매한 세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관리자’ 세대, 중간자 세대, 90년대 학번들. 



모든 세대는 각자 세상에서 ― 혹은 무려 역사상! ― 가장 불행한 세대라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신들이 축복받은 세대라고 고마워하는, 혹은 미안해하는 세대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불평이나 하려고, 우리 X세대는 여러모로 불쌍한 세대라고, 그것을 널리 알리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운동권으로서 86세대에 대한 조망은 많았으나 운동권으로서 90년대 학번의 자기 고백은 흔치 않은 것 같아, ‘90년대 운동권, 그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작은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필자는 90년대 운동권의 평균적인 삶을 살았다 볼 수 없고, 우리 세대를 대표하거나 대변할 그릇 역시 전혀 아니지만, 일단 너그러운 이해를 구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주사파가 장악한 세대

1989년 3월 11일 전대협이 주최한 ‘평양청년학생축전 참가를 위한 공청회’ 포스터가 서강대에 게시돼 있다. [동아DB]

1989년 3월 11일 전대협이 주최한 ‘평양청년학생축전 참가를 위한 공청회’ 포스터가 서강대에 게시돼 있다. [동아DB]

1990년대 학생운동권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주사파가 장악한 세대’라고 말할 수 있겠다. 80년대 선배들은 NL(민족해방)이냐, PD(민중민주)냐 하는 고민과 논쟁이라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90년대 우리들은 그런 것조차 없었다. NL이 80~90%는 장악한 상태였으니까, ‘운동권 = 주사파’로 통했다. 존재의 구성요소 가운데 8할 이상이 특정한 무엇이라면, 존재의 속성은 그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90년대 학생운동은 종북(從北) 그 자체였다. 1980~90년대 학생운동을 흔히 ‘민주화 운동’이라고 말하는데, 80년대 선배들은 그렇다 치고, 90년대에 우리들이 과연 ‘민주주의’ 운동을 했던가, 우리 안에 민주주의 의식과 생활양식이라는 것이 존재했던가. 나는 그것에 대해 스스로 회의할 정도다. 

운동권에 주체사상을 도입한 82학번 선배에게서 “북한의 주체사상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도서관에서 안기부 책자까지 빌려 읽었다”는 회고의 말을 듣고 경탄한 적이 있다. 당시 공안기관에서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서적을 만들어 배포하곤 했는데, 그 뒤쪽에 보면 북측 자료가 부록으로 실려 있었다. 그것을 짜깁기해 자신들만의 ‘원전’을 만들었던 것이다. 공안기관은 자신들이 만든 책자가 그렇게 역이용(?)당할 것이라 상상이나 했을까? 아무튼 제법 ‘창조적’ 열정이 아닐 수 없다. 

그에 비교해 90년대는 원전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나만 하더라도 NL로 노선을 결심하게 된 확실한 계기가 북한 소설 ‘꽃 파는 처녀’였다. ‘이적 표현물’이라고 신문과 방송에서 하도 요란히 떠들기에 대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 읽어보았는데 감동해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BC 문건도 넘쳤다. 90년대 학번들이 이 표현을 들으면 “추억 돋는다” 말할지 모르겠다. Broadcasting의 약자로 BC라 불리는 문건이 있었다. 북한의 대남선전기구 한국민족민주전선에서 송출하는 ‘구국의 소리’ 라디오방송을 채록한 문건이었는데, 거의 사나흘 시차를 두고 방송 내용이 고스란히 정리돼 대학가 곳곳에 돌아다녔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다닌 대학은 과(科) 학생회실에도 그런 문건이 굴러다닐 정도였다. 방송을 들어본 사람은 기억할 것이다. 시중에 쉬이 들을 수 있는 AM이나 FM이 아니고 SW(단파) 방송이라 라디오 자체를 구하기 어려웠고 ― 단파 라디오를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간첩 신고 대상이었다 ― ‘지직’거리는 방해전파 때문에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그런 방송을 밤새 듣고 받아쓰는 전담 ‘청취팀’이 전국에 암약했으니, 돌아보면 그런 식의 열정과 네트워크 하나는 놀라운 시절이었다.


과거를 합리화하는 게 인간

공안당국이 1992년 5월 15일 사노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동아DB]

공안당국이 1992년 5월 15일 사노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동아DB]

주사파라는 사실이 그리 숨길 일도 아닌 시절이었다. 1989년 집회를 마치고 잔디밭에 둘러앉아 ‘총화(總和)’를 하던 때 어느 선배가 “나는 이제 주사파가 되기로 했어. 김일성 장군님을 평생 존경하며 따를 거야!”라고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기에 흠칫 놀란 기억이 있다. 1~2년 지나니 친북적인 경향이 순식간에 확산되며 그런 고백(?) 정도는 그리 놀랍지도 않게 됐다. 이른바 ‘이북 바로 알기’라는 미명 아래 북한을 찬양하는 대자보가 캠퍼스 알림판에 수십 장씩 연달아 붙어 있기도 했고, 북한식 용어와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는 선후배가 급격히 늘어났으며, 동아리방에서 기타 치며 북한 노래를 우렁차게 합창해도 운동권 아닌 친구들조차 그 내용을 갖고 탓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종북의 호시절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운동권 ‘일부’의 일탈 아니냐, 일부 중에서도 상층 지도부에만 해당하는 모습 아니냐 하고 말씀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단언컨대 ‘대다수’의 모습이다. 크게 양보해서 표현해도 90년대 학생운동권의 ‘상당수’에 해당하는 풍경이다. “나도 그때 학생운동을 했지만 그러지 않았어요”라고 항의하는 분이 계신다면, 굉장히 순수한 시선을 지녔거나 가장 초보(?) 수준 운동만 하셨던 것이라 대답해드릴 수밖에 없다. 

최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활동 전력이 논란이 되던 때에 해방둥이(1945년생) 연세의 어떤 어르신을 만났는데 “1990년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면서 자유 진영의 체제 우위가 분명해졌고 1991년에는 소비에트 연방까지 붕괴됐는데 그런 과정을 눈으로 목격하고도 사회주의 어쩌고 하는 활동을 계속했다는 사람이 과연 정상이라 볼 수 있어요?”라고 따지듯 물으시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부끄러웠다. 사노맹은 NL도 PD도 아닌 ND라는 극소수 그룹이긴 했지만 ‘시대착오’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엄연히 나에 대한 비판의 말씀으로도 들렸다.


외우고 관철하는 ‘행동대장’ 역할

어쨌든 사람은 대개 자신의 선택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과거 자기가 한 일에 어떻게든 의미를 두고 싶어 한다. 비록 처절하게 실패한 일이었을지언정 나름대로 성과와 의미가 있었다고, 전혀 쓸모없는 낭비는 아니었다고, 그렇게 도리질 치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싶어 한다. 나도 그렇다. 

변명하자면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하자 NL이, 혹은 북한이, 더욱 빛나 보였다. 동부 전선이 무너지니 서부 전선의 의미가 막중해 보이는 모양으로, 사회주의가 그렇게 아수라장이 됐는데도 건재해 보이는 북한에 더욱 관심이 쏠렸다. 1990년대 초반 학생운동에 북한 경도가 심화된 이유에는 분명 그런 배경이 있었다. 운동 자체를 포기하기는 좀 그렇고 ― 그건 우리의 존재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격이었으니까 ― 어쩌면 관성에 의해 운동을 계속하면서 관심의 대상이 ‘반독재 민주’에서 ‘자주 통일’로 옮겨간 것이다. 여기서 ‘자주’란 북한과의 관계에서 대등함이 아니라 오롯이 외세를 배격하는 ‘자주’였던 것이고. 

그래, 우리는 그런 세대였다. 운동권에서 비(非)운동권으로, 혹은 반(反)운동권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중간에 끼인 세대였고, 무너지고 사라지는 어떤 것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써야 하는 세대였고, 집단주의적 규율과 엄격함에서 개인주의적 융통성과 재기발랄함으로 넘어가는 세대의 중간에 자리 잡은 ‘애매모호한’ 세대였다. 지금의 40대들 말이다. 

앞에서 슬쩍 “우리 안에 민주주의 의식과 생활양식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했던가”라고 언급했는데, 1990년대에 학생운동을 한 경험을 통틀어 나는 조직 안에서, 집단 안에서, 무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해본 경험이 별로 없다. 내가 제법 충직한 조직원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그 무렵 어떤 일에 격론을 벌였다면 그것은 지하 조직의 지시와 결정을 공개적인 단체에서 관철하기 위한 우격다짐 정도였고, 어느 시기 가슴 절절하게 고민한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더 나은 혁명가로 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질책의 수준을 넘지 않았다. 우리 다수는 순종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받아 적는’ 위치에 있었다. 아니, 보안 때문에 필기나 기록이 금지돼 있었으니 낱낱이 암기하는 것이 기본자세였다. 그렇게 외우고 관철하는 일이 우리의 역할이었다. 그런 대리인, 관리인, 집행인, 행동대장 같은 사고와 습관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지 않나 싶다.


자녀 동원해 ‘검찰개혁 동영상’ 찍은 부모들

어린이들을 동원해 촬영한 ‘검찰개혁송’ 유튜브 영상. [유튜브 캡처]

어린이들을 동원해 촬영한 ‘검찰개혁송’ 유튜브 영상. [유튜브 캡처]

“86세대는 정치권에 진출해 정계의 아이콘이 된 사람이 많은데 90년대 학번에는 왜 그런 사람들이 없나?”라는 질문을 가끔 받곤 하는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오래된 관리자적 습성 때문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학번과 계보에 눌리는 것도 있고,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90년대 운동권이 80년대 운동권보다 오히려 ‘털릴’ 것이 더 많은 세대이기도 하다. 내 주위만 하더라도 누군가 정치를 한다고 하면 “그가 언제 어디서 수령님 만세를 외쳤더라?” 하고 여러 기억이 슬라이드처럼 스쳐 가는 사람이 많으니까. 물론 다 어린 날의 객기이긴 하지만. 

1990년 전남대에서 열린 전대협 출범식에 5만 명이 모였다. 1993년 고려대에서 열린 한총련 출범식에는 10만 명이 모였다. 예나 지금이나 인원을 크게 부풀리는 습성은 여전하지만, 당시 전국 단위 학생 집회에 1만~2만 명 정도 집결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풍경이었다. 한국 대학가에 주체사상이 유입된 1986년경부터 퇴조하기 시작한 1996년 연세대 사건까지, 그렇게 10년만 따져도, 전대협-한총련 출범식에 참가한 연인원을 헤아려 운동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족히 10만 명이 넘는다. 물론 그들 모두가 주사파는 아니지만 그 가운데 10%만 가늠해도 최소 1만 명가량은 한때 ‘장군님’을 존경했던 사람들이고, 6·25전쟁은 미제와 이승만 괴뢰가 도발한 북침(北侵) 전쟁이라 굳게 믿은 사람들이다. 이것도 상당히 보수적으로 타산해본 수치다. 그렇다면 그 많던 주사파는 다 어디로 갔을까? 

여전히 그 시절의 황당한 사고와 행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은 1% 안팎일 것이다. 수적으로 따지면 1000~2000명 정도? 그들이 바로 수년 전 통합진보당 사건에서 화제가 됐던 사람들 ― 자기들끼리 모여 통신망 파괴하고 철도를 끊고 가스 시설을 폭파하는 ‘혁명의 그날’을 모의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지금도 어딘가 으슥한 곳에 둘러앉아 “위대한 수령님”을 숙덕거릴지 모른다 ― 다음 총선에서도 무슨 당을 앞세워 재기를 꿈꾸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어린 자식들까지 집회 무대에 올려 황당한 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그 ‘부모’들의 비밀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사실 그리 위험하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30년이 지나도록 필리핀 정글에서 숨어 나오지 않고 홀로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친 ‘최후의 황군’과도 같은 사람들이니까. 오히려 문제가 되는 쪽은 어떠한 형태의 사상적 반성이나 교정도 없이 세상과 세월에 스스로 묻혀버린 99% 아닐까.


허깨비와 싸우던 시절

반복건대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한다.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기억력과 감수성이 최고로 뛰어난 20대에 입력된 사고의 습관과 경향은 거의 일생토록 그 원형을 유지한다. 위험성은 대개 이런 것들에 있다. 

옛 운동권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몇 가지 경향성을 발견한다. 첫째, 부채의식. 역사에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지난날 자신의 착오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끝까지 이루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한 아련한 마음의 빚이라는 사실에 흠칫 놀란다. 둘째, 비주류 의식. 내가 보았을 때 한국의 운동권은 이제 완연히 사회의 주류가 됐고 견고한 기득권 집단이 됐는데 여전히 자신들은 소수이며 거악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끝내 ‘물리쳐야’ 할 어떤 것들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셋째, 역사를 결과론적으로, 혹은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속으로 지향했던 것은 분명 사회주의혁명이나 미제(美帝) 축출이었는데, 어쨌든 그렇게 해서 민주화가 덩달아(?)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총평한다. 거기에 자신이 하나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넷째, 그것은 새로운 확신으로 전화(轉化)한다. 나는 옳다는, ‘옳을 수밖에 없다’는, 그리고 ‘틀릴 수가 없다’는. 

1990년대 학생운동을 회고하건대 그것은 분명 주사파의 시대였고 허깨비와 싸우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유령을 만들어 내내 싸웠다. ‘라만차의 기사’를 자처하며 난데없이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와 같은 날들이었다. 우리가 저지른 일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여전히 정확히 알지 못한다. ‘젊은 날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치부하면서, 지금까지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쳐왔는지 조금도 돌아보지 않는다. 주사파는 사라지지 않았고, 재구성된 파편으로 그렇게 우리 안에 살아 숨 쉰다.


지금도 “기득권 타도” 열렬히 토로

2020년쯤 되면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 같았는데, 까마득히 느껴지던 그 연도를 고작 몇 개월 앞둔 늦가을의 어느 날, 서초동으로 여의도로 광화문으로, 여전히 차디찬 아스팔트 광장에 나서길 주저하지 않는 옛 친구들을 보며 지난날의 달뜬 열정과 확신을 떠올렸고, 집회를 마치고 포장마차 안에 모여 앉아 ‘기득권 타도’를 열렬히 토로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직도 이들은 유령과 싸우고 있구나 하고 회의했다. 내일도 누군가는 장대한 허깨비를 만들어 순진한 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겠지. 

“하나의 불씨가 광야를 불태우리라.” 마오쩌둥(毛澤東)의 예언은 대륙에서 실패했으나 반도의 한 귀퉁이에서 제대로 성공한 것 같다. 이토록 이악스러운 ‘주체’의 잔불을 남겨두고 있으니.!

'신동아 12월호'




신동아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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