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는 중국 탓” 트럼프가 불붙인 도화선
이민 금지에 경제적 탄압까지
우수한 ‘모범 소수민족’이자 ‘영원한 이방인’
아시아계 혐오 첫 청문회…차별의 역사 끊나
3월 20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에서 아시아계 증오범죄를 규탄하는 시민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시스]
애틀랜타 총기 사건 이후에도 미국 전역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발생했다. 3월 26일(현지 시간) 필리핀 여성이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흑인 남성에게 폭행을 당했다. 4월 11일(현지 시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한국계 10대 여성이 한 남성에게 성추행과 폭언을 당하기도 했다. 피해자는 이후 자신의 SNS에 “내가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3시간 동안 성적 발언으로 공격했다”는 내용의 글을 게시했다.
정치권에서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4월 22일(현지 시간) 미국 상원에서 ‘아시아계 증오범죄 방지법’이 통과됐다. 하지만 법이 통과된 다음 날인 23일에도 미국 뉴욕에서 한 중국계 남성이 거리를 걷다 괴한의 무차별 공격을 당해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이어 발생하는 아시아계 증오범죄의 원인은 무엇일까.
“코로나는 중국 탓” 트럼프가 불붙인 증오의 도화선
반(反)아시안 증오범죄가 급증한 직접적인 원인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시작된 지난해 2월부터 트럼프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마다 이 질병을 공식 명칭인 ‘코로나19’ 대신 ‘쿵 플루(Kung-flu)’ ‘차이나 바이러스(China virus)’라고 지칭했다. 쿵 플루는 중국 무예 쿵푸(Kung fu)와 감기(flu)의 합성어다. 지난 1년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줄곧 코로나19 팬데믹(전세계 대유행) 주범으로 중국을 지목하면서 미국 내 반(反)아시안 정서가 크게 고조됐고, 이에 자극받은 미국인들이 범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여기에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백인 우월주의를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발언을 계속해 왔다. 2017년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백인 우월주의 시위대가 반(反)인종주의 시위대에 폭력을 행사하자 그는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다”고 말했고,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무장 폭력도 괜찮다는 일종의 시그널을 보내기도 했다.
1월 6일(현지 시간) 발생한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 난입 사태는 그 결과로 볼 수 있다. 트럼프 지지자 8000여 명은 조 바이든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당선 확정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DC 연방의회 앞에 집결했고, 일부 시위대가 연방의회 의사당에 난입하는 과정에서 4명이 사망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자들을 향해 트위터에서 “‘나쁜 사람들’에 대항해 열심히 싸워라” “의회에 힘을 보태줘라” 등의 트위터 게시글을 작성해 의사당 난입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이어갔다.
사실, 인종범죄에 대해 부적절한 태도를 보인 미국 공직자는 트럼프 전 대통령 외에도 많다. 애틀랜타 총기 난사 사건 발생 다음 날, 해당 총격으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애틀랜타 체로키카운티 보안관실의 제이 베이커 대변인은 총기 난사 가해자를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완전히 지쳤고 막다른 지점에 있다. 어제는 그에게 가장 나쁜 날이었다”는 베이커 대변인 논평은 범죄자의 행동을 이해하는 듯하게 들렸다. 이후 베이커 대변인이 과거 코로나19와 관련해 중국을 비난하는 내용이 적힌 티셔츠 이미지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물론 아시아인 증오범죄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의 역사는 생각보다 매우 길다. 미국인 대부분은 이민자 비율이 높은 캘리포니아주에서 오랫동안 반(反)아시안 정서가 지배적이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 아시아계 차별의 역사
1886년 한 미국 세탁기 업체의 광고 만화. 미국을 상징하는 엉클 샘(Uncle Sam)이 중국인 남자를 발로 공격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위키피디아]
아시아인은 오랫동안 미국 시민권을 획득할 자격조차 갖지 못했다. 1790년 제정된 귀화법(Nationalization Act of 1970)은 백인만 미국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못 박았고, 한국인·일본인 이민자는 1952년이 돼서야 미국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탄압받았다. 1913년 캘리포니아주 의회는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을 제정해 아시아계 이민자가 토지를 구입하거나 임대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했다. 일상에서도 아시아계 이민자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당했다. 특히 흑인 인구가 적었던 미국 서부에서 아시아인 이민자는 ‘2등 시민’ 취급을 당했다. 1960년대 식당 입구에는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문구가 붙어 있는 사진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1970년대에는 아시아계 미국인은 소수인종 간 갈등을 부추기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언론에서 ‘모범 소수민족(model minority)’으로 불렸다. 소수인종 중 아시아계 미국인이 본받을 만한 대상이라는 의미다. 언론은 아시아계 이민자의 사회경제적 성공을 흑인·라틴계의 높은 빈곤·범죄율과 자주 비교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백인 우월주의자로부터는 배제의 대상이 되고 흑인과 라틴계로부터도 위협의 대상이 되는 지위에 놓이게 됐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반아시안 증오범죄 가해자 중 일부가 흑인과 라틴계라는 사실은 백인 우월주의가 만들어낸 모범 소수민족 개념이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할 수 있다.
지금도 미국에서 아시아계 이민자는 ‘영원한 이방인(perpetual foreigner)’ 취급을 받는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인 2세와 3세도 종종 “어디서 왔니(Where are you from)?”라는 질문을 받는다. 미국인이 아닐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아시아계 미국인이 증오범죄 대상이 되는 것도 ‘모범시민’이자 ‘영원한 이방인’으로 불리는 역사적 편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다행히 지난 1년간 미국 내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BLM(Black Lives Matter·흑인 목숨은 소중하다)’ 시위로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이 제고됐고, 미국 연방의회 의사당 난입 사건으로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대책을 시급하게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었다.
달라진 분위기…아시아계 정치력 향상이 한몫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는 자체적으로 범죄 대응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3월 아시아계 권리 단체인 ‘스톱 AAPI(Asian American Pacific Islander) 헤이트’가 설립돼 증오범죄 사건을 추적하고 있고, 주류 언론에서도 반아시안 증오범죄의 심각성을 인지하면서 관련 문제를 적극 보도하고 있다.아시안 커뮤니티의 정치력 향상으로 정치권에서도 아시아계 혐오가 주요 의제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3월 18일(현지 시간) 연방하원에서 30년 만에 아시아계 미국인의 차별과 폭력에 대해 다루는 청문회가 열렸다. 아시아계 미국인 지식인과 유명 인사들도 기고와 인터뷰를 통해 반아시안 증오범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 백신이 활발히 보급돼 코로나19 확산이 줄어들면 반아시안 증오범죄도 감소 추세로 접어들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증오범죄와 인종차별의 근본적인 원인은 백인 우월주의에 근거한 역사적 맥락에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방지책을 마련할 것을 정치권에 주문해야 차별과 배제의 역사를 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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