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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다큐 | 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일본 소년 손으로 운반된 독립선언문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일본 소년 손으로 운반된 독립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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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지난 회 이야기
  • 1920년 봄 조선인에 의한 신문이 창간되었다. 대한제국과 함께 사라진 지 10년 만이었다. 개조와 자각의 기운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것은 1년 전 기미년 봄에서 비롯되었다. 3월 1일 시작된 ‘독립 만세’에 대한 응답은, 무력과 억압을 완화해 세련된 통치를 구사한다는 ‘문화 정치’였다. 9월 1일, 식민통치 2기를 수행할 새 총독이 부산항에 들어왔다. 다음 날 서울 땅을 밟은 총독을 맞이한 것은 폭탄이었다. 멀리 러시아 연해주에서 내려온 60대 노인의 허리춤에서 나온 한 발의 수류탄이 역두에 작렬했다.
(제7장)

일본 소년 손으로 운반된 독립선언문

2005년 재현된 3·1절 행사.

총독이 도착하기 한 시간 전이었다. 오후 4시를 지날 무렵 남대문역전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대로는 밀려드는 군중으로 출렁댔다. 물이 넘치는 둑을 막기라도 하듯 가로변을 따라 조선군사령부 제78연대장 장굴전(長堀田) 대좌가 지휘하는 보병 2개 대대가 도열했다. 기병대는 말을 달려 남대문통 5정목 일대를 쉴 새 없이 오갔다. 15년 전 을사조약 때나 10년 전 경술국치 때보다 더 삼엄한 분위기였다. 군중과 군대가 빚어내는 긴장감은 6개월 전 봄의 만세시위 때 쪽에 더 가까워 보였다.

을사조약과 5년 후 병합조약은 한 방의 총성도 울리지 않고 체결되었다. 조인이 되고 나서 항의 표시로 개개인이 자결을 하거나 시위를 한 경우는 있었지만 조인에 이르기까지 이를 막고 나서는 집단적 움직임은 뚜렷이 없었다. 궁정 안에서 입씨름과 고함이 있었을 뿐 협정 통과 과정에서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은 무혈 조약이었다. 세월이 흘러 1919년 3월 초, 남대문통 거리는 유혈사태로 얼룩졌다. 그로부터 두 달간의 시위와 진압으로 전국에서 7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군중보다 일찍 역에 도착한 환영객들은 명찰을 교부받아 가슴에 달고 역사 좌측 화물반출구를 통해 입장했다. 그리고 도면에 그려진 대로 플랫폼의 정해진 위치를 찾아가 섰다. 군인과 조선귀족, 조선총독부와 산하 각 관서의 기관장들이 다 모였다. 우도궁(宇都宮) 조선군사령관, 정법사(淨法寺) 20사단장, 방하(芳賀) 총독부의원장, 도변(渡邊) 고등법원장, 대야(大野) 군참모장, 오전(奧田) 여단장, 촌전(村田) 소장, 하내산(河內山) 재무국장, 송영(松永) 경기도지사, 금곡(金谷) 경성부윤 등이 구획별로 나뉘어 정렬했다. 여기에 각국 외교관 일동, 은행계와 실업계 유지, 신문 관계자들을 합쳐 1000명 규모의 환영단이 플랫폼을 가득 메웠다.

기미(己未) 1919년, 대정(大正) 8년이었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조선어 신문인 조선총독부 관영 매일신보는 9월 2일의 남대문역 광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5시가 되자 121호 기관차가 끌고 온 부산발 임시급행열차가 천천히 역내에 굴러들어올 때 남산의 한양공원 서쪽, 성벽 고지에서 야포병 대대가 발사한 19발의 예포소리는 은은히 경성 용산의 하늘에 울렸다. 열차가 멈추자 맨 가운데 귀빈차에서 구보(久保) 만철경성관리국장의 선도로 차에서 내린 재등(齋藤) 총독은 흰 해군대장 정복에 가슴에는 훈일등욱일장(勳一等旭日章)이 찬란히 번쩍이고 수야(水野) 정무총감은 프록코트. 총독 부인, 총감 부인, 시전(柴田)학무국장, 환산(丸山)사무관, 수옥(守屋) 이등(伊藤) 양 비서관과, 부산까지 마중 나간 국분(國分)사법국장도 내린다. 출영자는 일제히 모자를 벗고 경례를 하였다.

미소를 띤 총독은 수야 총감과 더불어 플랫폼 환영객 앞을 차례로 통과하여 정중히 인사하고, 특별히 중요한 손님들과 외국영사단, 조선귀족들에게는 친히 손목을 잡고 인사한 후 일행은 귀빈실로 들어갔다.

군복에 프록코트에 일본 겉옷 하오리(羽織)-경성의 명사들이 저마다의 복장으로 총독의 뒤를 따라 영접장을 나섰다. 역 바깥에는 동원되거나 구경 나온 수많은 사람이 말 그대로 운집했다. 하늘에는 잔뜩 구름이 깔리고 대지에는 음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거리는 아침부터 일장기로 물결쳤다.

총독이 탄 열차가 부산을 출발한 것은 오전 7시 반이었다. 7시 정각 출발로 알고 새벽잠도 설친 채 일찌감치 역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300여 출영객은 영문도 모르고 저마다의 위치에서 30분을 더 대기했다.

5시쯤 둥둥 떠오르는 햇빛이 망망한 바다에 키스할 적에 신 총독과 정무총감 일행은 일찍이 잠을 깨어 초가을 새벽바람이 부드러이 얼굴을 스쳐갈 적에 응접실 의자에 늘어앉아 부산의 아침 경치를 바라보며 즐거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좌좌목(佐佐木) 경남도지사, 전중(田中) 이왕직 사무관, 본전(本田) 부산부윤, 구보(久保) 만철경성관리국장 등의 예방이 있었고 수행원들은 분주히 짐을 옮겼다. 부산시내는 오전 5시부터 검은 무늬 놓은 하오리와 프록코트 차림의 전송자들이 정거장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각 여관에 투숙한 서울서 온 환영자들도 일찍부터 일어나서 모두 출발 준비를 하고 6시경의 정거장에는 전날 총독이 부산에 도착할 때와 같이 관리 시민 재향군인회와 애국부인회원, 경성에서 온 환영단으로 파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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