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의 강인한 생명력, 윤여정의 삶이었다
학비부담 덜려 시작한 방송…재능 발견하다
대쪽같이 자식 키운 홀어머니, 尹 연기도 키워
최전성기 1974년 미국행, 1985년 초라한 귀국길
촬영 준비 안 된 후배‧스텝에게 독설
‘사랑과 야망’ 김수현 작가, 尹 출연을 꺼린 사연
바람난 가족, 하녀, 죽여주는 여자…종횡무진
배우 50년…74세에 이룬 39관왕 대기록
윤여정이 4월 26일(한국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Gettyimages]
오스카상은 전년도 미국 LA에서 일주일 이상 상영한 미국영화와 미국에서 상영된 외국영화를 대상으로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협회(AMPAS) 회원들의 투표로 선정되는 세계적인 권위의 영화제로 손꼽힌다.
윤여정이 출연한 영화 ‘미나리’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음악상 등 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돼 화제가 됐다.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 온 한인가정의 정착기를 그린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영화로, 윤여정은 극 중 할머니(순자 분)로 열연했다.
아카데미상 수상 이전까지 이미 세계 대표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 38관왕이라는 기록을 달성한 윤여정의 수상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할리우드의 시상식 예측사이트 ‘골드더비’ ‘뉴욕타임즈’ 등 각종 매체는 윤여정을 유력한 수상자로 점찍었고, 코로나19로 상업 영화들이 줄줄이 촬영을 미루거나 개봉을 늦추면서 상대적으로 ‘미나리’같은 저예산 독립영화들이 강세를 보이며 강한 연기색채를 보여준 윤여정에게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영화계 데뷔 50년이 된 윤여정의 수상 수감도 화제가 됐다.
학비부담 덜려 시작한 방송…재능을 발견하다
윤여정(오른쪽)의 영화 데뷔작인 김기영 감독의 1971년 작품 ‘화녀’. [(주)콘텐츠존 제공]
윤여정은 1947년 지금은 북측 비무장지대인 된 개성 인근의 내로라하는 땅 부잣집 장녀로 태어났다. 4살 때 터진 6‧25전쟁으로 가족은 서울로 피난 와 정착했다. 집안의 대들보였던 아버지마저 폐병으로 서른세 살 한참 나이에 세상을 등지자, 양호 교사였던 어머니가 집안의 가장이 돼 세 딸을 키웠다(윤여정의 막내 여동생은 LG그룹 첫 여성 임원이자 전 LG아트센터 대표인 윤여순이다).
어머니는 모진 풍파를 헤쳐 나가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소신으로 대쪽같이 자식들을 키웠다고 한다. 이는 윤여정의 당찬 연기 인생에 큰 유산이 됐다. 1960년 중학교 입학 시에는민관식 전 국회의장이 설립한 장학재단 중산육영회의 장학금을 받아 학생 대표로 답사를 하기도 했다.
평소 큰 딸 윤여정을 의지했다는 어머니 고 신소자 여사는 지난해 10월 96세로 소천할 때까지 윤여정과 함께 살며 그가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잠깐씩 얼굴이 비춰지기도 했다. 윤여정은 이화여고를 거쳐 한양대 국문과에 진학한다. 어머니의 학비부담을 덜어드리고자 시작한 방송일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1966년 윤여정은 TBC공채 탤런트가 되며 배우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데뷔 5년째인 1971년, 24세의 윤여정은 MBC드라마 ‘장희빈’에서 장희빈 역으로 출연해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대중에 각인시켰다.
같은 해 충무로에서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로 스크린에 데뷔해 대종상과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신인상과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함께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화녀’에서 윤여정은 광기와 히스테리를 품은 퇴폐적 인물인 가정부 명자로 분해 과감하면서도 농익은 연기를 펼치며 배우로서 진가를 발휘했다.
의사 출신 감독인 김기영 감독은 살아있는 쥐를 여배우가 손으로 잡게 하는 등의 다소 기괴한 서스펜스 연기를 요구했는데, 윤여정은 감독의 의도를 제대로 간파한 것이다.
배우로서의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던 최전성기였던 1974년, 별안간 그녀는 결혼과 함께 갑자기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1985년 그는 남편 조영남과 귀국했다. 전도유망한 청춘 여배우와 가수는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 플로리다로 향했지만 귀국길은 초라했고 그는 이미 잊힌 배우였다. 귀국 이듬해 이혼도장을 찍은 그는 당장 남겨진 두 아들을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허나 ‘경단녀’(경력단절녀)가 된 마흔의 여배우가 방송계에서 다시 활동한다는 건 녹녹치 않았다. 왕년의 팜므파탈 여배우로서의 자존심도 접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단역부터 닥치는 대로 주어진 역을 소화해냈다. 빈 지갑의 위력을 절감한 그는 목숨 걸고 연기했지만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질긴 생명력 원천은 성실함
지성이면 감천이었던가. 고전하던 그는 1987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국민드라마 ‘사랑과 야망’에서 비중 있는 역할인 패션디자이너 송혜주 역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돌아온 윤여정’을 확실하게 알릴 수 있었다. 윤여정은 개인적으로 ‘사랑과 야망’ 김수현 작가와 친분이 있었지만 김 작가는 윤여정을 자신의 작품에는 출연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실력이 아니라 친분으로 배역을 맡았다는 괜한 오해를 부를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윤여정의 목소리는 거칠고 허스키했고, 딱딱 끊어지는 독특한 화법의 연기스타일에 거부감을 느끼는 시청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우려는 현실이 됐고, 한동안 윤여정에게는 김수현 작가의 ‘낙하산 배우’라는 오명이 따라다녔다. 이 시절 그가 맡았던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주인공의 여동생, 주인공이 다니는 병원의 정신과 의사 등 단편적으로 정형화된 캐릭터였다. 그러나 주인공에 가려져 묻히는 조역이었지만 윤여정이 맡으면 항상 주연급 존재감을 과시했다. 역할이 크든 작든 자신만의 스타일로 주어진 인물을 충실하게 분석하고 연구해 지신만의 스타일로 창조했다. ‘쪽대본’으로 며칠 전에 대본이 급하게 나오더라도 촬영장에 완벽하게 대본을 외워 나타나는 배우로 정평이 났다. 그가 촬영장에서 준비가 덜 된 후배나 스텝에게 독설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연기에 대한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1991년 평균시청률 59.6%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김수현 작가의 MBC주말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45세의 나이로 20대 중후반 딸들을 둔 엄마 역으로 등장한 이후에는 다양한 엄마 역할을 소화하며 시청자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그러나 ‘국민엄마’로 불리는 보편적 어머니상은 그를 통해 개성적이고 독특한 엄마로 변모된다.
영화계로 돌아와 물 만난 물고기
2016년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박카스 할머니 역할을 맡은 윤여정. [CGV아트하우스 제공]
2005년 일일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에서는 파격적으로 70대 할머니 역을 맡아 백발의 촌로로 등장했다. 만 58세 때였다. 당시 그는 “엄마 캐릭터는 주인공이 들어오면 밥 먹었냐고 묻고, 자식 결혼 반대하는 것이 전부다”고 인터뷰했다.
영화와 TV드라마를 활발하게 오고가던 그는 2010년 영화 ‘하녀’에 출연했다. 윤여정을 영화에 데뷔시킨 김기영 감독의 동명영화를 리메이크했는데, 당시 임상수 감독은 원작에도 없던 나이 많은 하녀를 등장시켰다. 윤여정을 염두해 둔 감독의 한수였다. 이 영화로 윤여정은 춘사대상영화제, 부일영화상, 대종상, 대한민국 영화대상에 이어 청룡영화상까지 여우조연상을 모두 싹쓸이했다. ‘하녀’와 2012년작 ‘돈의 맛’으로 윤여정은 연이어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다.
윤여정은 2016년 개봉한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를 통해 다시 과감한 도전을 감행한다. 경기 동두천 미군부대 양공주 출신으로 서울 종로일대에서 활동하는 일명 ‘박카스 아줌마’ 윤소영 역할을 맡아 성매매 노인여성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연기했다. 그의 열연에 힘입어 이 영화는 그동안 사회적으로 침묵했던 노인의 성과 빈곤이라는 사회문제를 수면위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말미에 경찰에 연행되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여기서 살기도 힘든데 교도소에 가면 세끼 밥은 잘 나오겠네”라는 대사는 압권이었다. 그의 연기는 과장이 없고 간결해 지루하지 않는 긴 여운을 남긴다.
미국인에게 선사한 윤여정표 미나리
영화 ‘미나리’ 스틸컷. [판시네마 제공]
윤여정은 농장을 이루기 위해 남부 아칸소로 이주한 30대 부부를 찾아온 한국의 친정엄마 순자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윤여정만 미국정서에 비켜나간다. 손자 데이비드는 처음 보는 한국 할머니가 미국 할머니들과 달라 불만이다. 손자는 할머니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지만 무조건 자신을 믿어주고 받아주는 할머니의 사랑에 든든해한다. 순자는 가족들을 위해 한국에서 미나리 씨앗을 가져와 산기슭 냇가 부근에 심는다. 미나리는 잡초처럼 척박한 땅에서도 적응하며 뿌리내린다. 정이삭 감독은 미국에는 생소한 미나리를 통해 버거운 삶 속에서도 놓치지 않는 이민가족의 희망을 보여준다. 돌이켜보면 그는 미나리 같이 새로운 곳을 찾아 강인하게 적응했다. 그녀의 강인한 미나리 같은 삶이 연기로 승화돼 영화 속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빛을 발한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