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호

이건희의 IT혁명 vs 리영희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민경우 586칼럼]

후진 사회주의·낡은 인간관, 정보통신 시대 가로 막아

  •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 소장

    mkw1972@hanmail.net

    입력2021-06-0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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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산업화 전략과 맞아떨어진 삼성의 한국반도체 인수

    • 1970년대 중반, 정보통신 문명과 민족해방·사회주의 이념 경합

    • 농촌적 감수성에서 밝고 명랑한 도시적 감성으로 변모

    • 혁신적 자유주의 가로막는 민족해방적, 사민주의적 성향

    *586세대 NL(민족해방 계열) 이론가이자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무처장 출신인 필자가 문재인 시대에 표하는 유감.

    1970년대 후반 시작된 대학가요제와 개그콘테스트는 한국 사회의 주류 문화로 떠올랐다. 사진은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모습. [동아DB]

    1970년대 후반 시작된 대학가요제와 개그콘테스트는 한국 사회의 주류 문화로 떠올랐다. 사진은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모습. [동아DB]

    리영희 두 번째 시간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일어난 다른 사건과 비교하는 것이 좋다. 리영희의 출세작은 1974년 출간된 ‘전환시대의 논리’다. 운동권의 역사에서 전환시대의 논리는 매우 중요한 책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 책으로부터 충격을 받았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유력 정치인들도 상당수 있다. 그렇다면 1974년에 있었던 다른 일들 중 기억할 만한 것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전자공학과 생물학을 예로 들어보자.

    한국의 정보통신 혁명 이룬 두 가지 중요한 사건

    미국의 월리엄 쇼클리가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것이 1947년이다. 트랜지스터는 이전 시대 진공관을 대체하며 본격적인 전자·전산업의 기초를 놓았다. 역사책에 나오는 최초의 컴퓨터를 보면 진공관을 하나씩 전선으로 연결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래서는 생활화, 대중화가 불가능했다. 이를 해결한 것이 집적회로로 1959년 페어차일드사가 개발했다.

    트랜지스터가 1947년이고 집적회로가 1959년에 개발됐으니, 1970년대 초반 관점에서 본다면 전자산업은 이제 본격적으로 개화하려는 문턱에 있던 셈이다. 이런 시대적 맥락 속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삼성의 한국반도체 인수이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의 산업정책이다.

    이병철의 삼남 이건희가 사비를 털어 망해 가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건희의 행보는 1983년 2월 이병철의 도쿄선언으로 이어지고 삼성전자의 반도체 대도약으로 이어졌다. 박정희의 일화도 중요하다. 박정희는 산업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연장선에서 전자산업에 대한 관심과 관련한 일화들이 있다. 박근혜가 대통령의 딸 신분으로 19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산업화가 진척됨에 따라 사회도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한국은 빠르게 도시화, 지식화됐다. 도시에 집적된 새로운 유형의 인류인 대학생들은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고 있었다. 1970년 고등교육기관에 재적한 학생 규모는 20만 명에서 1980년에는 3배가 넘는 65만 명으로 늘었고 1990년에는 170만 명에 육박했다. 고등교육을 이수한 청년들은 새로운 도시 문화를 건설해 향유하기 시작한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1977년 대학가요제와 1979년 개그콘테스트다. 이들 대학 문화는 이미자, 남진으로 대표되는 농촌 문화를 밀어내고 한국 사회의 주류로 떠올랐다. 이 신인류가 다름 아닌 1980년대 이후 세계적 흐름으로 발전한 정보통신 사회의 주역이다.

    사상적 맥락에서 임박한 정보통신 문명을 잘 대변한 것이 앨빈 토플러나 스티브 잡스일 듯하다. 한국이라면 V3의 안철수, 한글과컴퓨터의 이찬진, 훗날 네이버와 카카오를 창립하는 이해진·김범수가 그들이다.

    한국의 1970년대는 밝고 명랑한 1980년대로 이어졌다. 물론 지금 돌아보니 그렇다는 뜻이다. 1970년대 초반 시점에서 보면 세상이 어디로 갈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다양한 관심과 시각 중 한국을 베트남, 중국과 같은 민족적 사회주의에 한반도와 한국의 처지를 대입하고 하나의 스토리를 만든 사람이 리영희다.

    정보통신 문명 VS 민족해방, 사회주의 이념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 분야 핵심 생산 라인인 화성 캠퍼스 전경.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 분야 핵심 생산 라인인 화성 캠퍼스 전경. [삼성전자 제공]

    1970년대 후반을 넘어서면 리영희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은 사라지고 있었다. 중국은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고 중국-베트남 전쟁, 이란혁명 등 제3세계 민족주의의 건강성에도 짙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리영희의 업적과 위상은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초반 어디까지다. 그는 1970년대 사상사의 위치 어딘가 있으면 적합한 인물이다. 리영희를 1970년대를 넘어 문명사적 의의를 갖는 사상가 또는 사상의 은사의 반열에 밀어 올린 것은 1970년대를 거쳐온 운동권들이다.

    1970년대 중반 한국은 두 개의 세계가 경합하고 있었다. 하나는 정보통신 문명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해방과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이었다. 한국에서 양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이건희와 리영희다. 한국은 전자가 가르치는 방향을 따라 발전했지만 1970년대의 운동권들은 리영희를 따라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으로 치닫는다. 누가 옳았는지는 한국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리영희에게 그 정도만큼 쓸데없는 낭비를 해온 셈이다.

    리영희를 평가하는 또 다른 잣대는 생물학이다. 1953년 DNA의 구조가 밝혀진 이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종합이 이뤄진다. 대표적 작품이 1975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1976년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이다.

    본 글의 주제에 맞게 이들을 평가하자면 핵심은 사변적 인간론의 해체다.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인간의 다양한 행동을 분석한다. 심지어 수학적 방식으로 그것을 논증한다. 월슨의 사회생물학에서도 생물학을 동원해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분석한다. 이들의 시각에서 보면 신에 의해 부여된 인간의 존엄성 같은 것은 없다. 도킨스나 윌슨이 보여준 것은 아무 근거 없이 인간성을 미화하는 경향의 종식이다.

    이에 대비되는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호의적 평가와 다른 하나는 제3세계 인간형에 대한 미화다. 한국은 특이한 나라다. 압도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은 주로 군사, 경제, 과학과 같은 영역에서 그러하다. 반면 문화, 철학 등에서는 독일,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70년대까지가 특히 그러했다.

    프랑스혁명에서 루소와 로베스피에르의 흐름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특징이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폭력도 불사할 수 있다는 경향이다. 이 흐름의 한편에서 마르크스-레닌으로 가는 경향이 형성됐다. 이 흐름은 근원적 인간형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위한 사회적 노력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다.

    또 다른 흐름은 한국적 흐름 즉 농업적, 민중적 전통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다. 1970년대 초반에는 여전히 농업적 전통이 깊게 남아 있었고 이를 이상화한 경향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전태일평전’이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이 지향하는 소박한 인간 공동체다.

    1970년대 중반, 한국은 공동체를 중시하고 명분과 감정을 우선하는 제3세계로 발전하는가, 아니면 개인주의를 긍정하고 실리와 이익에 기초한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가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막 꽃피기 시작한 정보통신 문명과 연관돼 있었다.

    시대가 부여한 과제를 이행한 사람들

    ‘전태일평전’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0, 1980년대 운동권의 필독서였다.

    ‘전태일평전’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0, 1980년대 운동권의 필독서였다.

    경제가 성장하고 소득이 늘어나면서 대한민국은 다채로운 감성과 욕망으로 들끓기 시작한다.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두 가지 경향이 싸우고 있었다. 프로 스포츠가 개막되고 컬러 TV가 개통되고 나아가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확장됐다. 사회는 점차 농촌적 감수성에서 밝고 명랑한 도시적 감성으로 변모했다.

    반면 한국의 운동권은 때 아닌 도덕적, 훈고학적 인간주의에 빠져들었다. ‘전태일평전’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아침이슬 등이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 북적이는 시장과 광장에 나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을 보기보다는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비현실적 이상의 세계에 신비화된 무엇인가를 남겨두고 거기서 그들만의 세계를 키웠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 군상을 탐구하려는 기이한 시도가 이어졌다. 그것의 계보는 전태일평전-리영희의 중국, 베트남 탐구-주체사상-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리영희는 베트남과 중국을 통해 전태일평전과 난쏘공의 심성 구조를 정치적 맥락에서 확대한 사람이다.

    미국식 군사경제에 상응하는 자유주의는 좀처럼 한국 사회에 도래하지 않았다. 1980년대 초반 286컴퓨터와 함께 혁신적 자유주의가 도입됐지만 한국의 문화는 오랜 기간 민족해방적 또는 유럽의 사민주의적 성향에 묶여 있었다. 2010년대 초반에 스마트폰의 도입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열렸지만 리영희와 그를 추종하는 낡은 경향이 새로운 시대의 도입을 막고 있다.

    리영희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가 정보통신 문명의 발전과 그에 따른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혁신의 시대였음을 전제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병철과 이건희, 이해진과 김범수와 함께 시대가 부여한 과제를 이행하며 지금의 우리로 이어졌다. 반면 리영희는 정보통신 대신 후진 사회주의, 혁신적 개인 대신 낡은 인간관을 유지하며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지류를 이끌었다. 후대의 운동권들이 리영희가 개척한 지류의 사상을 과도하게 확장해 본말을 뒤집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리영희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이건희 #리영희 #신동아


    민경우
    ● 1965년 출생
    ●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무처장·진보연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 저서 : ‘수학 공부의 재구성’ ‘새로운 보수의 아이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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