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호

진보정당이 ‘허경영’에게도 밀린 진짜 이유 3가지

[노정태의 뷰파인더㉚] 현실감각, 핵심의제, 권력의지 부재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입력2021-04-1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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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혁명당에도 밀린 4·7 재보선

    •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거늘….

    • 경제 과제에 대한 합리적 해법 無

    • ‘대장주’ 정의당의 무책임

    • 질타조차 회피해버린 제2야당

    • 기본소득이 해결? 허황된 소리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자 토론회가 열린 3월 29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군소 정당 후보들이 토론을 준비하고 있다. 신지혜(왼쪽부터) 기본소득당 후보, 허경영 국가혁명당 후보, 배영규 신자유민주연합 후보, 송명숙 진보당 후보, 정동희 무소속 후보, 신지예 무소속 후보, 이도엽 무소속 후보, 오태양 미래당 후보, 김진아 여성의당 후보.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자 토론회가 열린 3월 29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군소 정당 후보들이 토론을 준비하고 있다. 신지혜(왼쪽부터) 기본소득당 후보, 허경영 국가혁명당 후보, 배영규 신자유민주연합 후보, 송명숙 진보당 후보, 정동희 무소속 후보, 신지예 무소속 후보, 이도엽 무소속 후보, 오태양 미래당 후보, 김진아 여성의당 후보.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여당의 패배, 야당의 압승. 4·7 재·보궐선거(재보선) 대한 일반적인 평가다. 물론 맞는 말이다. 원인이 뭐가 됐건 여당이 압도적인 표 차이로 서울과 부산이라는 두 도시의 ‘지방 권력’을 빼앗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재보선의 의의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진보 정치의 몰락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진보 정치는 무너졌다. 아주 확실히, 과연 부활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폭삭 망해버리고 말았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를 보자. 1위,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 279만8788표로 57.50% 득표. 2위,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 190만7336표로 39.18% 득표. 문제의 3위, 허경영 국가혁명당 후보. 5만2107표로 1.07% 득표. 

    원내 제2야당, 즉 세 번째로 큰 정당인 정의당은 후보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국회의원을 보유한 원내정당인 기본소득당 조차 2만3628표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허경영에게 두 배 이상의 표 차이로 뒤졌다. 범(汎)진보 계열에서는 오히려 기호 11번을 달고 나온 김진아 여성의당 후보가 3만3421표로 4위를 기록했다. 



    물론 허경영을 우습게 볼 수는 없다. 허경영은 흔히 알려진 것보다 훨씬 탄탄한 조직표를 지닌 후보였다. 2020년 치러진 제21대 총선 결과를 놓고 보면 그렇다. 총선을 앞두고 그의 자금 출처 및 과거 문제 등이 제기돼 기존의 지지율을 크게 잃고 국회 입성에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비례대표 득표율 0.7%를 기록했다. 이번 재보선에서 1.07%를 얻었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그 어떤 진보 정당도 허경영을 이길만한 득표를 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무플의 수렁에 빠지다

    4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송명숙 진보당 서울시장 후보(오른쪽부터), 오태양 미래당 서울시장 후보, 여영국 정의당 대표, 신지혜 기본소득당 서울시장 후보, 김예원 녹색당 공동대표가 ‘반기득권 공동 정치선언’을 한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4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송명숙 진보당 서울시장 후보(오른쪽부터), 오태양 미래당 서울시장 후보, 여영국 정의당 대표, 신지혜 기본소득당 서울시장 후보, 김예원 녹색당 공동대표가 ‘반기득권 공동 정치선언’을 한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시곗바늘을 2018년 전국동시지방선거로 돌려보자. 당시 서울시장 선거와 비교해보면 현 상황의 심각성을 절감할 수 있다. 당시 1위는 현직 시장이던 박원순 후보, 2위는 김문수 자유한국당 후보, 3위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차지했다. 

    4위는 놀랍게도 최연소 후보 신지예를 앞세운 녹색당이었다. 신 후보는 8만2874표를 얻어 1.67%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같은 선거에서 후보를 냈던 정의당은 8만1664표를 득표해 녹색당에 간발의 차로 뒤지며 5위로 밀려났다. 김진숙 후보의 민중당 역시 2만2134표를 얻었다. 진보 정당끼리 서로 경쟁을 하며 도합 18만여 표를 얻었다. 

    2018년 녹색당, 정의당, 민중당을 합쳐 진보 진영은 총 3.7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2021년의 경우 여성의당, 기본소득당, 무소속 신지예, 진보당, 미래당의 득표를 모두 합해도 1.91%에 불과하다. 진보 정당과 후보의 숫자는 크게 늘었지만, 유권자의 지지는 대략 반 토막이 났다. 

    원론적으로 보면 이번 선거는 진보 정당에 불리한 선거가 아니었다. 서울시와 부산시 모두 성폭력과 성추행 등을 이유로 재보선을 했다. 진보 정당이 페미니즘을 비롯한 도덕·윤리적 주제를 앞세워 활약할 여지는 그만큼 넓었다. 

    경제 등 그 밖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등 정책 실패가 도드라지는 상황에서 여당에 대한 심판 성격으로 치러지는 선거가 이번 재보선이었다. 진보 정당이 유권자에게 야당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면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실망 및 이탈표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 적어도 지난 지방선거에 비해 득표율이 낮아지는 일이 벌어지지는 말았어야 한다. 

    요컨대 이번 선거에서 허경영이 3위를 기록한 것은 허경영의 승리가 아니다. 진보 진영 전반의 몰락이다. 여당인 민주당이 혹독한 심판을 당했다면, 그 밖의 진보 정당은 아예 대중의 뇌리에서 지워졌다. 흔히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라고 하지 않던가. 2021년 현재, 한국의 진보 정치는 바로 그런 수렁에 빠져 있다.


    허경영의 성의

    한국의 진보 세력은 어째서 허경영보다 못한 처지가 되었을까.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현실 감각의 부재. 둘째, 핵심 의제의 부재. 셋째, 권력 의지의 부재. 

    선거 공보물을 펼쳐놓고 쭉 읽어보면 이번 재보선은 가히 ‘기본소득 선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범 진보진영 후보들이 그렇다. 아예 정당 이름부터 ‘기본소득당’인 신지혜 후보가 눈에 띈다. 다른 후보들이라고 해서 기본소득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던 게 아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지난 3월 19일부터 24일까지 이번 재보선에 출마한 후보들에게 기본소득에 대해 질의했다. 이를 보면 오태양 미래당 후보, 송명숙 진보당 후보, 신지예 무소속 후보 모두 ‘기본소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지지한다’고 답했다. 여성 의제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진보 정치 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는 여성의당을 제외하면, 그 외 모든 진보 정당과 후보가 기본소득을 지지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본소득의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앞선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질의에서 후보자들은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을 추가로 마련한다’와 ‘소득과 자산의 공정한 재분배를 위해 조세제도를 개편하고 증세를 하여 마련한다’를 택했다. 신지혜 기본소득당 후보는 한 발 더 나아가 국채 발행 및 주권화폐 발행도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답했다. 

    물론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국민 한 사람당 월 100만원을 기본소득으로 제공하려면, 대한민국의 인구를 5000만 명으로 잡았을 때, 매달 50조원의 재원이 마련되어야 한다. 1년이면 600조원이 필요하다. 서울시장이니 서울시민에게만 기본소득을 준다고 해도, 서울시민을 1000만 명으로 잡았을 때 매달 10조원이 필요하다. 2020 회계연도 총세입이 465조 5000억원, 총세출이 453조 8000억 원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실로 터무니없는 숫자다. 그 어떤 증세나 국채 발행으로도 메꿀 수 없는 돈이다. 

    결국 용어만 다를 뿐이지 허경영의 공약과 다를 바 없는 소리다. 가령 허경영은 18세부터 국민배당금 150만원을 지급해 부익부 빈익빈을 없애겠다고 하고 있다. 게다가 허경영은 재원 마련에 대해 둘러대는 시늉이라도 한다. 자신이 서울시장 급여를 받지 않고 판공비로 쓸 것이 예상되는 100억여 원 역시 받지 않음으로써 시민들에게 돌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마르크스도 생산력 증대 전제

    국민들이 투표장에 가서 표를 던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결국 경제다. 부동산 분노 투표가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번 선거의 경우는 특히 그랬다. 하지만 그 어떤 진보 정당도 우리 사회가 당면한 경제적 과제에 대해 합리적 해법을 제시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정치 세력이 반드시 갖춰야 할 최소한의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는 진보 정치의 핵심 의제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좌파 경제 담론은 마르크스주의 노동가치론에 입각해 있다. 이는 생산력을 증진해 물질적 부를 키워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사실상 주류 경제학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목표다. 생산력 증대를 전제로, 커지는 부를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나누고, 부의 생산수단을 노동자가 소유하자는 것이 공산주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진보 사상은 이와 같은 발전주의 세계관을 전제로 한다. 애초에 ‘진보’라는 말 자체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은 향상된 생산력에서 나온다. 어떤 공산주의, 사회주의, 진보 이념이건, 경제 전반의 발전과 향상을 도외시한 채로는 성립할 수 없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은 1980년대 말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동구권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차례로 몰락한 탓이다. 역사의 목적의식과 대의를 추구하는 것은 예전과 같은 힘을 갖지 못했다. 대신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 문제 등 일상 속 차별이나 억압을 발견하고 해결하는 게 진보 정치의 중요한 의제로 부상했다. 

    기존의 좌파 세계관은 정체성의 정치와 동떨어진 것이었다. 노동자는 국경과 문화를 초월해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단일 대오를 이루는 형제였다. 반면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는 태생적으로 ‘다름’을 중심에 놓을 수밖에 없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 정당이 모두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 문제를 언급했지만 공동 전선을 구축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 있다. 

    그 차이는 4위를 기록한 여성의당과 그 외의 진보 정당 사이에서 도드라진다. 여성의당은 오직 여성의 인권만을 의제로 삼는다. 성소수자 문제에는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 외의 진보 정당과 정치 세력은 여성의당이 갖고 있는 관점에 반대했다. 여성의당은 자신들의 입장이 페미니즘이라고 한다. 여성의당을 비판하는 기타 진보 세력 역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 대중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같은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하나의 뜻으로 쓰이고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실의에 빠져 고개 숙인 사업가

    서울시장 보궐선거 선거운동 기간인 3월 30일.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린 ‘투기공화국 해체’ 정의당 전국순회 출정식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서울시장 보궐선거 선거운동 기간인 3월 30일.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린 ‘투기공화국 해체’ 정의당 전국순회 출정식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문제의 해법은 정치에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 의지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실의에 빠져 고개 숙인 사업가는 비즈니스에서 성공할 수 없다. 선거에서 이겨 집권 세력이 되겠노라는 의지를 지니고 있지 않은 정당과 정치 세력은 정치적으로 승리할 수 없다. 유의미한 사회적 화두조차 던지지 못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정의당의 행보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 대표였던 시절 만든 당헌까지 수정해가며 기어이 후보를 냈다. 국민의 비판과 야유가 쏟아졌다. 그런데 불현듯 정의당에서 김종철 전 대표의 성추행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비공개로 긴급 대표단 회의를 갖더니 반성의 뜻으로 이번 재보선에 불참하겠다고 했다. 

    물론 김종철의 성추행은 당사자가 인정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재보선은 누가 뭐라 해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성폭력을 저질렀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탓에 치러졌다. 그럼에도 민주당이 후보를 낸 선거를, 정의당은 왜 지레 포기했을까. 

    정당은 정치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이벤트는 선거다.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정당은 시합에 나가지 않는 운동선수와 다를 바 없다. 당 내에서 발생한 성폭력에 대해 진지한 반성의 뜻이 있다면 그 뜻을 갖고 선거라는 공론장에 나와야 했다. 이를 통해 국민의 질타를 받고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쪽이 정의당에는 더욱 바람직한 경로였을 것이다. 

    정의당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6명의 국회의원이 있는 정의당은 선거에서 전임 시장의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의당의 불참으로 박원순의 성폭력이 선거의 핵심 의제로 떠오를 기회는 사라졌다. 공백이 된 의제의 자리는 부동산에 분노한 민심이 채웠다. 민주당은 이 틈을 타 집요하게 ‘생태탕과 페라가모’ 네거티브를 시도했다.
     
    정의당은 잘못된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쿠키뉴스 의뢰로 여론조사기관 한길리서치가 4월 10일부터 12일까지 전국 만18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정의당의 지지율은 2.9%에 그쳤다.(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6석을 가진 원내 3당의 지지율이 3%에도 미치지 못한다. 선거에서 보이지 않는 정당이 되고 나니 국민의 뇌리에서 빠르게 지워져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 진보 정당의 ‘대장주’라 할 정의당이 이 정도니, 다른 정당의 처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유권자들의 집단 면역

    진보 정치 세력은 ‘기본소득이면 다 해결된다’는 식의 허황된 소리를 그만둬야 한다.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기본소득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전부터 허경영이 그런 소리를 해온 탓에 유권자들이 집단 면역에 도달해 있으니 말이다. 대신 오늘날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에 맞는 핵심 의제를 찾아야 한다. 그것을 대중에 알리고 설득하기 위해 꾸준히 선거에 나오고 유권자와 접촉하며 입지를 확보해가야 한다. 오랜 세월 진보 정당을 지지해왔던 사람으로서 진심을 담아 드리는 조언이다. 

    #정의당 #여성의당 #기본소득당 #국가혁명당 #진보당 #미래당 #허경영 #신동아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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