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을 대하는 남북한의 입장과 이해는 완연히 다르지만, 미국 없는 남북한의 미래는 상상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록 남북통일이 기본적으로 민족 내부의 문제이긴 하지만, 한미관계의 기조와 변화에 따라 그 향방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번 한미정상회담도 새 정부의 출범에 따른 의례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북핵 해법을 둘러싼 한미간 이견을 해소하고 남북관계의 기본방향을 조율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공동이해에 대한 원론적인 합의 이상을 도출하기 어려운 만남이었다.
최근 한미관계는 틈새가 벌어져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과거 국가 수준에서 일어났던 한국과 미국 사이의 이해 갈등이 시민사회 영역으로 전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은 한미갈등의 역사적·구조적 요인들을 찾아보고, 정부 차원이 아닌 시민사회 네트워크를 통한 대화와 교류의 방안을 알아본다.
미국을 짝사랑한 한국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다. 선린과 적대를 상대화시키는 것이 국익이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대외정책에서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해 왔다. 첫째 자유와 인권, 둘째 경제적 이해, 셋째 군사적 이해가 그것이다. 돌이켜보면 한미관계는 이 삼중적 잣대에 의해 때로 협력했고 때로는 반목해왔다.
미국은 건국 이후부터 국가이익의 신장을 위해 세계적 차원의 군사, 정치, 경제, 문화 전략을 구상해왔다. 국제사회에 뒤늦게 참여한 신생국으로서 자기보호 본능에서 비롯된 세계전략은 국제질서 수호라는 메시아적 사명감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미국에서도 ‘유교적 제국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순종하는 나라엔 당근을 주지만 거역하는 나라엔 채찍을 휘두른다.
“미국을 무조건 우방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한 한국 최초의 미국유학생 유길준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가 되풀이되는 이유는 때때로 과거가 망각되기 때문이다. 120년 전 그의 경고는 현시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한반도는 동북아 세력관계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적 비중에 지나지 않는다. 지정학적 위치를 염두에 둔 미국의 정책에서 한국은 중국, 일본, 러시아와의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종속변수일 뿐이었다.
한미갈등은 개항, 식민지화, 분단의 세 단계로 대별되는 두 나라 사이의 오랜 관계의 역사 속에 잉태되었다. ‘개항’으로 시작된 한미관계는 사랑과 배신의 연속에 비유할 수 있다. 한국은 미국에 대해 짝사랑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미국과 일본의 결탁에 의한 ‘한국 식민지화’나 미국과 러시아의 타협에 따른 ‘한반도 분단’이 말해주듯 미국의 배반에 다름 아니었다. 약소국 조선의 강자 미국에 대한 구애는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