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호

한국 사회의 갈등, 어떻게 풀 것인가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지나친 이념화 해결이 관건”

  • 입력2009-03-06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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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전략연구원은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전문가·학자 70여 명이 포진해 ▲학제적 연구 ▲실천적 연구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중도적 연구를 표방하는 네트워크형 민간 싱크탱크다. www.kifs.org
    ● 일시 : 2009년 2월9일(월)

    ● 장소 : 미래전략연구원

    ● 사회 : 손병권거버넌스전략센터장(중앙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 참석 : 박성우거버넌스전략센터 연구위원(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설동훈사회문화전략센터 연구위원(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이장혁경제통상전략센터 연구위원(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 정리 : 구가인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한국 사회의 갈등, 어떻게 풀 것인가

    사진 왼쪽부터 이장혁, 설동훈, 손병권, 박성우 교수.

    ▼한국 사회의 갈등, 무엇이 문제인가

    손병권 갈등은 어느 사회에나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갈등이 문제가 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갈등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모두 있겠지만, 최근 한국 사회의 크고 작은 갈등은 갈등 해결에 대한 합의의 가능성이 점점 더 없어지고 사회통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부각되는 듯하다. 우리 사회에서 갈등이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주된 갈등 요인이 무엇이며 이에 대한 해결책을 다양한 수준에서 논의해보자.

    설동훈 사회구성원 간에 큰 충돌 없이 합의도출이 가능한 것을 사회적인 합의 혹은 균형이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한다면 그러한 합의나 균형이 깨어진 상태를 사회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사회에는 크고 작은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회구성원 각각의 이해관계(interest)와 이를 이해(understanding)하는 폭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크고 작은 갈등은 사회에 역동성을 부여한다고도 볼 수 있다. 단, 그러한 갈등이 얼마나 거칠게 폭발하고 또 그 갈등을 어떻게 관리해나가느냐가 중요하다. 문제는 갈등 그 자체가 아니라 이것을 우리 사회에서 얼마만큼 조정 통합해나갈 수 있는지다. 여기에선 게임의 규칙(Rule of Game)이 중요하다. 게임이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규칙을 지킨다는 것, 즉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상대방이 규칙을 어길 것이라고 보고 자신도 그 규칙을 마구 어기는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 상대방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하고 사회적인 행동을 하다 보니까 갈등이 극으로 치닫게 되는 듯하다.

    박성우 설 교수의 의견에 동의한다. 한 가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것은 우리 사회가 왜 지금 이러한 갈등이 문제라고 이야기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노사갈등이건 세대갈등이건 이념갈등이건, 이런 다양한 갈등은 사실 지금 2000년대 우리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있었고 또 동시대 다른 곳에도 마찬가지로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와 사회구성원 전체가 특별히 왜 이런 사회갈등을 문제시하고, 이게 왜 우리의 문제라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여러 종류의 갈등에는 갈등에 참여하는 구체적인 이해당사자들이 있다. 용산철거민 사태의 경우도 그렇고 고부간의 갈등이나 세대 간 갈등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특정 갈등에 대한 해석을 통해 사회 전체의 갈등을 해석하고 또 해결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어떤 특정한 갈등이 사회 전체의 문제이고 전체 갈등일 수도 있음을 부인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들로 인해 자칫 사회 내 갈등이 부풀려져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 되거나, 이해당사자들끼리 적절하게 해결할 수 있는 갈등을 사회 전체 갈등으로 받아들여 사회 구성원 전체가 비용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그래서 궁극적으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못지않게 불필요한 수준까지 갈등이 증폭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기제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장혁 사회갈등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경제적인 이익과 관련한 갈등이고 또 하나는 감정적이거나 이념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이라고 본다. 첫 번째 갈등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정된 재원을 누가 더 갖고 누가 덜 가질 것인지에 대해 이해관계가 대립되다 보니까 생기는 것이다. 반면 두 번째 갈등은 추구하는 가치관의 차이와 정서상의 이유로 발생한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가치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 시민이라면 민주공화국 헌법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바로 그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장 공통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공통적인 가치에 대한 이해의 부족 또는 고의적으로 가치를 부정하는 행위들 때문에 여러 가지 갈등이 발생하는 게 아닌가 싶다.

    설동훈 사회학에서는 전자를 이해관계(interest)에 기반을 둔 갈등, 후자를 이데올로기 또는 아이덴티티 문제에 관련한 갈등으로 본다. 그런데 후자의 갈등, 이념의 대립을 강조하면 그 대립 자체는 때로 해소가 불가능하다. 컵에 물이 반쯤이 있는데 한쪽에서는 반밖에 안 남았다고 보고, 다른 한쪽에서는 반이나 남아 있다고 본다. 동일한 현상에 대한 해석부터 상이하면 갈등 해결은 불가능하다. 결국 좌파와 우파, 경제성장을 강조하는 입장과 분배를 강조하는 입장으로 나눠놓고 논의를 전개하면 갈등 해결은 요원한 것이다.

    ▼ 민주화 20년과 이념갈등

    손병권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사회의 갈등이 처음부터 이념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 합의가 매우 어려웠다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갈등의 배경을 찾아보면 1987년 이후 민주화 확대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 20년간 권리의식은 높아지고 기존 관념이나 어떤 관습, 제도 등은 깨진 반면 이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합의, 규범은 나오지 않았고, 정치과정도 양극화되고 정파적이 됐다.

    박성우 지난 20년 우리의 민주주의 경험은 매우 소중하고 또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민주주의에 도취해 그로 인한 상실감도 큰 거 같다. 사회적 갈등이 표출될 때마다 마치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가 민주화에 대한 성과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그렇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갈등이나 문제점이 민주화가 덜 되었기 때문에 혹은 민주주의가 덜 성취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문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섞여 있는 갈등의 요소들을 민주화로만 풀려고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공고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그럼 그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에 대한 합의를 이루기 어렵다는 거다.

    개인적으로는 그 이유를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혹은 민주화 담론에 지나치게 도취해 있기 때문으로 본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도취감으로부터 빠져나와 우리의 민주주의를 좀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열정적, 감성적 민주주의에서 지성적 민주주의로 전환해야 한다는 얘기다. 민주주의는 원칙적으로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체제의 하나다. 거기다가 우리 사회에서 원하는 모든 가치를 다 집어넣게 되면 민주주의 개념은 포화되고, 그러면 서로 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 사실은 각자 다른 내용을 주장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민주주의 개념 자체를 좀 더 순수화하고 동시에, 민주주의라는 가치 외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또 다른 가치와 원칙들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법치주의나 자유주의 등을 민주주의와 병렬적으로 놓고 봐야 하는데 무조건 민주주의 안에 다 집어넣으려는 향수적인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한 계속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갈등의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 채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혼란이 지속될 것이다.

    이장혁 제도적인 측면에서 해결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민주정치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봐야 한다. 1987년 헌법 개정 후 정치체제를 효율적으로 만들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어서인지 개헌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그 개헌이라는 게 민주주의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자꾸 정파적인 이해관계들만 부딪치다 보니 실제로 논의되어야 될 내용은 배제되는 것 같다. 노사갈등처럼 이익집단 간에 생기는 갈등은 많은 경우가 경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협상 기술로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

    설동훈 지금 우리가 겪는 이러한 갈등은 민주화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갈등, 혹은 그전에는 크게 문제가 안 됐던 것이 부각되는 거다. 예컨대 한국 사회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에는 다수의 지배와 소수자에 대한 존중의 개념이 다 들어 있다. 어쩌면 아귀가 잘 안 맞는데도 이러한 개념이 사회적으로 운영된 건, 일종의 문화라고 본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나 신뢰와 같은 기본적인 행동패턴이 있는데 최근엔 이런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용산철거민 사태를 보면 건물주와 세입자 간의 갈등 관계로 보이지만 또 거기에는 권리금과 같은, 우리 사회에만 있는 독특한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권리금은 법률적으로는 제대로 인정이 안 되는 문화적 개념인데, 이런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내는지에 문제의 복합성이 있다. 이해관계 갈등에서 한쪽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고 보는데 다른 쪽에서는 어림도 없다고 보는 그 차이가 핵심인 것 같다.

    또 하나 덧붙이면 우리는 흔히 다양한 사회갈등을 보수와 진보 간의 갈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사실 갈등의 대부분은 이익집단 간의 갈등, 이해관계 대립에 의한 갈등이고 순수하게 이념적 지향이 다른 집단 간의 갈등은 의외로 적다. 보수 진보의 이념적 틀에서만 갈등을 보면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이해관계 부분은 분명한 답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갈등이 극단적으로 가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박성우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들어가게 되면 그 갈등에 이해당사자가 아닌 사람들도 참여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어떤 갈등에서 이해당사자들이야 매우 첨예한 문제지만 국민 전체가 거기에 참여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념이 개입되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질 뿐 아니라 이념에 따라 사회 전체가 양분될 수 있다. 그건 용산사태나 촛불집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어쩌면 이해당사자들끼리 협상으로 따져서 해결할 수 있었을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간에 정파가 개입되고 그 다음에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개입되니까 나중엔 전혀 다른 이슈로 나오게 되면서 사회가 둘로 갈린 거 아니겠는가.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이해당사자들이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자신의 이해관계를 숨기는 것도 문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를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하고 남이 만들어주길 기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해갈등을 구체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솔직하게 스스로가 이익집단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또 그렇게 안 밝히는 그룹이 있다면 바깥에서 이해와 관련된 사안이라는 것을 객관적적으로 봐줄 필요도 있다.

    이장혁 경제적인 이해관계로 갈등이 생기는 것은 기술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파이를 키웠을 경우에 모든 사람이 다 서로 수입이 늘어나서 이해관계자들 모두 좋은 상태로 갈 수 있는 방법도 있다. 가장 안 좋은 건 파이는 키우지 않고 제한된 파이를 누가 더 가져갈 것이냐를 두고 갈등이 생기는 거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구성원들끼리 공화국의 가치라든지 거기에 대한 합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러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둘러싼 문제들이 생겼는데도 왜 그러한 이념적이며 정치적인 개입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해보면, 아직 한국이라는 나라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공유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 경제위기, 불안 그리고 갈등의 문제

    손병권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민주화 이후에 모든 사회적 문제를 문제의 성격에 대한 성찰과 규명 없이 민주주의로만 풀려고 하는 태도가 오히려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장애요인이 됐다는 것과, 갈등의 지나친 이념화를 방지하고 합리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IMF 위기 이후에 경제적인 파탄과 함께 나타난 사회갈등의 심화과정에 대해 논의해보자. 중산층이 붕괴되고 주류문화 형성이 무척 어려워진 것 등은 사회갈등의 원인이나 배경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노사 갈등과 같은 문제 경제위기와 연관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장혁 경제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갈등이 증폭된다고 보긴 힘들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중요한 문제다. 가진 것이 똑같더라도 미래가 안정적이면 수입이 많지 않아도 사회구성원의 행복지수는 높아진다. 그런데 지금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사람을 해고한다든지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어 동기를 유발하려고 한다. 하지만 조직행동 쪽에서 나온 이론이나 실험결과에 따르면 위기를 조성해서 성과를 높이는 동기유발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드러나는데도 한국 사회에는 아직까지 이것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이들이 있고 목소리가 크다. 그러다 보니 똑같은 부를 가지고도 현재가 불안하니까 뭔가 더 가지려고 하게 돼 갈등이 증폭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렇듯 불안이 만연한 터에 지식인 계층 혹은 정치가가 불필요한 불안감을 조성하면 안 되는데 여러 가지 중요한 이슈가 벌어졌을 때 정부 특정인물의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발언은 악순환의 고리를 강화시키는 것 같다.

    부의 양극화가 심해진 것에 대해서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매우 제한적이다. 위협을 통한 동기유발 메커니즘에서 순수하게 일의 즐거움, 삶의 즐거움, 가정의 중요함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도록 사회적 불안을 줄이는 기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인식이 밑에서부터 바뀌기가 어렵다면 조직 운영자나 정부에서 조금씩 바꿀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해야 한다.

    설동훈 이장혁 교수의 말에 덧붙인다면 갈수록 빈부격차 현상이 심화되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빈부격차 심화라는 것은 전체적으로는 생활수준이 매우 높아졌지만 빈곤층이 다시 확대되고 있음을 뜻한다. 자본주의 심화과정에서 계층분화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 사회는 선진 자본주의가 겪었듯 상층과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중간계급으로 분화되는 상황이 왔다. 여기에서 서구 사회가 겪었던 것과 같은 계급갈등, 계층갈등이 표출되고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것이 일부 이해관계에 기반을 둔 갈등은 사회적으로 표출되고 있지만 상당수 개인적으로 스트레스를 축적하면서 전사회적으로는 침체되고 음울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앞으로 이것이 표출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를 방치할 경우 사회 전체적인 수준의 불행, 혹은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박성우 좋은 지적이다. 예컨대 이해관계가 제대로 표출되지 않기 때문에 생활에 내재되어서 스트레스풀하게 녹아들어가 있는 문제의 경우 잠재적으로는 아주 큰 갈등의 소지를 갖고 있다. 그것이 사교육비와 같은 교육 문제일 수도 있고 집값 문제일 수도 있다.

    손병권 간단히 정리해보면 경제위기와 관련해서는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면서 고용불안과 양극화와 같은 현상이 드러나면서 개인과 사회의 불안이 확산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으로 각 개인의 생활세계에 내재된 스트레스 역시 급증해 잠재적 갈등의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해법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자.

    ▼ 민주주의와 다른 가치의 조화를 통한 해결

    박성우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원칙을 크게 보면, 순수한 의미의 민주주의와 법치 혹은 헌정주의, 그리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자유주의적인 원칙,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원칙은 어떤 특정한 사안에 부딪히게 되면 갈등이 생길 소지가 있다. 예컨대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하다 보면 다수의 의지 혹은 민주적인 의지가 중요한 것이니까 설령 현존하는 법률 질서의 내용에 반하는 민주적 의사가 나온다 할지라도 법치에 반하는 행동을 따라야 하는 거다. 반대로 헌정주의 질서나 법치 질서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겐 민주적 의사가 다소 불안하게 보인다.

    결국 이 세 원칙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조화롭게 유지할 것인지가 관건인데, 개인적으로는 이 세 원칙을 조합하는 중요한 원칙이 공화주의라는 생각이 든다. 공화주의에서는 기본적으로 각 시민의 덕성이 요구된다. 시민 개개인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자유주의를 지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입장을 표현할 때 시민의 입장에서 사회적 담론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미 합의된 원칙으로 헌법이 있다.

    문제는 헌법정신을 해석하는 데에도 이론의 여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헌법이 우리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매개인 것은 사실이지만, 헌법에 접근하는 태도가 마치 요즘 정치권에서 하고 있는 식의 계파나 정파적인 이해관계, 혹은 이해관계를 효과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라면 헌법이 결코 우리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거다.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이해관계, 이념, 정파적인 이해 이런 것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헌법 논의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장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 점에서 헌법에 대한 강조가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이장혁 한국 사회가 왜 이렇듯 갈등이 많은지를 따져보면 사회구성원 각각이 서로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낮은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세대 간을 비교해도 전쟁과 가난을 경험한 윗세대와 그렇지 않은 아랫세대의 경험은 너무나 차이가 난다. 특정상황을 보는 시각이 차이날 수밖에 없고 그 차이에 따라 갈등이 벌어지는 것인데, 그렇다면 뭔가 시각차를 좁힐 기준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결국 헌법이 지향하는 정신, 가치인 것 같은데, 과연 정치적 의사결정을 하는 이들이 이런 기본적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 지향하는 그런 정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합의하고 그에 따라 결정하고 논의하는지 개인적으로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보면 헌법 전문이 추구하는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식의 정신과는 상당히 차이를 보인다. 최소한 헌법에서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공유 해야 그 다음 서로 토론해 오른쪽으로 갈 것인지 왼쪽으로 갈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데, 현재는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공유가 안 되고 있다고 본다. 이런 기본적인 가치와 정신에만 합의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겪는 많은 사회적인 갈등은 쉽게 해소될 것이다.

    설동훈 문제의 해법이 헌법정신 공유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헌법정신에 대한 합의가 있다고 사회갈등이 없어지는가. 헌법정신에 동의하는 사람은 남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떠난다면, 과연 갈등이 줄어들까. 그 헌법정신을 몰라서 사회갈등이 생긴다고 보지 않는다.

    ▼ 정치권과 문제와 갈등

    손병권 헌정이라고 하는 최상의 제도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정치과정의 차원에서 논의를 진행해보자. 비록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갈등에 대한 국민의 인지와 관련해 여전히 정치권이 중요하다. 텔레비전 뉴스에 자주 보도되는 것이 대통령이고 국회의원인데, 그들을 보면서 국민이 희망을 갖거나 실망하기도 하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대화와 합의의 문화를 창조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름대로 이에 대한 해법을 찾는다면 무엇보다 사안을 이념적 렌즈로 보는 타성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건파의 입지가 강화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좀 기술적인 측면에서 여야, 정당, 행정부와 국회 지도부 간 대화의 채널이 열려 있어야 한다.

    설동훈 얼마 전 국회에서 전기톱과 해머를 동원해 문짝을 떼는 극단의 갈등상황을 보게 됐다. 여야 모두 문제의 소지가 있는데 그렇게 하면 양비론으로 흐르는 게 대부분이다. 따라서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기보단 왜 우리는 문제를 그런 식으로 해결하는지에 대한 시각으로 접근해야 된다. 1987년 이전 반독재투쟁이 정당성이 없는 정권타도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면 이후 여당과 야당의 관계는 타도해야 할 적이 아닌 공존할 파트너다.

    그런데도 왜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갈등이 표출되는지 원인을 따져보면 상대를 못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룰의 문제가 아니라 운영의 문제다. 그렇다면 신뢰의 단절 혹은 부족은 왜 생겼을까. 대화 부재 때문만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은 다양한 수준에서 하는데 종국엔 그렇게 합의해 결정된 상황이 아닌 다른 쪽으로 결과가 나온다. 이를 테면 여야 간 합의한 내용이 청와대에 의해 좌절되는 것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합의를 이루기 어렵다. 그래서 그러한 정치권의 갈등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운영의 문제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손병권 운영의 문제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국회의원은 대체로 합의형 의사운영을 선호한다. 그런데도 지금 이런 파국과 교착상태가 왜 생기느냐를 따져보면 결국은 설동훈 교수의 지적대로 신뢰 부족 때문이다. 그러면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게 문제인데, 개인적으로는 지속적으로 대화를 하고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만나야 하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정당지도부 간에 대화가 어렵다면 상임위원회 소속의원들끼리, 그것도 어렵다면 의원 공부 모임이나 의회 내 동호인 모임 등 비공식적 조직에서도 지속적인 만남과 대화가 있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이슈가 무엇인가 하는 점 못지않게 이슈를 전달하는 방법이나 해결에 대한 합의를 구하는 방식 등도 무척 중요하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생각에서 어떤 이슈를 처음부터 밀어붙이면 곤란하다. 그래서 대통령 혹은 행정부 장·차관이 국회와 국민을 상대로 이슈의 중요성을 사전에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대화문화, 합의문화의 창출과 함께 중요한 것은 리더십이다. 반드시 법, 제도가 잘못돼서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헌법이 있고 국회법이 있는데 이것이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은 결국 이를 위반했을 때 여기에 대해서 적절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비정파적 리더십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설동훈 정치문화도 문제다. 국회의원은 각 개인이 헌법기관인데, 그 헌법기관이 당론에 의해서 움직여 공천을 받고 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평가받는 문화가 있다. 이건 민주주의 원리와 무관한 한국 사회 특유의 정치문화다. 마치 1980년대 학생운동 시절 동원된 신입생인 양 초선 국회의원들이 동원되는 정치문화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공천 제도라도 정비하게 되면 국회 내에서의 문제, 정치적 갈등은 좀 더 쉽게 풀어나갈 수 있을 거라 본다.

    박성우 우리가 선거 통해 대표를 뽑았을 때, 그는 지역구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국민 전체의 대표다. 정치에 참여하는 국회의원이나 유권자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쪽 지역 선거구에서 뽑은 대표이지만 그 사람이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임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그 대표를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성 중 하나다. 또 우리 정치인들도 자신들이 특정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공익을 발견하고 추구하는 정책 결정과정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 정치인들에게 긍정적 의미에서 정치 엘리티즘이 필요하다. 그래서 설령 다른 정당과 계파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정치 전문가라는 의식을 공유한다면 최소한 지난 연말 국회사태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갈등의 사회, 문화적 해결책

    손병권 사실 정치권의 갈등 원인은 사회 내 다른 갈등과는 차이가 있다. 예컨대 노사갈등과 여의도 정당 간의 갈등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사회, 문화적인 면의 갈등은 무엇이 있고 그 해결법에 대해서 간략히 논의해보자.

    이장혁 사회, 문화적인 면의 갈등 중 많은 경우가 명목적인 또는 규범적인 해법을 적용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 같다. 교육을 예로 든다면 무조건 3불정책이 된다, 안 된다 주장할 것이 아니라, 고교등급제를 풀어야 교육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을 줄 수 있는지, 아니면 기여입학제를 풀어서 그 재원을 가지고 사회적인 약자들한테 학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 논의를 통해 제도적인 운영의 묘를 살릴 필요가 있다. 명목적이기보다는 실효성 측면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설동훈 결국엔 적절한 제도를 찾는 것이 핵심이다. 가능한 한 이해관계자가 누구인지 찾고 뭔가 쟁점을 정해놓은 뒤 거기에서 합의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학자들이 늘 하는 이야기가 갈등의 제도화다. 사회갈등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거기에도 정해진 룰이라는 게 있다는 얘기다. 노동법에서 허용하는 노사분규의 범위가 있다면 그 범위 내에서 시위를 하건 집단행동을 하건 해야 한다. 대부분 사회갈등의 원인을 중재하려고 보면 둘 다 맞는 말인데 서로 양보를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상대적으로 약자들이 더 강하게 대립한다. 강자 입장에서는 조금 줄어드는 것이지만 소수자나 약자에겐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법질서를 세우겠다, 떼법이 통하지 않게 하겠다고 하는 것은 원론적으로 옳다. 그런데 이것이 규정만 지키라고 해서 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법규를 지키라고 말하기 전 법규가 지켜지지 않는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결국은 합의를 통해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화의 활성화다. 문화의 문제인데, 이것은 미디어를 통해 국민운동과 같은 형태로 나가야 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손병권 전체 토론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민주화 20년 과정에서 유권자의 정치참여 욕구가 다양한 형태로 분출하고 개인의 권리의식이 신장했으며 권리담론이 확산됨과 동시에 사회적 합의 도출이 상대적으로 어려워진 측면이 있다고 보인다. 이와 함께 1997년 경제위기 이후 경제적 양극화와 함께 사회적 유연성이 줄어들면서 공론을 집약해나가기가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경제, 사회적 이슈의 성격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이를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생겨났고, 이와 함께 국지적 성격의 갈등이 그 성격과는 상관없이 확대되어나간 경향도 있다고 본다. 대화와 타협의 제도, 문화가 더욱 절실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고견을 주신 참여자들께 감사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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