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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논리에 ‘인간’은 없다

[황승경의 Into the Arte] 영화 ‘장교와 스파이’

  • 황승경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진영 논리에 ‘인간’은 없다

  • 나라가 두 진영으로 쪼개졌다. 회색 없이 나뉜 흑과 백은 각자의 정의(正義)를 부르짖으며 상대를 힐난한다. 어느 것이 진정한 정의인지는 알 수 없다. 오직 자신이 그렇다고 여기는 것을 믿을 뿐. 맹신되는 정의(正義) 앞에 ‘인간’의 정의(定義)란 사막 위 신기루와 같이 허무하다.
프랑스군 최초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앞줄 안경 쓴 사람)는 ‘파나마 스캔들’을 덮기 위한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 [찬란]

프랑스군 최초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앞줄 안경 쓴 사람)는 ‘파나마 스캔들’을 덮기 위한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 [찬란]

20대 대통령선거 투표율은 77.1%다. 흔히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 본다’고 한다. ‘비호감 대선’이라는 비웃음을 사면서도 국민의 관심은 뜨거웠다. 대통령직 인수 기간을 거친 후 새로운 정권이 출범한다.

정치사를 곱씹어 봤다. 지금과 같은 시기엔 항상 선동가가 등장했다. 상대 후보 지지자의 아픈 감정을 자극하는 선동은 국민을 분열시키는 악(惡)이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례로 에밀 졸라(1840~1902)의 글 ‘나는 고발한다(J'accuse!)’를 꼽을 수 있다. ‘나는 고발한다’는 정치 국면 전환을 위한 희생양으로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린 공개 고발장이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에밀 졸라의 문학작품은 여러 차례 영화화됐지만 그의 고발장을 심도 있게 다룬 영화는 ‘에밀 졸라의 생애’(1937)와 ‘장교와 스파이’(2019) 정도다. ‘에밀 졸라의 생애’가 작가의 인생에 초점을 맞췄다면 ‘장교와 스파이’는 내부 고발인 조르주 피카드 중령의 시각을 중심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장교와 스파이’는 프랑스인 로만 폴란스키(89) 감독의 작품이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독일군 치하 게토(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는 등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범죄로 잃은 피해 유가족이다. 그의 아내 샤론 테이트는 찰스 맨슨을 추종하는 광신도들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됐다. 그렇다고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볼 인물은 아니다. 1974년 술과 약물을 이용해 13세 소녀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도중 프랑스로 도피한 미성년자 성범죄자다.

‘드레퓌스 사건’만큼 논란 많은 영화

영화 ‘장교와 스파이’ 포스터 [찬란]

영화 ‘장교와 스파이’ 포스터 [찬란]

신기하게도 과거 그에 대한 영화계의 시각은 호의적이었다. 2002년 그의 영화 ‘피아니스트’가 아카데미상 3관왕에 오를 때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2009년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서 ‘미성년자 강간혐의’로 체포돼 10개월간 현지에서 가택연금 당했을 땐 더했다. 틸다 스윈튼, 모니카 벨루치 등 ‘여배우’들이 석방을 탄원하기까지 했다.



2017년 ‘미투 운동’이 유행하고 나서야 그에 대한 옹호론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죽기 전에 역사의 그림자를 스크린에 담겠다’는 노감독의 노고(勞苦)가 노욕(老慾)으로 비쳤다.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로 영화 제작에 난항을 겪었다. 아내 에마뉘엘 자이그너(56)를 출연시키고 본인도 단역을 맡는 열정을 보였지만 평가는 비난 일색이었다.

2020년 세자르 영화제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장교와 스파이’는 ‘영화는 영화로만 봐야 한다’는 견해와 ‘예술가의 윤리의식도 중요하다’는 의견을 첨예하게 대립시켰다. 세자르 영화제에서 끝내 폴란스키에게 감독상이 수여되자 다수 영화인은 고성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122년이라는 간극이 있지만 영화 속 드레퓌스 사건처럼 영화도 논란의 중심에 섰다.

흑막은 ‘혐오’를 이용한다

로로르 신문 1면에 게재된 ‘나는 고발한다(J'accuse!)’는 드레퓌스, 피카르 등 ‘드레퓌스 사건’ 관련 인물을 정치 공방 한가운데 서게 했다.  [찬란]

로로르 신문 1면에 게재된 ‘나는 고발한다(J'accuse!)’는 드레퓌스, 피카르 등 ‘드레퓌스 사건’ 관련 인물을 정치 공방 한가운데 서게 했다. [찬란]

프랑스인은 역사의 페이지에 ‘프랑스혁명’을 남긴 민족이다. 그만큼 의사와 감정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15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870년 보불전쟁 패전으로 프랑스군이 본 피해는 막대했다. 사상자만 30여만 명에 이르렀고 독일로 이송된 전쟁포로는 50여만 명에 달했다.

경제도 붕괴됐다. 중공업이 발달해 노른자 땅이었던 알자스-로렌 지역이 프랑크푸르트 종전조약으로 독일에 넘어갔다. 전쟁배상금으로 무려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을 독일에 지불해야 했다. 알퐁스 도데(1840~1897)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이 바로 이 시기 독일어를 국어로 배워야만 하는 알자스 지역 소년의 마지막 국어(프랑스어) 수업에 관한 이야기다. 이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인에게 독일이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였다.

조국이 독일에 일방적으로 패배한 데서 온 치욕은 프랑스인의 가슴에 패배 의식과 폭력성을 싹트게 했다. 이는 프랑스인의 균형 잡힌 비판의식을 점차 약화시켰다. 1892년 폭로된 최악의 정경유착 스캔들, 이른바 ‘파나마 스캔들’이 악순환을 더했다. 이는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 사상이 촉발한 계기다.

파나마 스캔들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유대인 금융자본으로 설립된 프랑스 민간회사가 중앙아메리카의 초대형 공사를 수주했다. 이는 곧 전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가 잇달아 터지며 공사는 중단됐고 회사는 파산했다. 그사이 회사 간부들에게 매수당한 정치인들은 법안을 통과시켰고 무려 6번이나 채권을 발행했다. 눈덩이처럼 켜져버린 손실은 80만 명이 넘는 피해자에게 전가됐다. 피해 금액을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12조5000억 원 수준이다.

알뜰살뜰 모은 재산을 잃은 서민들의 울분은 하늘을 찔렀다. 전방위로 자행된 뇌물 수수에 기성 정치인이 떼로 구속됐다. 악화일로로 치달은 정국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정부는 사태를 진정시킬 무언가가 절실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엔 신문·잡지사가 기하급수적으로 생겨났다. 그중 신문에 등장하는 캐리커처(대상물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거나 일부러 과장해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소수자, 특히 파나마 스캔들 이후 유대인을 겨냥한 수많은 ‘혐오 캐리커처’ 가 삽시간에 퍼졌다. 대중은 여과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거리낌 없이 환호했다. 유대인은 금융 권력을 이용해 온갖 간계와 술수를 부리는 족속으로 여겨졌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혐오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헤게모니 위한 희생양 드레퓌스

피카르 중령은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찬란]

피카르 중령은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찬란]

영화 내용을 살펴보자. 1894년 12월 프랑스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루이 가렐)는 독일 대사관에 군사 정보를 넘겼다(반역죄)는 이유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재판부는 드레퓌스의 필적에서 알파벳 26개 중 단지 2개만이 유출 문건의 그것과 유사함에도 ‘필적을 모사했다’는 황당한 논리를 받아들였다. 드레퓌스 대위는 남아메리카 기아나 앞바다에 위치한 악마의 섬에서 복역한다. 이곳은 1973년 영화 ‘빠삐용’의 배경인 악명 높은 요새다.

한편 참모본부 정보부에 부임한 조르주 피카르 중령(장 뒤자르댕)은 내부첩자 색출 작업을 진행하던 중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적이 드레퓌스 문건의 필적과 같음을 발견한다. 진범이 에스테라지 소령임을 알게 된 것. 피카르는 이를 상부에 보고하지만 모두 묵살된다. 군부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피카르를 튀니지의 한직으로 좌천하고 그와 내연관계에 있던 모니에 부인(에마뉘엘 자이그너)의 안위까지 위협하며 입막음을 시도한다.

드레퓌스는 프랑스군 최초의 유대인 장교로서 충성스러운 애국자였다. 영화에서는 생략됐지만 알자스 지역에서 태어난 드레퓌스는 보불전쟁을 겪으며 조국을 지킬 군인이 되려고 마음먹었다. 이때 그의 나이 10세다. 드레퓌스의 형과 부인은 조직적인 구명운동을 펼치며 에스테라지 소령과 진범의 필체가 언론에 공개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같은 필체를 두고 드레퓌스파와 반(反)드레퓌스파는 각자 다르게 해석하며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는 모든 매체를 동원해 혐오를 담은 이미지와 문구를 주고받으며 국민을 분열시켰다. 드레퓌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탐욕스러운 반인반수(半人半獸)로 묘사한 이미지를 실은 풍자 기사가 파리에 뿌려지면 1주일 후에는 동일한 이미지와 문구로 군부와 반유대주의자들을 조롱하는 비판 기사가 뿌려졌다. 어느새 드레퓌스는 국가 분열의 상징이 됐다.

잠시 피카르 중령에게로 시선을 옮겨보자. 그가 튀니지로 전출돼 떠나기 전의 일이다. 피카르 중령은 지인이었던 변호사 루이 레블르(마티유 아말릭)를 찾아 만약 자신에게 변고가 생기면 드레퓌스는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치권에 밝혀달라고 부탁했다. 진실을 깨닫고 격분한 레블르는 피카르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주변 지식인에게 군부의 만행을 폭로했다.

드레퓌스가 ‘드레퓌스 사건’ 조연이 돼버린 아이러니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진 못했다. ‘드레퓌스 사건’에 드레퓌스는 소외됐다. [찬란]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진 못했다. ‘드레퓌스 사건’에 드레퓌스는 소외됐다. [찬란]

이들 중 언론인 조르주 클레망소(제라르 차일로우)와 소설가 에밀 졸라(앙드레 마르콩)가 있었다. 1898년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를 ‘로로르(L'Aurore)’ 신문 1면에 대문짝만 하게 발표한다. 원래 졸라는 ‘대통령께 고하는 편지’로 다소 부드럽게 제목을 지었는데, 편집장 클레망소가 더 공격적인 것으로 변경했다. 기사는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지만 그만큼 후폭풍도 컸다. 육군 장성, 장관, 필적 전문가, 재판관을 고발한 졸라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피소돼 재판을 받아야 했다. 징역 1년에 벌금 3000프랑이 선고됐다. 목숨을 위협하는 협박도 이어졌다. 결국 졸라는 프랑스를 떠나 망명길에 오른다.

군부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 모든 사안의 근원으로 피카르 중령을 지목하고 그를 체포한다. 재심 요청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자 1899년 6월 군사법정은 재심을 결정하지만 조직적인 은폐·조작으로 드레퓌스에겐 다시 유죄가 선고된다. 모든 증거가 진범으로 지목하는 에스테라지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다시금 온 나라가 서로 물어뜯을 듯 용광로처럼 들끓었다. 재판부는 드레퓌스에게 “유죄만 인정하면 즉각 석방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쇠약해진 드레퓌스는 이를 받아들인다.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사회 분위기를 더는 원치 않던 프랑스의 유대인은 반색했지만 드레퓌스파 정치인·지식인은 격노했다. 드레퓌스가 비록 죽음의 섬에 돌아가서 죽더라도 기약 없는 투쟁을 정의롭게 이어가기를 주장했다. 그들은 드레퓌스보다는 그들이 맹신하는 ‘이념’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변함없이 국가에 충성한 개인의 말로

1899년 여론을 선점한 드레퓌스파는 선거에 승리한다. 1904년 3월 드레퓌스는 새로운 증거를 모아 최고재판소에 재심을 청구하고, 1906년 7월 12일 2차 재심에서 무죄가 입증됐다. 피카르와 드레퓌스는 모두 군에 복직한다. 하지만 피카르만이 온전히 보상받았다. 그는 곧 준장으로 진급하고 같은 해 국방장관으로 입각까지 한다. 드레퓌스는 장관이 된 피카르를 찾아가 “나도 잃어버린 12년에 대한 보상을 받게 해달라”며 진급을 요청하지만 피카르는 이를 묵살한다. 이듬해 드레퓌스는 건강 악화로 복귀 후 채 1년도 되지 않아 제대하고 만다. ‘장교와 스파이’가 다룬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후 드레퓌스와 그 가족의 삶은 어땠을까. 오랫동안 겪은 고초를 보상받았을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드레퓌스는 참전했다. 유대인이기보다 프랑스인으로 남길 바랐기 때문이다. 숭고한 애국심으로 모든 논란을 잠재우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리라. 가족도 일심동체로 그와 함께했다. 간호사였던 아내 루시와 딸 잔느는 군인병원 자원봉사로, 아들 피에르는 포병장교로 입대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전장을 누볐다.

안타깝게도 드레퓌스 가족의 노력은 커질 대로 커진 반유대주의를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그가 조명받으면 받을수록 프랑스 내 반유대주의는 팽배해져만 갔다. 1935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전 세계 언론은 그를 기렸다. 추모의 물결이 커질수록 유대인 혐오는 다시 고조됐다.

1942년 독일군이 파리에 들이닥치자 드레퓌스의 유족은 남부 프랑스로 피신했다. 73세 고령인 루시는 신분을 위조해 수녀원에 은거하다가 파리가 다시 수복되고서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피에르의 가족은 미국으로 가는 배에 겨우 몸을 실어 목숨을 건졌지만 잔느의 가족은 뿔뿔이 헤어졌다. 적십자에서 근무하던 손녀 마들린은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중 체포됐다.

당시 독일군은 프랑스 내 유대인 관련 업무를 샤를 뒤 파티 드 클람에게 일임했다. 그는 ‘나는 고발한다’에서 졸라가 ‘법적 오류를 야기한 악마’로 고발한 아르만 뒤 파티 드 클람 중령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쏙 빼닮아 지독한 반유대주의자였던 그에게선 피도 눈물도 기대할 수 없었다. 드레퓌스가 특별히 귀여워하던 마들린은 창창한 25세 나이에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반면 샤를은 전쟁 기간 요직을 돌며 승승장구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나치 협조자 대숙청 시기에도 용케 무죄 석방되며 살아남았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신동아 2022년 5월호

황승경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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