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호

명사에세이

65세에 4개국 어학연수라니…

  • 김원곤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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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2019-12-10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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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켜 보면 1989년 1월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가 이뤄진 이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행 초기에는 단순히 해외여행 활성화만 이뤄지는 것 같더니 1990년대 중반부터 어학연수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조금씩 파급되기 시작했다.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잠시 주춤하다가 2000년대 초반부터 어학연수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상용어가 됐다.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를 낳으면서 조기유학 붐이 몰아친 것도 그즈음이다. 초·중·고 학생들의 조기유학은 2002년 처음 1만 명을 넘었다.

    나이 쉰에 시작한 외국어 공부

    은퇴를 했거나 앞둔 우리 세대는 어학연수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았다. 필자의 경우만 하더라도 상당한 교육열을 가진 집안에서 자랐는데도 중학교 입학 직전 영어 알파벳을 미리 배운 게 조기 외국어 교육이라 부를 만한 것의 전부였다. 입시에 필요한 문법과 독해 공부에 열중하면서도 회화 등 이른바 생활영어에 제대로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해외에 나갈 수도 없었고 국내에서 외국인을 만나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1986년 의대 교수가 됐다. 실제 대화가 가능한 수준의 영어 실력이 당장 필요했다. 해외 학자들과 빈번한 교류가 있었으며 금방 닥쳐올 1년간의 해외연수도 발등의 불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당시 정말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한 것 같다. 그런 덕분에 1989년 미국 유타주에 연수를 갔을 때 상당한 영어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웬만한 현지인에 비해서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어휘력도 과시했다. 

    어학에 관한 관심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1990년 귀국 후 줄곧 흉부외과 교수로 생활하면서 외국어를 잘해야겠다는 추가적인 욕심도, 실력 향상에 대한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이미 안정된 직장을 잡고 있는 데다, 의사란 직업이 그렇게 높은 수준의 영어를 요구하는 직종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차에 2003년 정말 우연히 제2외국어로 일본어 공부에 입문했다. 이후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서 2005년 중국어, 2006년 프랑스어, 2007년 스페인어로 외국어 공부가 이어졌다. 그야말로 ‘사서 고생길’의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1년 사이에 4개 외국어 고급자격시험을 치러 모두 합격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우고는 결국 성공했다. 2011년 봄부터 시작해 4개월 정도의 간격으로 중국어(신HSK 6급-2011년 3월), 일본어(JLPT N1-2011년 7월), 프랑스어(DELF B1-2011년 11월), 스페인어(DELE B2-2012년 5월) 4개 외국어 시험에 각각 도전해 모두 합격한 것이다. 여기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는 그간 필자가 출간한 책에도 기술돼 있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6개 국어 구사자로서 매스컴의 관심까지 받은 필자도 어학연수라는 것을 해본 경험은 없다. 쉰 살이 넘어 시작한 어학 공부에 대한 나의 뒤늦은 열정을 잘 아는 아내가 정년퇴직이 3년 남은 2016년 불쑥 말을 꺼냈다.

    “여보, 은퇴 후 어학연수 어때?”

    “여보, 당신 은퇴 후 어학연수 한번 가보는 것은 어때?” 

    짧은 한마디였지만 머리를 맞은 듯했다. 아내의 첫 제의를 받은 후 어학연수에 관한 결심을 굳히고는 3년 동안 구체적인 내용을 머릿속에서 조금씩 정리해나갔다. 그런 다음 결심을 공론화하고자 주위 사람들에게 차츰 계획을 밝히기 시작했다. 

    2019년 8월 대망의(?) 정년퇴임을 실제로 맞았다. 그동안 계획해둔 어학연수를 실천에 옮길 때가 된 것이다. 문제는 어학연수 대상이 영어를 제외하고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4가지나 된다는 점이었다. 어학연수 경험이 전무한 60대 중반의 늙은이가 4차례 이어지는 과정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엮을 수 있을까?’ 은근히 고민이 됐다. 

    그래서 생각한 게 8월 은퇴 후 반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친 후 삼삼한(?)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즉 내년인 2020년 3·4·5월, 3개월 동안 남미 페루에 가서 스페인어 어학연수를 한 뒤 귀국해 6·7·8월, 3개월간 국내에서 재충전하고 다시 프랑스어 어학연수를 9·10·11월, 3개월간 떠난다는 계획이다. 이후의 계획도 비슷하다. 프랑스어 연수 후 다시 귀국해 국내에서 2020년 12월, 2021년 1월, 2월, 3개월간을 재충전 기간으로 지낸 후, 이번에는 중국으로 출발한다. 중국에서 역시 2021년 3·4·5월, 3개월간 공부한 뒤 6·7·8월을 국내 재충전 기간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해 9·10·11월 일본에서 어학연수의 대장정을 마무리한 뒤 귀국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이번 프로젝트는 개인적 로망을 달성하겠다는 목적이겠으나 의미를 부여하자면 세계적으로 그 누구도 시도한 적도 없고 실제로 쉽게 도전할 수도 없는 목표에 다가가보겠다는 포부가 깔려 있다. 물론 현지에서 노력해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을 만큼의 결과를 얻고야 말리라는 욕심도 있다. 

    당연히 많은 난관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각종 행정적인 절차의 까다로움과 4개국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번거로움, 나이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제약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어학연수의 특성상 몰입을 위해 아내 동반 없이 홀로 장기간 외국에서 체류해야 한다는 것도 어려운 점의 하나일 것이다. 

    여기서 약간 느닷없기는 하지만 바둑 이야기를 한 번 꺼내보아야겠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애호가 수가 상당히 줄었다고는 하지만, 바둑은 동아시아 역사를 관통하는 절묘한 짜임새의 고급 오락이다. 특히 인간과 AI 사이의 대결을 통해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서로 번갈아 반상에 돌을 놓으며 상대보다 더 많은 영역을 확보하는 게임’이라는 기본 원칙은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둔 돌 체면 살려야

    이런 바둑의 세계에는 우리와 함께해온 오랜 역사만큼이나 파생된 표현이나 격언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아생연후에 살타’ ‘선작오십가자는 필패’ ‘적의 급소가 나의 급소’와 같은 주옥같은 격언은 말할 것도 없고, ‘포석을 구상하다’ ‘끝내기 단계에 돌입하다’ 같은 일상적 용어에도 바둑의 영향이 남아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바둑 용어 중 필자가 좋아하는 표현이 있다. ‘먼저 둔 돌의 체면을 살려야 한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바둑 해설자들이 “저 수는 먼저 둔 돌의 체면이 서지 않는 수입니다” “먼저 둔 돌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다음 착수는 이 방면으로 가야 합니다”와 같은 표현을 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된다. 간단하게 말해 앞서 기울인 노력, 투자, 시간, 생각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필자가 정년퇴임 후 전공인 의술을 살려 직업적 지속성을 유지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2년간에 걸친 대장정을 나서는 까닭도 지천명의 나이 때부터 15년 넘게 이어진 먼저 둔 돌들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지금 상태로도 충분하지 않으냐는 주변의 의견도 있지만, 그보다는 나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과거에 둔 노력의 돌들에 더 늦기 전에 더 큰 체면을 세워주는 것이 개인적 도리요 의리라고 생각했다. 설사 그 체면 세움이 현실적인 집짓기에 다소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그 또한 한판의 바둑이 아니겠는가. 

    내후년인 2021년 말 개인적 대장정을 반드시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한 잔 술을 음미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김원곤
    ● 1954년 출생
    ● 경남고, 서울대 의대 졸업
    ● 서울대 대학원 의학박사
    ● 서울대 의대 흉부외과 교수
    ● ‘Dr.미니어처의 아는 만큼 맛있는 술’ ‘파란만장 중년의 4개 외국어 도전기’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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