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호

[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9-2

타파히가 만난 운명의 별

  • 윤채근 단국대 교수

    .

    입력2020-06-08 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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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심심하지 않은가? 그렇게 불만 다루며 사는 거?” 

    상대의 질문에 타파히는 더듬이를 떨어 신경 쓰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새로 출현한 추격자는 아직 타파히의 정체를 확신하지 못한 눈치였다. 용융기 앞에 앉은 타파히는 상대를 언제 끊어내야 할지 빨리 결정해야 했다. 레우웩보다 강력한 추격자를 꼬리에 매달고 사는 건 고역이었지만 권태를 벗어나는 데엔 추격전보다 좋은 것도 없었다. 

    뒤돌아선 추격자가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숙주를 막 벗어나려는 순간 타파히가 살며시 한마디 했다. 

    “용융기술자라 우습게 보진 말라고! 삶은 다양한 거야.” 

    타파히가 오래전 사어가 된 동사 ‘보다’를 사용해 자기 정체를 슬쩍 암시해 줬지만 상대는 무심히 이동해 버렸다. 다시 풀무질을 시작한 타파히가 더듬이를 비비며 크게 웃었다. 



    “어리석은 녀석. 아비보다 한참 둔하군.”

    2

    얼마 만에 다시 시작된 추격전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자기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추격자는 드물었기에 어쩌면 타파히에게 으름스는 운명의 추격자였다. 타파히는 도주하기 유리한 극장 행성들로 무대를 옮기기로 작정했다. 극장 행성은 차원 이동이 빈번히 일어나는 행성을 지칭하는 이동자들의 은어였다. 차원이 활발히 증식되는 그곳엔 추격자도 많았지만 그만큼 도주 가능한 시공 차원이 다양하게 열려 있었다. 그렇게 행성을 물색하며 이동하던 타파히는 어느 날 익숙한 행성 하나를 발견했다. 꿈의 마지막 장면마다 나타나곤 하던 파란 행성이었다. 

    그 행성을 처음 본 순간, 타파히는 곧바로 자기 운명을 깨달았다. 자신의 이동이 의미를 가지고 종료될 행성, 아니 자신의 출발점이었을 수도 있는 행성, 바로 지구였다.

    3

    꿈의 장면을 찾기 위해 맹렬히 차원 이동하던 타파히는 23세기 지구 대기권에 떠 있던 섬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자기 과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증식된 다른 차원의 시공계들로 수색을 넓혀도 탈피자 가운데 부모처럼 보이는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의 고향은 지구가 아닌 것 같았다. 

    타파히의 반복된 이동은 언제나 섬 거주자의 탈피가 종료됐던 2299년에서 끝나곤 했는데 이 특이한 패턴은 언젠간 추격자에게 포착될 터였다. 타파히는 추격자가 지구에 도착하기 전 행성 멸망 과정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는 예전 호주라 불렸던 대륙의 남부 제3구역 12번 벙커로 이동해 착지했다. 2357년 여름이었다.

    4

    “니키, 농담 그만해.” 

    블루피가 크게 웃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가슴을 파고들며 니키 바일이 속삭였다. 

    “농담 아냐. 난 외계에서 왔어.” 

    웃음을 멈춘 블루피가 니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런데 네 고향이 여기 지구일 수 있단 거야?” 

    “그래.” 

    “네 말대로라면 넌 엄청나게 먼 미래 존재여야 해.” 

    “맞아. 난 너희 시공 개념으로 수십억 년 미래로부터 차원 이동해 왔어.” 

    몸을 일으킨 블루피가 정색을 하고 다시 물었다. 

    “또 지구에 차원이 여러 개라고? 그럼 나 블루피도 여러 명이어야 하잖아?” 

    “아마.” 

    블루피 가슴의 털을 쓰다듬으며 니키가 덧붙였다. 

    “지구는 이동자의 간섭이 심한 행성이야. 차원이 마구 증식되는 위험한 곳이지.” 

    니키의 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블루피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넌 내 품에서 잠드는 귀여운 여자일 뿐이야.” 

    “그래, 블루피. 너와 잠들면 편안해.” 

    둘은 끌어안고 오래 사랑을 나눴다. 니키는 블루피 품에서 악몽을 꿨다. 부모와 탈피를 위해 어딘가로 향하던 도중 대폭발이 일어나는 장면은 늘 반복되던 광경이었지만 하나가 추가됐다. 처음 대기권에 진입하던 순간 눈에 들어온 황량한 지구의 모습이었다. 지적 생명체가 사라진 스산한 행성엔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건 몰락한 별이었다. 

    지구의 여러 차원을 회람하던 타파히는 더 무서운 시공계도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지구는 가공할 내부 핵분열로 파괴되기도 하고 두꺼운 가스층이 태양 빛을 막아 얼어붙기도 했다. 어쨌든 자기 고향일지도 모를 행성은 무수한 원인으로 제 수명을 누리지 못한 채 별로서의 역사를 마감하고 있었다. 

    니키가 눈을 떴을 때 향긋한 민트향이 맡아졌다. 목욕을 마친 블루피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힘껏 끌어안은 니키가 속삭였다. 

    “좋은 결말도 분명 있을 거야. 멸망하지 않는 다른 차원 말이야.” 

    니키의 코를 살짝 움켜쥔 블루피가 말했다. 

    “또 꿈 타령이야? 오늘 2구역 모래벌판 쪽 로봇 공장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튕기듯 몸을 일으킨 니키가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맞아. 일렉트로노이드 녀석들이 뭔가 만들어낸 것 같아. 그걸 오늘 확인할 거야.”


    윤채근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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