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심각할수록 매뉴얼 지켜야
권력이 아무나 찍어 범인 몰아붙일지도
도덕·정의 독점하고 절차·규정 무시
불붙은 식용유에 물 끼얹는 꼴
개혁 허울 ‘이니 뜻대로’ 나라 운영
소방관? 민주주의·법치주의에 불지른 격
2020년 12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 처리 등을 위한 본회의에서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의힘 의원석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그 옆은 김남국 의원.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무슨 소리일까?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을 불법으로 출국금지했다는 혐의로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이 기소된 건을 두고,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5월 12일 방송에서 한 말이다.
듣자마자 의아한 기분이 든다. 정말인가? 과연 그럴까? 산불이 났다면 절차고 뭐고 무시하고 일단 불부터 꺼야 하는 걸까? 절차를 안 밟으면서 달려들면 산불을 끄는 데 도움이 될까?
그냥 비유일 뿐인데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등을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지론을 떠올려보자.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언어는 수많은 비유, 은유,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급한 불이 나면 아무렇게나 꺼도 된다는 은유를 굳이 검토해야할 까닭이다.
2019년 5월 16일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동아DB]
‘의사 결정 마비 현상’
터널에서 새까맣고 짙은 연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운전자들이 버리고 간 차 때문에 소방차는 터널 내로 진입할 수 없다. 터널 벽에서 콘크리트가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구조적 안정성이 훼손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경찰의 말에 따르면 이 폭발의 원인은 사제폭탄. 즉 테러다. 터널 안에는 30여명 이상의 부상자가 남아 있고, 소방대원들이 진입하여 구조 작업이 한창이다.그런데 경찰로부터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 전해져 온다. 터널 안에 첫 번째 폭탄보다 더 큰 폭탄이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폭탄은 15분에서 20분 사이에 터질 것으로 예상된다. 터널 내에는 구조대원 20명, 민간인 부상자는 최소 30명 가량 남아 있다. 하지만 부상자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적어도 90분이 필요하다. 현장 지휘자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실제로 벌어진 사건은 아니다. ‘의사 결정 마비 현상’(decision inertia)을 연구하는 조너선 크레고 교수가 영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여성 소방관인 사브리나 코헨-해턴에게 던진 질문이다. 의사 결정 마비 현상을 일부러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낸 최악의 딜레마인데, 같이 고민해보자.
만약 지금 모든 인력을 총동원하면 부상자를 최대한 많이 구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구조 작업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 구조대원들이 갇히거나 죽는다. 구조 대상이 줄어들기는커녕 20명 더 늘어난다는 뜻이다. 반대로 구조하지 않는 선택을 한 경우, 20명의 소방대원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겠지만 30여명 혹은 그 이상이 될지 모르는 민간인의 생명은 포기하는 셈이다.
애초에 남을 돕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소방관의 길을 걷는다. 그들은 위험을 보면 달려들도록 훈련받았다. 지휘관이 아무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점점 더 많은 인원들이 터널로 뛰어들어 결국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휘관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사브리나의 결정은 전원 철수. 이유는 분명하다.
“의사 결정 마비 현상에 굴복하는 것이야말로 단연 최악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소방관은 남의 생명을 구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더욱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 남을 도와야 한다는 인간 본연의 이타심과 소방관으로서 훈련된 태도를 이겨내고, 때로는 냉혹한 이성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장을 아수라장 만드는 것”
이 내용은 사브리나 코헨-해턴의 책 ‘소방관의 선택’에 소개돼 있다. 그의 이력은 실로 이채롭다. 영국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여성 소방관인 그는, 아버지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뜬 후 방황하며 2년간 노숙자 생활을 했다. 그러다 ‘내가 남의 도움을 받는 만큼 나도 남을 돕고 싶다’는 일념 하에 다시 공부해 대학 입학 자격을 얻었고 시험을 거쳐 소방관이 됐다. 약 20년간 소방관으로 일하며 다양한 화재 뿐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테러 공격, 홀본 지하 터널 화재 등 여러 대형 사건을 지휘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한국이나 영국이나 소방관이라는 직종은 남자들이 주를 이루는 곳이다. 키 155cm, 체중 48kg에 지나지 않는 왜소한 여성인 그로서는 동료들에게 존중을 얻어내고 한 사람의 몫을 해내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운동할 뿐 아니라, 더 치열하게 머리를 쓰며 재난과 맞서왔다는 뜻이다.
사방팔방에서 불꽃이 솟아오르고, 누군가의 생명이 위기에 빠져 있으며, 자칫하면 본인이나 동료의 목숨마저 위험해지는 상황. 소방관은 늘 그런 곳에서 일한다. 긴급 상황에서의 의사 결정과 지휘 기술이 절실하지만, 그 누구도 소방관을 중심에 두고 그런 연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코헨-해턴은 발견했다.
그는 소방관으로서 격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고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코헨-해턴은 자신의 연구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 연구는 우리(소방 구조 서비스)가 어떻게 준비시켜야 소방관이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처하게 되는 극도로 불리한 환경에서 적절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또한 인적 오류가 생길 수 있는 확률을 줄이기 위해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크레고 교수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의 생사가 오가는 화재 현장에서는 지휘관의 말을 듣지 않는 소방관이 늘 나오게 마련이다. 더 나쁜 것은 그 명령 불복종의 내용이다. 벌써 30분 째 발목이 차에 깔린 아홉 살짜리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던 맷 카네기라는 대원이 터널 밖으로 나오기는커녕 절단기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남은 시간은 7분. 아니, 6분. 견디다 못한 사브리나는 소리를 지른다.
“내가 절단기를 가지고 들어가겠어요, 내가 모든 걸 감당하겠어요!”
그러자 조너선 크레고 교수가 사브리나를 꾸짖는다.
“비겁해! 더 배짱이 있는 줄 알았는데! 직접 들어간다고요?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겠다는 거군요. 지휘관이 떠나버리면 어떻게 되죠? 누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현장 지휘를 할 거죠? 당신을 말리기 위해 따라 들어가서 같이 죽는 사람들도 생길 텐데요? 폭탄이 터져요. 그러면 가브리엘라는 엄마를 잃고 마이크는 아내를 잃는 거죠. 사망자만 더 늘어났네요. 당신이 사람들을 살리려고 애쓰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늘리는군요!”
사브리나 코헨-해턴은 현직 소방관이자 심리학자로서 소방관들이 현장에서 의사결정을 내리고 반응하는 방식을 데이터로 수집하고 분석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동시에 이런 잔인한 시나리오를 만들고 소방관을 상대로 교육해왔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고도로 훈련된 소방관이라 해도 현장에서는 이성보다 감성, 정보보다 육감에 의존하여 행동할 때가 많았다.
감성과 육감 그 자체가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순간의 판단으로 자신과 동료, 구조 대상자의 생사가 오가는 현장에서는 스스로를 믿으며 빠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성과 육감을 검증하지 않고 오직 그것만을 의사결정의 근거로 삼아왔던 기존의 소방 현장에서 ‘의사 결정 마비 현상’은 예상보다 훨씬 자주 벌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치명적인 손실로 이어질 때가 적지 않았다.
산불 났으니 절차 지킬 필요 없다?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 보자. 정청래 의원이 말한 ‘산불 비유’가 왜 잘못되었는지, 이제 우리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산불이 났으니 절차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소방관들이 맞닥뜨리는 재난의 현장은 정 반대다. 재난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훈련된 바에 따라 매뉴얼을 지키면서 행동해야 한다. 만약의 사태, 상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바로 그런 만약의 사태, 상상치 못할 것 같은 일도 염두에 둬서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대원들을 숙지시키는 것이 지휘관의 임무다.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훈련처럼.산불이 났으니 절차고 뭐고 무시하고 달려들자. 그 어떤 분야에서도 프로페셔널한 사람이라면 할 소리가 아니다. 소방관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구조 대상자가 더 늘어날 뿐이다. 경찰관이 범인을 잡겠다고 무작정 덤벼들다보면 경찰 스스로 법을 어기게 되고, 범죄자를 체포한다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 묶어서 바느질을 할 수는 없다. 적은 기관총을 설치해놓고 기다리는데 ‘돌격 앞으로!’만 외친다고 해서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하게 되는 범죄 수사 및 형사 재판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지난번 ‘뷰파인더’ 원고에서 다루었던 미란다 원칙이 바로 그 중요한 사례다. 에른스트 미란다는 강간범이었고, 심지어 그 사실을 경찰서에서 자기 입으로 진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미란다에게 제대로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경찰과 검찰은 다른 방향에서 증거를 수집해 미란다를 다시 기소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범죄 혐의가 있다고 해서 법과 절차를 무시해가며 기본권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 당장은 빠르게 범죄자를 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법에 대한 국민의 존중심이 사라진다. 권력을 지닌 자가 아무나 찍어서 범인으로 몰아붙이는 법의 탈을 쓴 독재 천국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산불이 났다고 해서 절차를 지키지 않고 아무나 양동이를 들고 산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 죽는다는 말이다.
‘일단 불 끄고 보자’에 나라 쑥대밭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사진)이 대검찰청 반부패강력부장으로 재직하던 2019년 안양지청 검사들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 대한 불법 출국금지 의혹 수사를 방해한 혐의로 5월 12일 기소됐다. 사진은 그가 2020년 10월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출석한 모습. [동아DB]
그래서 과연 나라가 잘 굴러가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불을 끄고 보자’는 식으로 달려든 덕분에 온 나라가 쑥대밭이 돼있다. 현 정권의 가장 큰 실패로 꼽히는 부동산 정책만 봐도 그렇다. 지금까지 25회인지, 26회인지, 숫자가 혼동될 정도로 많은 대책이 등장했지만 그럴 때마다 집값은 잡히지 않고 반대로 뛰어올랐다. 처음부터 야당의 반대에도 귀를 기울이고, 시장의 동향을 살펴가며 정책을 수립했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은 기록적인 집값 폭등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식용유에 불이 붙은 상황을 떠올려보자. 적잖은 경우 사람들은 급한 마음에 가까이 있는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끼얹는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물이 기화되면서 불붙은 기름을 사방에 튀게 하여 불이 더 빨리 퍼지게 하기 때문이다. 분말소화기를 이용하거나 침착하게 대피하면서 신고해야 한다.
정청래 의원과 민주당, 청와대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어리석은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부동산 가격 상승을 막고 싶다면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공급을 늘리겠다는 확고한 시그널을 시장에 보내야 한다. 가스불은 잠그고 분말소화기를 써야 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청와대는 계속 물만 끼얹으면서 ‘왜 부동산 값이 떨어지지 않는가, 이것은 투기 세력 때문 아닌가’라는 식으로 국민을 향해 되묻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 2월 18일, 2021년 1월 18일, 2021년 4월 13일 연이어 ‘특단의 대책’을 요구했지만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검찰개혁’도 산으로 가버린 지 오래다. 피의자 신분에서 벗어나 민간인이 된 사람을 상대로 긴급 출국금지를 하려다보니 법과 정의의 수호자인 대한민국 검사가 공문서를 위조 내지 허위발급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 아닌가. 언론을 통해 공개된 이성윤 지검장에 대한 공소장에 따르면 이 건은 조국 당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민심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이쯤 되면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묻고 싶어진다. 정청래 의원이 말한 ‘산불’이 대체 정확히 무엇인가? 어쩌면 김학의 사건을 뜻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3월 18일, 김 전 차관 건에 대해 검찰과 경찰을 향해 “조직의 명운을 걸고 철저히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이 사건은 흔히 말하는 ‘VIP 관심 사안’이 됐다. 그렇다면 검찰 내 청와대 충성 세력과 여당으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 혹은 꼬리에 불이 붙은 송아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법도 하다. 그런 초조함과 불안감이 무려 2년여 후에도 남아 ‘산불’ 발언으로 드러나게 됐던 것은 아닐까.
그 내막을 우리가 모두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정청래 의원이 말한 ‘산불’은 전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현직 검사가 공문서 위조 혹은 그와 유사한 범죄를 저질렀고, 서울중앙지검장이 그것을 무마해주기 위해 애를 썼으며, 그 과정에서 청와대 민정수석과 대화가 오갔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본인들은 산불을 끄기 위해 달려드는 용감한 소방관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더 큰 불을 지르는 방화범이 아닌지 의혹의 눈길을 거둘 수 없다.
촛불시위에 나온 사람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한 80% 이상의 국민들이 바라던 것은 단 하나였다. 비선실세 없는 세상. 누군가의 자의적 판단이나 입김이 아니라 합리적인 시스템과 규칙에 의해 돌아가는 예측 가능한 사회. 그런 범국민적 합의에 의해 우리는 헌정사 최초로 대통령 탄핵을 이루어냈다. 민심의 불길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바람이 바뀌면, 청와대를 향해 또 한 번 뜨거운 불꽃이 타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