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튀는 美·蘇 手싸움 ‘첩보 전쟁’
윈의 활약으로 ‘쿠바 미사일’ 알아차린 美
어느 날 보험판매원 코헨에게 찾아온 손님
3차 중동전쟁 완승한 이스라엘 뒤에는…
TV로 생방송된 어느 첩보원의 죽음
영화 ‘더 스파이’ 스틸컷(위).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더 스파이’ 스틸컷. [the Sundance Film Festival 제공, 넷플릭스 제공]
스파이들이 등장하는 첩보영화는 스펙터클한 장면이나 오싹한 스릴러 장면은 없어도 긴박한 구성을 전개한다.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을 오가며 관객들은 조마조마해한다. 영화 속 스파이들은 가상의 인물이 많다. 음지에서 활동하고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스파이의 신분이 노출될 때는 보통 조국을 배신하고 적과 내통했거나, 적에게 발각돼 비극적 말로를 맞았을 경우다. 상황이 이러하니 신념을 가진 스파이는 호가호위하며 무탈하게 살기는 쉽지 않다.
불꽃 튀는 美·蘇 手싸움 ‘첩보 전쟁’
영화 ‘더 스파이’ 포스터(아래)와 스틸컷. [the Sundance Film Festival 제공, TCO㈜더콘텐츠온 제공]
2020년 제작돼 4월 28일 개봉한 영화 ‘더 스파이’의 원래 제목은 ‘더 커리어(The Courier)’이지만 우리나라에서만 ‘더 스파이’라고 달았다 영화는 전설적인 스파이 올레크 펜콥스키(메랍 니니트쩨 분)의 활약이 중심이 아니라, 소련 스파이가 전해 주는 첩보를 서방에 전달하는 운반자인 영국인 사업가 그레빌 윈(베네딕트 컴버배치 분) 이야기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1960년 냉전시대 국제관계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반부터 미국과 소련은 전후 동유럽 체제와 원자력 관리 문제를 두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세계 지형은 미소 두 강대국 중심으로 재편됐다. 1950년대는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진 대립 시기로 일촉즉발의 시한폭탄이었다.
이른바 냉전 시기는 1950년대에 이어 1960년대에도 계속됐다. 속고 속이는 스파이들이 수집한 첩보로 각 진영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수(手)싸움에 사활을 걸었다. 극비 정보의 유출을 막기 위한 내부 단속과 외부 감찰이 만만치 않다 보니 스파이들은 금세 색출됐다. 양 진영 모두에게 상대의 경계를 풀 수 있는 확실한 인물이 절실했다. 이 시기 스파이들은 비밀 유지를 위해 영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처럼 팀으로 활동하기보다는 각자도생했고, 신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1960년 7월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믿기 힘든 최대어가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 소련군 총참모부 정보총국(GRU) 대령인 올레크 펜콥스키(1919~1963)가 자진해서 접촉을 타진해 온 것. CIA는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낀 엘리트 장교의 일탈이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 소련의 비밀경찰(KGB)의 음모라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한데 그가 전해 주는 알짜 1급 정보 덕분에 난공불락으로 여겨온 GRU의 암호체계까지 해독하게 되자 CIA는 하루빨리 그를 만나 더 많은 1급 정보를 전달받으려 안달이 났다. 마땅한 인물을 찾아 영국의 비밀정보국(MI-6)과 공조하던 CIA는 딱 들어맞는 ‘접선책’을 찾아낸다. 충실한 런던시민으로 한 집안의 가장인 그레빌 윈(1919~1990)이었다.
윈의 활약으로 ‘쿠바 미사일’ 알아차린 美
영국인 사업가 그레빌 윈의 실제 모습. [GettyImage]
1919년생 동갑내기 찰떡궁합 소련인과 영국인이 서방세계에 보내온 정보는 5000페이지가 넘는 ‘역대급’ 극비 문서였다. 일당백의 성과였다. 그 중 쿠바 미사일과 관련한 문서는 핵전쟁 위기일발 상황을 직시시키는 귀중한 정보였다.
1959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고 미국과 맺은 동맹을 파기했다. 미국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스트로는 재빨리 소련에 손을 내밀었고 소련은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소련은 미국을 옥죄기 위해 미국 플로리다에서 뱃길로 겨우 150km 떨어져 있는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세우고 있었다. 미국의 코앞에 핵미사일을 구축할 심산이었다.
미국은 영국인 윈에 의해 전해진 펜콥스키의 문서를 통해 이 사실을 감지했다. 허를 찔린 미국은 정찰기를 보내고 나서야 소련의 야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KGB의 낌새를 포착한 MI-6는 윈의 소련행을 만류했지만 윈은 펜콥스키를 외면할 수 없었다. 펜콥스키를 탈출시킬 방도를 찾아 호랑이굴로 들어간 윈은 펜콥스키와 함께 1962년 10월 22일 체포됐다. 이는 쿠바 미사일 기지 문제로 소련에 대한 전면적인 경고와 해상봉쇄를 선언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이 있기 바로 몇 시간 전이었다. 윈은 1963년 5월 11일 스파이 혐의로 징역 8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펜콥스키는 간첩죄와 반역죄로 총살당했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루브얀카 수용소에서 복역하던 윈은 1964년 영국과 소련의 맞교환 협상으로 석방됐다. 수용소 생활이 얼마나 가혹한 환경이었는지는 윈 역할을 맡은 배우 컴버배치의 빠짝 마른 모습과 우수에 찬 표정이 잘 대변해 준다.
1978년 영국으로 망명한 전 GRU 국장 빅토르 수보로프는 후일 그의 저서에서 “올레크 펜콥스키의 이름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입니다. 그의 귀중한 정보 덕분에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촉발되지 않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소련의 핵전력을 얕잡아보고 안일하게 대처했던 미국은 펜콥스키-윈의 첩보 덕분에 실상을 알아차리고 소련의 야욕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극 연출가 출신의 도미닉 쿡(55) 감독은 극박한 상황에서의 인물 심리에 중점을 두고 감정 연기를 담백하고 간결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화려한 추격 액션이 나오는 첩보영화를 생각하고 관람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시각각 변하는 두 인물의 표정과 애잔한 명대사를 곱씹으면서 시대의 아픔을 들여다보면 관객은 깊은 사색에 빠진다. “우린 겨우 두 사람이지만 세상은 이렇게 바뀌는 거야.”
냉전시대, 또 다른 화약고였던 중동으로 넘어가 보자. 19세기 후반부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유대민족주의운동(시오니즘)을 펼치며 자신들의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럽 각지의 오갈 데가 없는 유대인의 이주가 시작됐고, 토착민인 아랍인들과의 크고 작은 유혈분쟁도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보험판매원 코헨에게 찾아온 손님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더 스파이’ 포스터(위)와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이스라엘로 돌아온 열렬한 민족주의자 코헨(샤샤 베런 코언 분)은 군에 입대해 방첩대 분석관으로 일한다. 이집트에서의 경험을 살려 국가에 한 몸 바치겠다는 애국심에 불탄 코헨은 모사드(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로 전출을 신청한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 실의에 빠진 코헨은 제대하고 당시 이스라엘의 임시수도였던 텔아비브에 있는 보험회사에서 근무한다. 곧이어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도 꾸리고 오손도손 가족들과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1959년 느닷없이 그에게 미지의 손님이 찾아온다.
당시 이스라엘은 사방에 적들로 둘러싸여 한시도 맘 편히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모사드는 아예 주변국별로 목표를 정해 집중공략하는 조직적인 비밀첩보활동을 강구한다. 능력이 출중한 팔방미인 요원을 양성해 상황에 맞게 첩보활동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공작 캐릭터를 미리 정해 놓고 그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특수공작요원을 양성해야 했다. 1950년대 이스라엘에서 이러한 인물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서류다발을 아무리 뒤지고 뒤져도 적임자는 코헨뿐이었다. 예전에는 고배를 마셨지만 다시 찾아온 기회는 놓치지 않았다. 코헨은 시리아 고위층에 자연스럽게 잠입할 수 있도록 돈 많은 카사노바에 친화력을 겸비한 갑부로 탈바꿈했다.
6개월간의 집중 과정을 이수하고 신분 세탁을 위해 스위스를 거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정착한다. 능수능란하게 ‘카말 아민 타베트’라는 시리아인으로 깜짝 변신한 코헨은 주변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며 시리아 교민사회의 ‘셀럽’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아르헨티나 대사관 인맥으로 1962년 1월 시리아 본국에 진출한 뒤 스파이활동이 시작됐다. 매일 향락의 파티를 열고는 시리아를 좌지우지하는 정계·재계·군부의 최상위층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었고, 극비 사안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았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척하면서도 고스란히 정보를 기억해 내고 본국에 무전을 보내면 다음 날 이스라엘에서는 대책회의를 열었다.
엘리 코헨(왼쪽)과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더 스파이’ 스틸컷. [위키피디아, 넷플릭스 제공]
3차 중동전쟁 완승한 이스라엘 뒤에는…
특히 돈독한 군 장성들과의 인맥으로 그는 이스라엘과 맞닿은 시리아 국경지역 골란고원에 직접 초청받았다. 이곳은 민간인 출입통제지역이자 군사 요새로 이스라엘은 골란고원 정보가 전무했다. 그는 무심하게 주변을 스치는 듯 관광했지만 구석구석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완벽히 스캔해 조국에 보고했다. 특히 부대 위치, 군사시설 내부 설계, 조종사 명단 등은 1967년 이스라엘이 제3차 중동전쟁에서 시리아를 단숨에 격파하는 데 절대적인 정보가 됐다. 코헨의 정보로 이스라엘에 편입된 골란고원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요충지가 됐다.점점 불안한 그림자를 느끼던 코헨은 임무를 끝내고 싶었지만 코헨의 알짜정보가 더 필요했던 모사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가 시리아에 잠입한지 만 3년 만인 1965년 1월에 의심스러운 전파 송출 진원지를 찾던 시리아 정보국에 의해 그의 아파트는 급습당한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그의 신분에 경악한 시리아 수뇌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모욕적이고 참혹한 고문 속에서도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고, 거짓 정보를 전송하라는 시리아의 요구도 의연하게 거절했다. 이스라엘도 백방으로 구명운동을 펼쳤으나 시리아의 분노를 가라앉히기에는 턱도 없었다. 시리아 정부는 극에 달한 시리아 국민을 달래기 위해 그의 사형 집행을 생방송으로 중계했고, 유해라도 송환해 달라는 코헨 부인의 눈물 어린 호소에도 시리아 당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의 유해는 어디에 묻혔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스라엘은 ‘아픈 영웅’ 코헨의 유해발굴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국에 그는 단순히 국가의 비밀첩보원이 아니라 난세에 나라를 구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더스파이 #첩보영화 #황승경 #신동아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