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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형, 리플 XRP 판결 덕 구사일생?

[잇츠미쿡]

  • 황장석 ‘실리콘밸리 스토리’ 작가·前 동아일보 기자

    surono@naver.com

    입력2023-09-1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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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관에 판 건 증권, 개미에게 판 건 아니다?

    • 블록체인 기술에 76년 된 낡은 기준 적용한 판결

    • 권도형 측 “리플처럼 우리도 증권 판매 아니다”

    • SEC “리플 판결 잘못됐다, 인용 말라” 의견서 제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와 테라폼랩스 권도형 대표. [동아DB]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와 테라폼랩스 권도형 대표. [동아DB]

    7월 13일은 암호화폐(코인) 역사에 두고두고 기록될 날이다. 2년 반 넘게 이어진 리플 XRP 소송의 법원 약식판결이 나왔기 때문. 리플(Ripple Labs Inc.) 회사가 판매한 코인 XRP의 증권성을 둘러싼 소송에서 1심법원이 사실상 리플 측에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 XRP 가격이 순식간에 80% 이상 급등했다. XRP 외에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증권으로 분류해 소송을 제기한 코인들 가격도 일제히 상승했다. 알트코인(통상 비트코인을 제외한 다른 코인)의 증권성 문제와 직결된 코인이자 한국에서 특히 인기 있는 코인, 리플 XRP 판결은 과연 무엇을 남겼을까.

    글로벌 암호화폐 시장에서 특정 코인의 시세, 거래량, 시가총액 같은 정보를 제공하는 업체인 코인마켓캡(CoinMarketCap)에 따르면, 코인 시장의 달러 격인 스테이블코인을 제외할 경우 7월 24일 현재 글로벌 코인 시장에서 거래량(24시간 기준)과 시가총액으로 살펴보면 부동의 1위는 비트코인(BTC)이다. 2위는 이더리움(ETH)이고, 3위는 리플 판결 이후 가격이 급등하고 거래량이 증가한 XRP가 3위로 올라섰다. 리플 판결 전에는 바이낸스거래소코인(BNB)이 3위, XRP는 그다음 순이었다.

    한국서 유독 인기 끄는 리플 XRP

    한국 시장으로 눈을 돌리면 상황은 다르다. 6월 5일 암호화폐 데이터분석업체 카이코(Kaiko)가 낸 자료에 따르면, 2023년 1∼5월 한국의 4대 거래소(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 거래 규모를 기준으로 1위는 비트코인(367억 달러), 2위 XRP(245억 달러)였다. 글로벌 2위 이더리움은 거래 규모 90억 달러로 한국 시장에서는 XRP에 한참 뒤처지는 3위를 기록했다. 즉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알트코인이 XRP라는 의미다. 대부분의 한국 코인 유튜버가 리플 XRP 방송을 끊임없이 하는 것도 이런 인기 때문일 것이다. 리플 판결이 나온 뒤엔 거래량이 폭증했다. 7월 24일 기준, 4대 거래소 모두 거래규모(24시간 기준) 1위는 XRP다. 거래소에 따라 비트코인의 2배, 3배에 달할 정도로 XRP 거래량이 크게 늘었다.

    3월 초 30센트대에 움직이던 XRP 가격이 3월 말 상승세를 보이며 4월 초 50센트를 넘긴 것은 한국 개미들의 매수세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카이코의 데시슬라바 오베르트(Dessislava Aubert) 선임 리서치 애널리스트는 4월 18일 코인데스크 방송 인터뷰에서 “리플이 소송에서 이길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3월 후반 한국 시장에서 거래량이 급증했다. 그런데 데이터를 보면 큰손들은 주로 팔고, 개인투자자들이 주로 사고 있다. 개인 매수세가 가격을 끌어올린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리플 XRP가 유독 인기 있는 이유에 대해 몇 가지 분석이 있다. 비트코인 같은 코인에 비해 개당 가격이 낮아 주식시장에서 ‘동전주’ 사듯 개미들이 투자한다는 것이다. 은행 간 송금, 특히 해외 송금 수수료를 낮추고, 빠르게 송금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코인이라는 ‘쉬운 내러티브’가 한몫했다는 분석도 있다.



    리플이 한국 시장에 공을 들인 측면도 있다. 디지털투데이 3월 15일자 ‘리플 SEC와 소송 영향 미미… 한국 시장 확대’ 기사를 보면, 리플 아·태 및 중동·북아프리카(MENA) 지역 총괄은 서울에서 열린 리플 행사에서 “최근 2년간 한국에서 개최한 서밋(summit)이 한국 시장에 대한 리플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리플 고위층은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2018년 3월엔 브래드 갈링하우스 최고경영자가 한국을 방문했고, 그보다 4개월 전인 2017년 11월엔 리플 XRP마켓 부문 대표가 서울에서 행사를 열었다.

    증권성 여부 놓고 3년간 법적 공방

    2020년 12월 22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리플에 대해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미등록 증권 상품을 판매(제공)해서 13억 달러를 투자받았다는 혐의였다. SEC가 미등록 증권이라고 문제 삼은 건 XRP 코인이었다. SEC 주장대로 XRP가 증권인지, 리플의 주장처럼 XRP 판매 과정에서 SEC가 ‘XRP는 증권이니 이렇게 판매하면 불법’이라고 리플 측에 알리는 ‘공정고지(fair notice)’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는지 등의 법적 다툼은 길게 이어졌다.

    7월 13일, 사건을 담당한 미국연방법원 뉴욕남부지방법원 아날리사 토레스 판사의 판결이 나왔다. 판결 직후 리플 측과 주요 매체에서 ‘리플의 승리’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SEC 손을 들어준 부분도 있었고, 판결 자체에 대한 논란도 뒤따랐다.

    가장 논란이 된 건 ‘리플이 기관에 XRP를 판매한 건 증권(투자계약) 판매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반면 ‘거래소를 통해 개미에게 판 건 증권 판매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한 부분이다.

    SEC에 따르면, 2013∼2020년 리플이 기관투자자(기관, 헤지펀드 등)에게 판매한 XRP는 대략 7억2890만 달러어치다. 리플 회사 측이 거래소를 통해 개미에게 판매한 건 7억5760만 달러어치, 전현직 CEO가 거래소를 통해 개미에게 판매한 건 6억 달러 정도다. 토레스 판사는 기관 대상 판매는 증권법 절차를 밟지 않은 미등록 증권 판매, 즉 불법행위라고 판결했다. XRP를 기관에 판 행위는 증권법에 따른 투자자 보호 대상으로 본 것이다.

    반면 리플 회사 측과 전현직 CEO가 거래소를 통해 개미들에게 판매한 부분에 대해선 증권 판매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증권법에 따른 투자자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해석이었다. 토레스 판사는 리플이 직원들에게 보상으로 XRP를 주고, XRP 관련 서비스 개발업체에 인센티브로 6억900만 달러어치 XRP를 제공한 부분에 대해서도 ‘돈을 받고 제공한 게 아니다’라는 이유로 증권 판매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판결 이후 리플 측이 XRP를 기관에 판 것과 개미에게 판 걸 다르게 본 논리가 도마에 올랐다. 판결문에 따르면, 기관은 XRP를 살 때 ‘우리가 XRP를 사면, 리플이 우리에게 XRP 판 돈으로 사업에 투자해서 XRP 가격을 올려줄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를 하면서 투자계약을 했지만 개미들은 그렇지 않았다. 기관은 리플과 직접 계약을 맺고 XRP를 샀으며 충분한 정보를 갖고 투자했지만, 개미들은 거래소에서 XRP를 살 때 ‘내가 사는 XRP를 리플이 파는지, 다른 누군가가 파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거래소에서 사고파는 건 블라인드 매매(매도자 매수자 모두 서로 신원을 알지 못하고 거래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진취적 판결인가 기괴한 판결인가

    이건 하위테스트(Howey Test) 해석의 문제였다. 하위테스트는 1946년 미국 대법원 판례에서 유래된 증권 판별 기준이다. △돈이 투자되고, △투자금이 공통의 사업체에 쓰이며, △타인의 노력으로 금전적 이득을 얻을 것이라는 합리적 기대가 있다면, 증권에 포함되는 투자계약이라는 해석이다. 이번 판결문에서 논란이 된 건 ‘타인의 노력’이라는 하위테스트 조건에, 담당 판사가 임의로 ‘그 타인과 직접 투자계약을 해야 한다’는 새로운 단서를 붙였느냐는 것이었다. 판사의 해석처럼 ‘XRP를 거래소에서 산 개인은 리플 측의 노력으로 XRP 가격이 오를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느냐는 문제이기도 했다.

    리플을 비롯한 알트코인 업계에선 법원이 전향적 판결을 내린 것으로 평가했다. 이번 소송에서 XRP 개인투자자들을 변호해 온 존 디튼(John E Deaton) 변호사는 7월 22일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그는 “토레스 판사는 자신이 맡은 임무를 제대로 했다. 1946년에 나온 하위테스트(증권 판별 기준)를 블록체인기술에 적용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번 판결이 비뚤어진 판결, 역행하는 판결이라면서 싫어한다. 76년이나 된 낡은 기준(하위테스트)을 지금 시대 (블록체인)기술에 적용해서 규제하려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니겠나”라고 썼다.

    반면 투자정보를 얻는 데 기관보다 불리한 개미(소액투자자)를 보호하는 걸 더욱 중시하는 증권법 취지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폭스비즈니스에서 증권시장과 더불어 코인 시장을 취재해 온 찰스 가스파리노(Charles Gasparino) 기자는 7월 22일 뉴욕포스트에 기고한 ‘1조2000억 달러 (암호화폐)시장을 흔들고 있는 정신 나간 크립토 판결 판사(Crazy crypto-ruling judge shaking up the $1.2 trillion market)’란 제목의 글에서 이번 판결을 맹비난했다. 애플 같은 상장기업이 거래소에서 주식을 판매하는 것도 압도적으로 대다수가 블라인드 매매라는 것. 그는 리플이 (코인)거래소에서 XRP를 개미들에게 판매한 행위가 블라인드 매매라는 이유로 합법이라고 한 판결은 “30년 동안 금융 담당 취재를 하면서 경험한 아주 기괴하고 위험한 판결 중 하나”라고 비판했다.

    XRP는 증권이 아니라고 한 부분도 논란이 됐다. 리플의 승리라는 기사 제목이 등장한 건 “XRP는 그 자체로 하위테스트 요건을 내포한 증권이 아니다”는 표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리플은 7월 19일 회사 웹사이트에 ‘XRP는 증권이 아니다: SEC 소송에서 리플의 기념비적 승리’라는 글을 올렸다. 그렇지만 ‘이건 XRP는 증권이 아니기 때문에 XRP를 판매하는 건 증권법 위반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XRP 코인 자체로는 증권성을 따질 수 없고, 판매 방식을 보고 증권(투자계약·investment contract)으로 판매됐는지 따져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토레스 판사의 판결은 ‘XRP는 디지털 토큰(데이터 파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증권성을 갖는 것은 아니며, 어떻게 팔리는지에 따라 증권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판결문에는 이런 부분이 등장한다.

    “하위(오렌지농장) 사건과 유사 사건 판결을 보면, 다양한 종류의 유무형 자산이 투자계약(증권)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해석한다. (하위 사건의) 오렌지나무, 위스키통, 공중전화, 아파트, (텔레그램 소송의) 디지털토큰 등의 사례를 보면, 각각의 경우에 투자계약 대상은 그 자체로는 상품이었고 그 자체로는 투자계약이 아니었다. 예컨대 하위농장 사건에서 (투자계약으로 팔린) 오렌지나무들이 나중에 누군가에게 재판매된다면, 그건 투자계약에 해당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건 매매가 이뤄진 종합적인 상황에 달려 있다.”

    결론적으로 판사는 “XRP는 증권이 아니다”라고 판결한 게 아니라 “XRP든, 무슨 코인이든 그 자체로는 증권이 아니며, 코인을 어떻게 판매했는지에 따라 증권으로 판매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권도형에게 희망 안긴 리플 1심 판결

    SEC는 판결이 나온 지 1주일 뒤 승복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항소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SEC는 자신들이 소송을 제기한 다른 사건인 테라폼랩스 권도형 사건 담당 뉴욕남부지방법원 판사에게 “토레스 판사가 내린 리플 판결이 잘못됐기 때문에 이를 인용해선 안 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의견서 내용은 “리플이 거래소를 통해 XRP를 개미들에게 판매한 행위가 투자계약(증권) 판매가 아니라는 이번 판결은 하위테스트와 수십 년에 걸친 증권법 판례에 맞지 않는 잘못된 판결이기 때문에, 권도형 사건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SEC가 의견서를 제출한 건 리플 판결 직후 테라폼랩스 측에서 “자신들이 거래소를 통해 개미들에게 UST 스테이블코인, 루나(LUNA) 코인 등을 판매한 것도 리플 판결을 근거로 보면 투자계약(증권) 판매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재판부에 의견서를 낸 데 따른 것이다. 리플 판결로 보면, 테라폼랩스 측이 개미들한테 자기네 코인을 판매한 것도 증권 판매로 처벌할 수 없으니 소송을 기각해 달라는 요구였다. 그러자 SEC는 ‘리플 판결은 잘못됐으니 인용해선 안 된다’면서 테라폼랩스 사건 담당 판사에게 급하게 의견서를 제출한 것이다.

    SEC가 언제 항소할지, 항소할 경우 “리플 측이 개미들에게 XRP를 판매한 건 증권 판매가 아니다”라는 부분이 뒤집혀질지 아니면 그대로 인정될지는 확실치 않다. 1심 재판이 종료된 것도 아니다. 이번 약식판결은 SEC와 리플 측이 요청한 일부 쟁점에 대해서만 나온 것이다. 약식판결에 불복하는 내용에 대해 SEC와 리플 양측이 각각 서둘러 항소할 가능성이 없진 않다. 하지만 다른 쟁점에 대한 판결까지 모두 나와 1심 재판이 종료되면 그때 가서 한꺼번에 항소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1심 재판이 완전히 끝나려면 최소 1년 이상 걸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여러 의미에서 리플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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